똑똑, 안아줄까요 12

by 브리

#13


"세현이는 어떤 사람이냐고? 음... 파수꾼? 예전에 내가 세현이를 처음 봤던 날 말해줬잖아. 망원경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세현이를 지켜봤었지. 그런데 그거 말고도 다른 모습이 있어. "

"결정적 순간이 따로 있어?"

"봄이었는데 집에 가는 길에 아기새가 땅에 떨어져 있었어. 나는 연습을 하다가 지쳐서 땅에 떨어졌었나봐. 다른 애들은 그냥 가는데 세현이만 다시 돌아와서 그 아기새의 곁을 지켰어. 동네 길고양이가 근처에서 아기새를 채어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거든. 세현이가 지키고 서서 다시 날아갈때까지 기다려줬어."

"그래서 파수꾼이군."

"그때 생각했지. 아마 저 애는 자기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겠구나. 모르는 아기새에게도 저렇게 마음을 써주는데 자기 사람은 어떻겠어? 영교야. 나는 세현이가 나를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

-<공연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교랑 재란이 나눈 대화 중에서>-



재란의 콜백을 기다리다 세현은 답답한 기분이 들어 집을 나왔다.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지만, 현관 벨은 울리지 않았다. 영교에게 전화해 물어볼까 했다가 잔소리가 듣기 싫어 그만뒀다. 세현을 분리 불안 어린아이 취급할 게 뻔했다. 오후 햇살이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빌리지 안은 조용하고 인적이 아예 없어 마치 영화 세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집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면서 점점 범위를 넓히다 보니 어느새 경비실이었다. 세현이 경비실 창문 쪽으로 다가가자 안에서 경비원이 전화를 받고 있는 게 보였다. 경비원은 몸을 굽실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마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꽤 거물인 모양이었다. 경비원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더니 곧 세현을 발견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역시 착오가 있었네요.”

“그래요?”

“아까 들어가신 분은 입주자님 댁이 아니라 다른 집에 오신 건데. 이름과 전화번호가 같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등록한 전화번호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고요?”

“네. 그렇더라고요. 오늘 오신 이재란 님은 4동에 오신 분인데.”


그럴 리가 없다. 전화번호가 개인식별번호로도 쓰이는 세상에서 같은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진 사람이 또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세현은 재란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 몇 호로 갔습니까?”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제 상시방문객 정보로 들어온 사람이라면서요. 원칙적으로는 제 쪽 손님이 아닌가요?”

“아니 그건 착오가…….”

“착오라는 걸 알았다면 그 사람도 그 사실을 인지했다는 건데. 사과도 없습니까? ”

“딱히 그분 잘못이라고 하기엔….”

“그럼 경비업체 잘못입니까?”

“아니 저희도 정해진 절차대로 한 건데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된 거라서요.”

경비원은 쩔쩔맸다. 늘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하던 젊은 청년이 이렇게 깐깐한 사람인지 짐작도 못 했다. 세현은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서늘하게 물었다.


“어딥니까?”


경비원은 잠깐 고민하다 자신이 알려줬다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집이에요.”

“그 집이요?”

“그 살인 사건 난 집이요. 보국 그룹”


세현의 머릿속에 ‘김범학’이라는 이름 세글자가 떠올랐다. 새신부를 죽였다고 소문난 보국의 황태자. 그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세현도 동료들과 김범학이 직접 죽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살인에 관여하긴 했을 거라고 수다를 떨었다. 남의 일처럼, 아니 진짜 남의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술자리 안주 삼아 떠들었던 건데 지금 그 집에 재란이 가 있다니. 경비원이 몇호인지 말하지 않아도 아르디움 빌리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집이 어딘지 알았다. 세현이 사는 3동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4동이 보이고 거기에는 단 세 집만 있다. 김범학의 집은 4동에서도 가장 노른자위라는 201호다. 세현은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왜 거기로 간 걸까? 나에게로 오다가 길을 잃은 건가? 세현의 머릿속에 요즘 재란이 선을 보러 다닌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숨이 턱 막혔다. 평범한 집이 아니라 보국 그룹 김범학의 집이다. 무심히 넘겨버릴 일은 아닐 성싶었다.


하지만 4동 앞에 도착했으나 세현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문이 잠겨 있으니 들어갈 수가 없고 그렇다고 안면도 없는 남의 집에 초인종을 누를 수도 없었다. ‘저기요. 실례합니다만 혹시 이재란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냔 말이다.


입구를 노려보던 세현은 뒷걸음질을 쳐서 2층을 살폈다. 밖에서는 보이는 게 없다. 세현은 다시 재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또 무엇이 전화를 못 받게 방해하고 있는 걸까? 재란의 전화는 가끔은 빛도 닿지 않는 블랙홀 너머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응답이 없다. 세현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집중하면 나오는 버릇이다.


세현은 4동 입구 맞은편 화단에 걸터앉았다. 두 손 털고 망부석이 되어 기다리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다.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예전 일을 떠올렸다.


세현은 미국 댄스 연수에서 돌아오자마자 데뷔를 했다. 재란이 장담했던 그대로였다. 그의 팀은 데뷔와 동시에 인기를 얻었고 모든 시간은 그것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데 투자해야 했다. 밤낮이 바뀌고 숨 쉴 틈 없이 스스로를 조여야 했던 시간. 그때 세현을 버티게 했던 건 옆에 있던 이재와 멀리 있던 재란이었다. 재란은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메시지를 보내왔다. 답장을 바라며 쓴 것 같지 않은, 그냥 자신의 일상을 간단히 메모하듯 보내는 메시지가 세현에게는 자양강장제였다. 재란은 자기 전,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세현에게는 아침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걸 웃고 있으면 이재가 “그렇게 좋냐?”고 물었다. 당연했다. 세현은 그걸 기다리며 밤을 새우며 연습하고 무대를 했다. 재란이 그에게 한없이 밀려오던 시기였다.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게 좋았다. 세현은 바빴고 아이돌이었고 그러면 당연히 연애는 무리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고백은 무용지물이었다. 오만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기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땐 어렸고 인기가 넘쳐났으니 우쭐대느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첫사랑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은 재란이었고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급한 대로 피아노 학원 선생님 이야기를 해야 할 만큼 제일 깊은 곳에 간직한 진심이었다.


적당한 온도였던 그들의 관계가 끓어오른 건 7년 전이었다. 북미 투어를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던 날. 공항에서 공연장으로 이동하면서 세현은 기분이 우울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그리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모에게 전화해서 영교의 행방을 물었다. 도대체가 계속 연락을 하는데도 영교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었던 것이다. 영교뿐만이 아니었다. 재란도 묵묵부답이었다. 이모와의 통화도 쉽지 않았다. 잭 그린 이모부에게서 이모의 대학 사무실 전화번호를 받아내고 그리로 전화하니 자리에 없다고 하고. 공연장에 도착할 때쯤 돼서야 간신히 이모와 통화가 됐는데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영교는 여름방학 캠프 가이드로 아르바이트 간다고 하더구나. 언제 출발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딸이 언제 여름방학 장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줄도 모르는 이모에게 뭘 더 물을 수 있겠는가. 분명 북미 투어가 정해지자마자 영교와 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세현이 속한 그룹 <아이로닉스>는 이제부터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오클랜드, 덴버, 휴스턴 등 12개의 도시에서 두 달간 공연할 예정이었다. 회사에서는 투자였고 그룹 차원에서는 도전이었다. 잘 되면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축하한다, 자랑스럽다, 언제 오냐, 볼 수 있냐, 이런 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교는 나 몰라라 하고 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고 재란은 아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온다고 연락했잖아! 그런데 무시냐?


세현은 전화를 끊고 대기하던 매니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로스앤젤레스 남쪽 외곽에 위치한 엘소이 볼룸 공연장이었다. 언덕을 따라 자연스럽게 경사가 진 단층 건물은 언뜻 보면 공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문에는 전면 유리 출입구와 공연정보가 게시된 게시판이 보이고 티켓 창구 라인 네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매니저는 세현을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안내했다. 공연 연기자와 스태프들이 이용하는 뒷문은 얇은 알루미늄으로 되어 팬들이 몰리면 그대로 뜯겨나갈 정도로 허술해 보였다.

“연락됐어?”


다른 멤버들과 함께 대기 중이던 이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재도 영교에게 전화했지만, 통화는 되지 않았다.

“오는 거 뻔히 알고 있으면서 알바를 잡아? 너무한 거 아니야?”

“어쩌겠어. 이모가 등록금만 주고 생활비는 벌어서 쓰라고 한다는데.”

이럴 땐 정말 그들의 세계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현은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최대 만 명이 들어올 수 있는 이 공연장은 평소에는 무용이나 클래식 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해외보이밴드로서는 그들이 최초였다. 회사는 국내 언론에 기사를 많이 뿌리고 온 만큼 품위유지는 하도록 애를 썼다. 멤버들은 생각보다 공연장 사이즈가 커서 놀란 모양이었다. 무대 끝에서 끝까지 걸으며 크기를 재고 제자리에서 크게 뛰는 멤버도 있었다. 이미 스태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조명과 음향을 맞추고 무대 의상을 정리 중이었다.

“자. 모여 봐. 본 공연까지 이틀이야. 이틀 동안 체크해야 하는 게 산더미인데 시간 낭비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이번 투어의 총 연출을 맡은 지현오 CP가 마이크를 통해 멤버들을 불러모았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각 팀장도 호출했다.


“다들 모였습니까?. 공연 시작이 매끄러워야 끝까지 사고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첫 공연에는 정신 집중하시고 돌발상황 벌어지지 않게 미리미리 챙겨놓읍시다. 우리 가수분들. 스태프분들, 서로 인사합시다!”


이렇게 상호 인사를 나누는 것부터가 공연 시작이다. 세현을 비롯한 일곱 멤버들은 무대 위에 서서, 스태프들은 각자 자리에 서서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이로닉스>의 첫 해외 공연입니다. 멤버들, 무엇보다 몸 관리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무대에 서지 못 하는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우리 멤버들 관리해주는 매니저 팀이 좀 더 신경 써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이 아니니까 진행팀! 팀장님 어디 계십니까?”

무대 오른쪽 관객석 쪽에서 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진행팀이 아무래도 전반적인 것들을 다 관리하니까 일이 많을 겁니다. 이번에 현지에서 직원을 좀 더 모집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힘들 겁니다. 힘 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시선이 진행팀으로 몰렸다. 진행팀장 옆에는 네 명 정도의 젊은이가 서 있었다. 무심히 그들을 보던 세현의 눈이 커졌다. 아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덩치 큰 남자 뒤로 숨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서영교?’


어린아이같이 작은 얼굴, 뾰족한 턱, 무엇보다 입술을 모으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이 딱 영교다. 화들짝 놀라는 모양새가 쓰레기통 뒤지다가 걸린 치와와였다.


세현은 이재를 툭 쳤다. 이재도 알아차렸는지 눈이 커져 있었다. 쟤가 왜 저기 있는 거지? 여름 캠프 갔다며? 세현이 입을 떡 벌리고 있으니 숨어있던 영교가 턱을 위로 쓱 미는 행동을 해 보였다. 침 떨어지니 입 닫으란 소리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세현의 시선이 그리로 돌았다.

“무대 팀은 안전과 직결되는 만큼 무너지는 데 없도록 보강목 잘 대주세요. 그리고 멤버들 개인 무대 바뀔 때 동선 꼼꼼하게 체크해서 수정해야 하는 부분은 빨리 말해주시고요.”


무대 팀장이 알겠다는 의미로 양팔로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무대 장 뒤에 건장한 남자들 무리와 한 명의 여자가 보였다. 세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를 쓰고 스카프로 얼굴 절반을 둘둘 말고 있는 그 여자는 재란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헐렁한 긴 팔 티셔츠, 두꺼운 청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연장주머니를 매단 모습이 씩씩해 보였다.


서프라이즈?


세현은 영교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서프라이즈 좋아하는 영교의 작품일 소지가 다분했다. 그럴 법하다. 그래도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건지 궁금했다. 지금 당장 내려가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연출자는 계속해서 인사를 시키고 정신이 없었다. 세현은 다음 팀인 조명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도 시선은 무대 팀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외면하던 여자는 세현이 죽일 듯이 노려보자 스카프를 내리고 모자를 벗어 보였다. 희고 갸름한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 재란이 맞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나를 보러 온 건가? 기쁨이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재란은 세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세현도 슬쩍 손을 들어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휘이익하고 긴 휘파람 소리가 났다. <아이로닉스>의 두 번째 멤버 우민이 낸 소리였다. 제일 맏형인 성준이 우민의 엉덩이를 툭 찼다. 이번에는 현호가 킥킥 웃었다.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왜 이래?


“야, 쟤 엄청 예쁘다.”


이재 옆에 건영이 속삭이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아, 예뻐서 나온 반응이로군. 세현은 스물두 살의 재란을 바라봤다. 작년 겨울에 방학이라고 한국 들어왔을 때 잠깐 보고 반년만이다. 그 사이 머리카락 길이 말고는 달라진 게 없다. 오목조목 빈 데 없이 들어찬 이목구비와 생크림 같은 피부는 여전히 빛이 난다. 이제 재란은 옆에 선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세현 쪽에서는 재란의 뒷모습만 보였다. 볼이 붉어진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세현도 알고 있는, 온몸에 도파민이 돌게 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 보이는 남자의 즉각적인 반응이다. 어쩐지 보기 싫다. 세현은 시선을 돌렸다.


바로 연습이 시작되고 세현은 다시 영교든 재란이든 찾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애들은 정말 서프라이즈처럼 놀래켜 놓고 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연습은 쉴 새 없이 흘러갔다. 매니저가 대기실에 저녁을 준비해놨다고 말했다. 세현은 땀에 쩔은 머리카락을 털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멤버들은 기운이 넘쳤다.


“무대가 아직 다 완성이 안 됐던데 가능할까?”

“형, 윤달 싸비 부분에서 박자가 밀리던데. 그거 다시 한번 해봐요.”

“나 솔로 할 때 조명이 바뀌는 속도가 늦더라.”

왁자지껄한 수다를 떨며 숟가락을 드는데 건영이 재란 이야기를 꺼냈다.

“인사할 때 무대 팀 그 여자 봤어요? 와. 그런 여자가 왜 거기 있지? 무대 위에 있어야 할 사람이던데. 얼굴, 몸매 다 완벽해. 완전 S자.”

“배우 윤소정 닮지 않았어? 키가 좀 더 큰 윤소정 같더라.”

“아니야. 윤소정보다 더 성숙하고 글래머러스한 게 훨씬 꼴려.”

“그 여자도 우리랑 투어 같이 도는 거지? 그럼 두 달 내내 보겠네.”

“앗싸. 투어 돌 맛 난다.”

“나는 그 여자보다 진행팀에 있던 야리야리한 여자애. 걔가 더 좋더라. 얌전해 보이지만 사실 그런 애들이 오히려 더 강하고 쿨하다고.”

“오오. 나도. 나도.”

“남자친구 있나 없나 내기할래? 둘 중 남친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지 맞히기 만원 빵 어때?”

“나는 둘 다 ‘있다’에 건다.”

“의외로 없을지도?”

“그게 뭐가 중요해? 벌써 남자랑 이리저리 뒹굴고 난리 쳤을 텐데. 여기 미국이잖아.”


멤버들이 떠드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매니저인 동주가 화를 버럭 냈다.


“남자친구 없으면 뭐 하게? 투어 도는 동안 사귀기라도 하게? 꿈 깨라. 그러다가 나중에 골치 아파지니까. 우리 데뷔한 지 겨우 2년이야. 연애 절대 금지다. 연애하다 절리면 그 즉시 탈퇴야.”

“에이 형.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냥 보는 거야. 보는 거. 아니 눈으로 즐기지도 못해?”

“연출 걔는 제정신이야? 한창때 남자들이 득실득실한 여기에 여자애들을 고용하고. 이건 뭐 사고 나라고 제사 지내는 거잖아.”

“연출님이 채용했겠어요? 팀장급에서 했겠지.”

“아무튼, 너희 사고 치지 마. 공연 날 대표님도 오시는데 괜한 소리 들리게 하지 말란 말이야.”


동주의 엄포에 가까스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다. 세현은 주먹을 쥐었다. 이재가 나무젓가락을 쥐고 으드득 부러뜨리는 걸 보고 일단은 가만히 이재를 눌렀다. 그렇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이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하고 벌떡 일어서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사내새끼들 하는 이야기가 다 저렇지, 싶지만 속이 느글거리고 화가 솟구쳤다. 이재와 눈이 마주쳤다.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까? 영교는 사촌이라고 해도 재란이는 괜히 오해만 불러일으키기 쉽다. 사실과 헛소문이 섞여서 돌아다니는 이 세계에서는 연기가 아예 안 나는게 정답이다.

“영교한테 연락해봐.”


이재가 속삭였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 세현이 밥을 먹고 이를 닦으러 화장실에 가는데 영교와 딱 맞닥뜨렸기 떄문이다.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나오던 영교는 화장실 표지판과 세현을 번갈아 돌아보더니 아! 하고 뭔가를 깨닫고는 얼른 뒤로 돌아섰다.


“어디 가는 거야? 서영교!”


세현이 얼른 영교의 목덜미를 잡았다. 영교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세현의 손을 찰싹 때렸다.

“놓으시지요. 박세현씨.”

“뭐야? 말투가 왜 이래?”

“얼른 놓지요? 제가 착각해서 출연자 전용 화장실로 왔군요.”

“그런 게 있어?”

“어머, 서로 존대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박세현씨는 모르시나 봐요? 존댓말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설명해보시지요. 서영교씨. 이게 무슨 서프라이즈인지.”


말투는 공손하나 눈빛은 살벌하다. 영교는 의외라는 얼굴로 세현을 쳐다봤다.

“왜 심장에 스크래치 난 얼굴이지? 지금 좋아서 방방 뛰어야 정상 아닌가? 서프라이즈인데? 야! 나랑 재란이랑 여기 아르바이트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둘이 방학 전부터 시간 맞추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왜? 그리고 할 거면 미리 말해줘야지.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

말을 하다 보니 점점 격해졌다. 세현 평생에 이렇게까지 세게 영교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전화하고 문자하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잖아. 왜 안 하느냐고. 누가 이런 서프라이즈 해달래?”


영교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 있어? 왜 화를 내? 우리가 여기 온 게 싫어?”

“아니. 오더라도 말을 해야지. 갑자기 오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그리고 공연이 코 앞인데 이런 식으로 사람 놀라게 하는 건 아니지 않냐? 공연 망치면 어쩌려고!”


이제는 눈이 가늘어졌다. 영교는 세현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 세현의 심사가 왜 꼬여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내가 재란이한테 너희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쓸쓸하다고 우는 소리를 좀 했어. 그렇잖아. 너희는 갈수록 유명해지고 내가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에 살고 있고. 그랬더니 재란이가 이 아르바이트가 있으니 해보자고 하더라고. 아는 사람한테 제안받았다면서. 너희가 있는 세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보고 싶어서 그러겠다고 했어. ”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고르던 영교는 울컥해져서 세현을 째려봤다.


“미리 말 안 하고 서프라이즈 한 거 미안해. 매번 하던 거라 너희 상황이 달라진 거 인지하지 못했어. 네 위치가 달라졌는데…. 그리고 서로 인사하는 시간이 있는지 알았다면 말했을 거야. 말했더라도 다를 게 없겠던데. 일개 스태프가 출연자하고 뭐 그리 얽힐 일이 있다고. 화장실도 다르게 써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 말이야. 어쨌든 미안해. 이 개자식아.”


영교가 팩 돌아서 사라졌다. 멀어지는 영교의 뒷모습을 보며 세현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건 내뱉는 즉시 알았다. 정작 한 소리 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애 먼데 답답한 속을 쏟아냈다는 생각이 들어 세현은 기분이 엉망인 채로 리허설을 마쳤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는 망설이다 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있어?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도 재란은 답이 없었다. 아마 영교가 다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자기가 어떤 말을 했는지 들었으니 재란도 섭섭하겠지? 하. 서프라이즈였는데. 나는 그냥 놀라고 즐거울 수 있었는데.


공연 날이 되어서도 재란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같은 공연장에 있을 텐데 어째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경을 쓰지 말자 싶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놓고 가방에 넣어두고 잊어버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영교가 톡 쏘며 했던 말이 한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공연이 끝나고 오클랜드, 덴버까지 갔어도 세현의 메시지 함은 비어있는 채였다. 공연 반응은 좋고 회사의 칭찬이 이어졌지만 세현은 들뜨지 않았다. 기분이 하나도 안 났다. 그저 세현은 끝없이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세현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 재란을 보지 못한 건 자신뿐이라는 거였다. 멤버들은 커피를 마시며 장도리를 힘차게 휘두르는 재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매니저 형은 재란이 자기 몸보다 더 큰 합판을 들고 가길래 도와줬다는 자랑 아닌 자랑도 하고 하다못해 이재도 화장실 가다가 재란을 보고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는데 왜 세현의 눈앞에만 나타나지 않는 건지. 이건 명백히 재란의 의지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세현은 깨달았다. 재란이 멀어지겠다고 마음먹으면 세현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다시 파도가 밀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애틀랜타 공연이 끝난 날 영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이제 여름 캠프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해. 투어 마지막까지 했으면 좋았겠지만, 캠프 아르바이트가 선약이어서 취소할 수가 없어. 덕분에 돈 많이 벌어간다.”

“... 재란이도 끝이야?”

“아니. 재란이는 끝까지 할 거야. 뭐야? 아직 재란이랑 말 안 했어?”

“재란이 화났어?”

“재란이가 너한테 화났냐고? 그런 일은 없어.”


엄청나게 단호한 말투였다. 세현으로서는 어디서 이런 확신을 가지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영교는 이런 세현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덧붙여 말했다.

“재란이는 네가 공연에 집중했으면 해서 그런 걸 거야. 방해하면 안 되니까. 걔는 네 커리어에 진심이라니까. 팬이잖아.”


세현이 대답이 없자. 영교는 “바보”라고 읊조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진짜 그것뿐일까? 그날 밤 세현은 이재에게 공연장에 게임기를 두고 왔으니 같이 가지러 가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재는 묵묵히 세현을 따라갔다. 긴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공연장에는 무대 팀이 무대를 철거 중이었다. 다음 날이면 내슈빌로 가져갈 것들을 해체하고 포장하느라 쉴 새 없었다. 함께 따라온 매니저는 이재에게 맡기고 세현은 어둠에 몸을 감추고 무대 팀 사이에서 재란을 찾았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대 안쪽에서 전선을 갈무리하고 있는 재란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반대편 전선을 들었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재란이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여긴 무슨 일이야?”


재란이 얼른 세현의 뒤를 살폈다.


“이재는? 혼자 왔어? 쉬고 있을 시간 아니야?”

다다다 질문이 쏟아졌다. 세현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프라이즈.”


흥이 하나도 없는 서프라이즈에 재란의 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웃음소리에 놀라서 얼른 입을 막고 재란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세현을 끌고 좀 더 외진 곳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와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지금 이재가 매니저 형 정신을 쏙 빼놓고 있을걸.”

“한이재가? 상상이 안 돼.”


세현은 재란을 깊숙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멀쩡한 얼굴이다. 심사가 뒤틀렸다. 진짜 화가 난 게 아니었나? 나만 재란의 기분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졌던 건가?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그쪽으로 뻗치는 마음을 가다듬느라 쏟아부은 에너지가 얼마던가. 얼룩 하나 없이 말간 재란의 눈자위를 보며 세현은 자기도 모르게 섭섭한 속내를 드러냈다.


“얼굴 보기 진짜 힘드네. 고생했다. 나 피해 다니느라.”

“무슨 소리? 피한 거 아닌데. 그리고 나는 계속 너 봤어.”

“그래서 내 전화 안 받았구나. 너는 계속 나 보니까…. 불공평해.”

순간적으로 세현은 열이 화끈 올랐다. 제 입에서 나간 소리가 맞나 싶을 만큼 유치했다. 천하의 박세현이 지금 이런다는 걸 누가 알까. 재란이 인상을 찡그리며 흘러내리니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영교랑 또 무슨 일 있었어?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영교가 너 많이 화났다길래 몸 사린 건데. 생각해보니 너희로선 신경 쓰이겠다 싶더라고. 생각이 짧았어. 그래서 반성하고 제대로 서포트 하려고 이 한 몸 불살라서 열심히 일했어. 봐! 내 손가락 다 까진 거.”


재란은 목장갑을 벗고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손끝에 하얀 피부 껍질이 들고 일어나 있었다.


“그러게 왜 무대 팀이야. 제일 막노동인데.”

“대학에서 조소 전공이잖아. 전공이랑 제일 비슷해서.”


세현은 재란의 손을 잡지도 못하고 뚫어져라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덥석 잡고 거슬거슬해진 손바닥을 어루만져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행동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재란이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어디 아파? 기운이 없어 보여.”


어깨가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겁다. 정제되지 않은 탁한 감정을 쏟아내면 재란은 어떻게 할까? 혹시 도망갈까? 세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때문이야.”

“응?”

“네가 내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에 답도 안 하니까 그렇지. ”


재란의 동공이 커지는가 싶더니 곧 침묵이 이어졌다. 무대를 뜯느라 쾅쾅거리는 쇳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세현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재란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박세현. 너 영화 찍니? 간밤에 연애소설 좀 봤나 봐.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사실은 세현도 자기 마음을 정확히 몰랐다. 그저 속상하고 짜증이 나고 때로는 부끄럽고 슬펐다. 그는 재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서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과 인정 사이에서 헤매다 나오는 말이 다 저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무게추는 기운 것 같았다. 이미 마음이 젖어버린걸. 세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안 그럴게. ”

“뭐?”


세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 그런다고. 답도 잘하고 전화도 잘 받을게.”

재란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진심인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세현은 멍하니 재란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공연장의 조명 덕분에 눈동자는 거울처럼 세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세현은 거기서 점점 숨이 차오르는 자신을 보았다.


“진짜?”

“진짜. 그러니까 세현아.”


재란이 세현의 팔을 잡았다.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너는 나한테 절대적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그러기로 결심했어. 나는 너를 싫어하지도 멀어지지도 않을거야. 네가 괜찮다면 평생 네 옆에 있을 건데. 어깨 펴. 너 기운 없는 거 보기 싫다. 너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야지. 그래야 내 가수지. 배고파?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세현은 재란에게 묻고 싶었다. 네가 지금 있는 자리가 어디냐고. 파도가 밀려오는 건가? 아니면 밀어내는 건가? 나를 흠뻑 적셔버린 파도는 나를 사랑하는 건가? 아니면 선을 긋는 건가?


“진짜 다 해 줄거지?”

“그럼.”

“이재란. 나 안아줘. 기운나게.”


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은 목소리로 세현이 말을 씹듯이 내뱉었다. 재란의 손이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멈췄다. 멈칫, 재란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더러운 청바지에 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을 확인하고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세현을 보았다. 세현은 알아차렸다. 세현을 밀어내지 않고 되묻지도 않았다는 건 적어도 거절이 아니란 뜻이다.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세현은 재란에게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재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실크같이 부드러운 피부가 와 닿았다. 텁텁한 먼지 냄새와 희미한 꽃향기. 미세한 목 뒤의 솜털. 품 안에 쏙 들어온 재란의 존재가 확실한 양감으로 느껴졌다. 가느다란 허리를 힘주어 당기자 말캉하고 부드러운 가슴이 세현의 심장 아래쪽에 붙었다. 나도 놓지 않을 거야. 세현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날 세현은 있는 힘껏 재란을 끌어안았고 까진 손가락을 후후 불어주고 돌아왔다. 매니저 형은 화장실에 가서 이렇게 오래 있었던 걸 보니 배탈 아니냐며 걱정을 해주면서도 얼굴색이 좋다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재가 말해보라고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지만, 세현은 히죽 웃고 입을 다물었다.

그날을 떠올리자 무의식중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재란을 기다리는 일이 당연해진 건. 세현의 연락을 안 받는 일이 없을 거라던 재란은 그 뒤로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그러나 기다리면 언제나 돌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재란이 현재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기다리면 온다는 확신이 있었다. 햇살이 길어지며 단지 안에는 주황빛이 가득했다. 4동 앞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갔다. 세현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봤다. 순식간에 지나가 자세히는 못 봤지만, 고급 외제 차를 탄 말끔한 남자였다. 혹시,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데 세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마침내 재란에게서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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