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안아줄까요? 11

by 브리

#12 현재


“내 주변에 제일 상식적인 사람이 너야. 다들 돈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고 또 돈이 주는 권력에 미쳤어. 이런 환경에서 나만큼 자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왜 내 눈을 피해?”


“민망해서 그런다. 나 열일곱살때부터 연습생이었고 열아홉살에 데뷔한 진짜 아이돌이거든. 세상 물정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인데 뭘 그렇게 치켜세우냐?”


“아니야. 너는 측량자고 기준점이야. 나는 가끔 너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봐. 그러면 답이 단순해져.”


-<미국 샌안토니오 공연 후 재란과 세현 둘만의 뒤풀이를 하면서 나는 대화>-






선호 그룹 최상위 포식자 안희녀 여사의 침실은 2층 제일 왼쪽에 있다. 원래는 1층 절반을 사용했는데 창 너머 풍경을 멀리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2층으로 옮겼다. 팔십 먹은 노인이 2층을 쓰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다고 말려봤지만 소용없었다. 할머니는 한다면 하는 여자였다. 사실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건 할머니가 몇 년마다 한 번씩 부리는 심술이었다. 자신이 아직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이고 권위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몽니였다.


화장실이 딸린 15평 정도 되는 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나 있다. 창 하나는 남쪽으로 나서 정원을 면하고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대나무 숲이 바로 붙어 있었다. 지금 이 시기에 안희녀 여사는 서쪽 창을 열어 놓는 걸 좋아했다. 아침이면 무성한 대나무를 통과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흰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넘기고 의료용 베드에 기대어 엄격한 눈으로 자신의 손녀딸, 재란을 바라보았다. 재란은 집 사용인이 가져온 약봉지를 찢어 안희녀 여사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약 드시고 나면 제가 가져온 쿠키 하나 드셔보세요. 덜 달고 고소해요.”




재란은 속으로 약 개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지난번보다 한 개가 줄었다. 상태가 조금 호전되었다는 의미다. 할머니는 손을 가느다랗게 떨며 천천히 약을 입으로 가져갔다. 재란은 재빨리 물컵을 들었다.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할머니는 올해 82세였다. 재란이 처음 할머니를 보았을 때가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는데 그때는 검은 머리에 밍크코트를 우아하게 입고 있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지금은 병과 약 때문에 마르고 옹색해졌다. 그래도 할머니의 까칠한 성격과 마음먹은 대로 해내는 집요함은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물을 쭉 들이켜고 정해진 아침 루틴을 마쳤다. 5시 기상 6시 식사 7시 아침 약 먹기. 이런 할머니의 스케줄은 대통령이 와도 깨트릴 수 없다. 재란도 그에 맞추기 위해 5시 반에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보통 재란이 오면 아침 루틴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재란이 구워내는 진저쿠키를 먹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재란은 빈손이었다. 이사한 집에 베이킹을 할 도구가 없었다. 성운동 집에 가스 오븐이 있었는데 2년 전 주방을 리모델링 하면서 없애버렸다. 이제 과자를 먹는 어린아이도 없고 먹고 싶다면 백화점 베이커리에서 공수해오면 간단하니까. 재란은 일부러 선호 백화점에 들러 제일 부드러운 쿠키를 사 왔다. 할머니는 얇게 설탕이 입혀진 쿠키를 한입 먹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그래도 음식은 버리는 법이 아니라는 철칙을 지켜 하나는 완전히 먹었다.




“내가 요새 너한테 신경을 좀 못 썼지. 아침에 김 회장 불러서 한마디 했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아침부터 혼나셨네요.”




재란이 농담조로 말하자 안 그래도 가늘게 떨고 있던 할머니가 더 크게 움찔거렸다.




“그리 경망스럽게 말하면 못쓴다. 너, 선 자리에 나가서도 그러는 거야?”


“공식적인 자리에선 배운 대로 하죠. 참하게, 우아하게, 매력적이게.”




싱긋 웃는 재란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할머니는 혀를 쯧쯧 찼다. 할머니의 눈에 스친 경멸을 읽었지만, 재란은 모른 척하고 할머니 입에 묻은 쿠키 가루를 털어주었다.




“내 단단히 일러뒀다. 목록 다시 뽑으라고 말이야. 상대가 그 모양이니 네 맘에 차는 놈이 없지. 내 손녀딸을 뭐로 보고 그런 알맹이 없는 사람으로만 골라놓은 건지. 쯧쯧. 새로 나오는 대로 만나보고 적당하게 올해 안에 날 잡자. ”


“네.”


“잘 살펴보되 이상한 데서 자존심 부리지 마라. 자기 위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만큼 꼴불견이 없어.”


“네.”


“알아서 잘하면 얼마나 좋아? 나 죽고 나면 어쩌려고 이러는 원.”


“그러니 약 잘 드시고 운동 열심히 하세요.”


“빈말을 잘도 하는구나. 나 죽을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거 모를까 봐.”


“가슴 열어 보여드려요?”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 들르고.”


“네. 알았어요.”




옆에 도우미가 있었지만, 할머니는 일으켜 달라며 재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는 가벼운 운동을 할 시간이다. 5분 전에 노인운동전문가가 2층 응접실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재란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 전에 슬리퍼를 신겨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간단한 움직임을 도와주는 사람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너무 아프게 겨드랑이를 받치고 어떤 사람은 힘이 없고, 또 어떤 사람은 냄새가 이상하고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안 맞아서 채용된 지 하루 만에 관두고 나가야 했다. 지금 있는 도우미는 12번째 사람이었다. 그나마 할머니가 기분이 좋은 날 어쩌다 타이밍이 좋아서 채용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지금보다 몸 상태가 나빠지면 훨씬 더 예민해지신다. 그러면 옆에 시중을 들 사람은 재란뿐이다.




할머니를 피트니스 룸으로 모셔다드리고 재란은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은 주로 회장 부부가 사용하는 공간이다. 집 한복판에 있는 패밀리룸은 10인용 식탁과 15인용 색 카우치 소파, 거실 테이블이 아메리칸 선룸형태로 꾸며져 있었다. 그곳은 한 달에 한 번 회장 식구들이 전부 모이는 가족 공간으로 재란은 일부러 피해 다녔다. 한 다리 건넌 조카는 가족에 포함되지 않는 게 현대 사회 아닌가.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재란은 가능하면 그들과 멀리 지내고 싶었다. 안희녀 여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당신이 죽기를 기다린다는 말. 의미는 다르지만 맞는 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재란은 다시는 이 집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불편한 미소는 짓고 싶지 않다. 어쨋거나 지금은 패말리룸보다 부엌 오른쪽에 있는 작은 응접실이 더 편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거나 사용인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오늘도 곧바로 1층 응접실로 가려는데 복도에서 외숙모인 문숙현 대표와 마주쳤다. 들어올 때 인사를 짧게 했는데 그때는 아직 몸단장 중이었고 이제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차 한잔하자.”


“네.”




새파랗게 보일 만큼 깨끗한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숙현은 화려한 귀걸이를 했다. 숙현의 취향이다. 그녀의 외모는 평범한 편인데 귀걸이 덕에 외모가 더 밋밋해 보였다. 오히려 장식을 없애야 단아함이 산다. 숙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는 단정하게 입었지만, 집에서는 자기 취향대로 마음껏 액세서리를 하곤 했다. 도우미 아줌마가 쿠키와 차를 내왔다




“우리 백화점 쿠키지? 참 이상해. 우리 백화점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것도 재료가 비슷한데 재란이 네가 만든 게 더 맛있게 느껴진다니까.”


“전 재료를 아끼지 않잖아요. 밖에서 파는 건 아무래도 이윤을 생각 안 할 수 없으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네 엄마도 요리를 잘했어. 나, 인사하러 처음 온 날 네 엄마가 구워준 마들렌이 아직도 기억나. 그걸 네가 꼭 닮았어. 사람 솜씨가 너무 좋으면 팔자가 세다고 하더니 참….”




재란은 말없이 웃었다. 김 회장네 가족들이 재란의 솜씨 타령을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신 엄마 취미가 베이킹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재란에게 빵과 디저트를 만드는 법을 익히게 했다. 할머니는 재란이 엄마가 했던 건 다 잘할 거라고 맹목적으로 믿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란은 음식을 다 잘했다. 빵뿐만이 아니라 삼삼하게 무쳐내는 나물이며 얼큰하게 끓여내는 매운탕까지 다 잘했다. 재란의 솜씨를 일찍부터 맛본 사람들은 나중에 할 거 없으면 레스토랑 하나 차리라는 말을 진담으로 던졌다. 그림으로 빠지지 않았다면 실제로 지금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숙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 톡톡 두드렸다. 할 말이, 아니 내릴 지시가 있는 눈치였다.




“ 곧 미술관에서 연락 갈 거야. 자리 마련해 둘 테니까 그리로 출근해. 네 할머니가 너, 제대로 된 자리에 시집 못 보낼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셔. 지금 상태는 거의 백수잖니? 이러면 다른 집에서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까 일단 이름은 걸어두자.”


“아. 네.”


“나야 네가 원하는 상대 만나서 결혼했으면 하지만 할머니 뜻이 저렇게 강경하시고 또 회장님도 너를 아무 데나 주고 싶어 하지 않으셔. 늘 아픈 손가락인 조카. 마음 놓을 수 있는 곳이 좋지.”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재란을 깎아내리는 말이었다. 이것이 숙현의 화법이었다. 어릴 때 숙현은 재란에게 적당히 친절했다.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조카에게 숙현은 그녀가 후원하는 보육원 원생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그런 미적지근한 친절을 베풀었다. 좋을 것도 나쁜 것도 없던 관계가 비틀어진 건 승호 때문이었다. 재란의 외사촌이자 숙현의 큰아들인 승호는 작년에 한 여자를 데리고 와 결혼을 선언하며 집안 어른들을 뒤집었다. 그 이유는 뻔했다. 그 여자가 평범한 과일 장수 집 딸이라는 점, 선호재단 장학생이라는 점, 그리고 미국에서 재란을 돌보라며 고용된 대학원생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선호 그룹을 이끌 장손자가 그런 여자와 결혼한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숙현은 기민하고 표독스럽게 둘을 떼 놓았다. 승호는 결국 자신의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승호는 본가에 들르지 않았고 제 엄마를 무시했다. 집안에서 연결해주는 다른 여자도 다 거부했다. 어이없게도 숙현의 원망은 재란에게로 날아왔다. 아니 그녀로서는 당연하다고 봐야 하나? 네가 아니었다면 둘은 만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이후 재란은 성운동에 올 때마다 좀 더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리고 다음 달에 작가 초대전이 있는데 리셉션도 겸할 거야. 케이터링과 장식은 네가 맡아서 해줬으면 해. 또 다음 주에 정계 부인 모임이 있거든. 이번엔 내가 준비할 차례인데 그것도 부탁할게. 장 비서가 퇴사하고 후임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직 뭘 제대로 못 해. 걱정이 많았는데 네가 들어와서 다행이야. 예전에 할머니 대신 네가 준비했던 연회가 아주 좋았잖아.”




사람이 없어서 재란에게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이건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매끈하게 웃고 있는 재란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외숙모는 눈살을 찡그렸다. 독한 아이다. 싫다 소리 한번 하면 외숙모도 자기 성깔 있는 대로 다 내뿜을 수 있는데 상대가 묵묵히 받기만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넥타이를 손에 든 경호가 내려왔다. 셔츠와 조끼를 대충 걸치고 아직 졸음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오빠.”




재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숙현의 잔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은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지금 일어나면 언제 아침 먹고 출근하니? 30분만 일찍 일어나면 넉넉할 텐데. 아침 운동하고 가면 더 좋고. 아줌마가 네 생일이라고 미역국 끓여 놨는데 먹고 가야지. ”


“미역국은 먹어야죠. 그것 때문에 일부러 들어 온 건데. 재란이 넌 할머니 호출? 근데 넌 이 아침에 봐도 말짱하다? 밤새웠어?”




밤을 새우긴 했지만,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 재란은 질문으로 대답을 피했다.




“오빠 생일이었나?”




경호는 실내화를 질질 끌며 걸어와 소파에 대충 몸을 던졌다. 셔츠 앞섶이 풀어 헤쳐지고 옷깃도 바지에서 빠져나와 있어 어딘지 모르게 유흥에 찌든 사람 같아 보였다. 그나마 세수는 한 모양인지 수염은 깨끗하게 깎여 있었다. 숙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방만한 둘째 아들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나흘 뒤. 내 생일 까먹었어? 섭섭한데? 생일날엔 파티해야지. 그래서 미리 미역국 먹으러 온 거야. 안 그래도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이재란. 너, 파티 하나 셋팅해라. 내 생일파티. 사람은 한 스무 명 정도?”




이 사람들이 오늘 나한테 왜 이래? 일을 자꾸 갖다 안긴다. 재란은 얼굴을 구기지 않으려고 눈을 깜빡거렸다. 아침 빈속인데도 쿠키를 집어 먹던 경호가 눈을 위로 올려 뜨고는 오만한 선장처럼 지시했다.




“나 스프링클이 잔뜩 뿌려진 레인보우 컬러의 크리미한 케이크가 먹고 싶어. 나 미국에서 그거 좋아했거든. 재란이 너는 만들 수 있지? 그거에 레몬펀치. 생각만 해도 군침 돈다. 아, 또 전에 네가 만들었던 사천식 치킨. 그것도 먹고 싶어. 음 또, 너 잘 만드는 거 있잖아.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데 과일이 잔뜩 들어가 있는 그 음료수. 그거도 해 줘.”




이 양반이 어디 맡겨 놨나? 재란이 전속 요리사인 줄 아는지 당당하게 요구하는 행동에는 주저함이 없다. 경호는 상체가 발달해 어깨가 넓고 흉통이 컸다. 처음 보면 운동선수가 아닐까 하는 몸이었다. 큰 만큼 잘 먹었다. 경호의 거대한 위장을 만족시키고 또 그의 친구들 몫까지 준비하려면 양이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재란은 숙현의 눈치를 봤다. 당연히 재란이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다. 거절할 핑계가 없다. 재란은 난감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경호는 신나게 손가락을 딱 소리 냈다. 다소 촐랑거리는 아들의 행동에 숙현이 경호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얘. 가서 밥이나 먹어.”




빈말로도 재란이 힘들다, 왜 그런 부탁을 하냐 하는 소리가 없다. 재란은 점점 더 크게 일렁이는 마음을 다독였다. 금방 지나간다. 이런 건 별일이 아니야. 재란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침 먹자.”




재란은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숙련과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따라나섰다. 그들이 식탁에 앉자 즉시 2인분의 아침이 차려졌다. 경호가 국 한 모금을 먹더니 캬,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엄지를 척 들었다.




“어. 속 풀린다. ”


“어제 술 마셨어?”


“응. 가볍게 시작했는데 마시다 보니 만취까지 갔지.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어.”




경호가 어떻게 노는지 대충 알 것 같아서 재란은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만 안 계시면……. 뒷말은 삼키고 식탁 위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재란은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다가 경호 식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경호는 재란이 먹는지 안 먹는지 관심을 두지 않고 국을 쭉 들이켜고 식탁에 탁 놓았다.




“참. 생일에 영교도 초대했어.”




재란이 눈이 번뜩 뜨였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영교는 내 친구인데 오빠가 왜 초대를 해?”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언젠데 네 친구 내 친구 따지고 그래? 그리고 사업상으로도 좋은 자리야. 처음엔 망설이길래 너도 온다고 했더니 그제야 오겠다더라.”




너무 뻔뻔하고 태연한 대답이었다. 재란은 짜증이 나 눈을 질끈 감았다. 경호는 형인 승호와는 달랐다. 설렁설렁, 세상에 어려운 거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굴면서 사람 감정을 빠르게 알아채는 능력으로 놀려먹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그걸 잘 이용했다. 사냥꾼처럼 원하는 게 있으면 덫을 놓는다. 그리고 덫에 걸린 사람을 보며 성공했다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그렇다. 숙현앞에서 재란을 낚고 재란으로 영교를 낚았다.




“영교에게 좋은 일이 아니야.”


“그걸 왜 네가 판단해? 그리고 너나 신경 써. 연예인 나부랭이하고 결혼한다면 할머니가 가만 놔둘 거 같아? 박세현, 그 자식은 당장 연예계 활동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뭐 전부 다 막지는 못하겠지만 타격 주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할머니가 너랑 박세현이 아무 관계도 없다고 믿어서 놔두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할머니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구니까 그냥 있는 거야. 뜯어말리면 사고 칠까 봐. 그에 비하면 나는 너보다 훨씬 나아. 내가 더 가능성이 클걸.”




맞는 말을 참 밉게 하는 재주를 가지셨군요. 김경호 씨. 재란은 깐죽거리는 사촌오빠를 노려보았다. 어디로 봐도 영교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저딴 남자에게 영교를 주느니 영교와 함께 불교에 귀의하고 말겠다. 재란은 저런 불통과 말을 섞는 거보다 좀 더 말이 통하는 상대와 대화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영교에게도 제대로 주의를 시켜야 할 것 같다. 재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미운 사람에게 어깃장 놓는 마음으로 쌀쌀맞게 말했다.




“생일 케이크 만들려면 제대로 된 베이킹 도구들이 필요해. 넓고 좋은 데로 케이크 만들 장소를 구해줘. 전문가용 오븐과 도구들이 있어야 해. 그렇다고 일 크게 벌리지 마. 남의 사업장 강제로 빌리지 말란 말이야. 장소 대여 안 되면 안 만들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냐?”




경호는 자신만만했다. 하….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걱정이다.




××







다음날 숙현은 손수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잡음이 안 나게 파티를 준비하라’라는 주문을 넣었다. 본인 아들 앞에서는 체면 세워주느라 하지 못한 말을 뒤로 몰래 전하는, 자기들 식으로 말하면 세련된 조언이었다. 그러나 재란이 보기에 이건 개망나니 아들을 길러내는 지름길이었다. 혼내야 할 일을 혼내지 않고 금해야 할 일을 금하지 않으니 경호 같은 아들이 나오는 거다. 잠시 후에 경호 번호로 메시지가 날라왔다. 재란이 요구한 널찍하고 전문적인 베이킹 장소가 준비된 모양이었다. 경호가 보내준 주소는 그녀의 눈에 익은 곳이었다. 현평동 아르디움 빌리지 4동 201호. 참 얄궂다. 현평동 아르디움 빌리지라면 세현이 사는 데다. 세부 주소까지는 모르지만, 세현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재와 나란히 이웃한 집으로 일부러 골랐다며, 자기들 둘이 성공했다고 부둥켜안고 좋아했던 날이 기억났다. 그런데 경호가 알고 일부러 여기를 빌린 걸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찜찜했다. 때마침 경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잘 됐다고 생각하며 통화버튼을 누르자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서대리라고 밝혔다.




“오빠는요?”


“지금 통화하기 힘드십니다. 혹시 생일파티 준비 건이라면 저하고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보내드린 주소로 가시면 베이킹 하실 수 있으시고요, 입구 통과하실 수 있게 해 두시겠다고 하십니다. 현관 비밀번호는 따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재료 준비나 다른 음식 준비는 저에게 시키시면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케이터링 업체 두세 곳 정도 추려서 보낼 테니 한번 보시고 아시는 곳 있으시면 따로 말씀해주십시오.”


“파티가 열리는 그곳은 어디예요?”


“강남 투르크라고 하는 호텔 마스터스 룸입니다. 호텔 측에서 파티할 수 있게 가구를 빼 준다고 합니다. 사전에 한 번 들러보시겠습니까?”


“네. 초대손님 명단은 나왔어요?”


“네. 그것도 보내드리겠습니다.”




승호는 소탈하고 겸손한 성격이라면 경호는 당당하고 드러내는 쪽이다. 승호가 신사에 어울린다면 경호는 사나이가 더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본인의 생일파티를 국경일인 줄 안다. 서대리가 보내준 사진을 보니 방은 회의장으로 써도 될 만큼 컸다. 재란은 초대손님 목록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가 열 다섯 명정도 여자가 다섯. 여자 중에는 영교와 가명 같은 이름들이 보였다. 주혜서, 은비설. 감이 딱 왔다. 이 여자들은 연예인 지망생이거나 연예인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혹시 아이오 엔터의 소속 연예인들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경호가 재란을 미끼 삼아 아이오 엔터 연습생들에게 접근해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삼촌인 태광은 사건을 덮느라 애를 썼고 경호는 그때도 뻔뻔하게 나왔다. 재란은 다시 경호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아직도 회의 중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연예인이든 연예인 지망생이든 그쪽 관련 여자가 한 사람이라도 파티에 온다면 내가 쪽팔리는 게 뭔지 알게 해준다고 전해줘요!”




그 사건에서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경호도 웃기고 이럴 줄 알고 미리 단속한 숙현도 웃기다. 쓸데없는 잡음. 그게 이걸 말하는 거였다. 재란의 경고가 먹힌 건지 서대리가 다시 초대손님 목록을 작성해 보내왔다. 다섯 명이었던 여자 손님이 셋으로 줄고 대신 남자가 더 늘었다. 목록에 보이는 친숙한 이름. 박세현. 한이재. 미쳤나! 이 오빠가! 재란의 입에서 고성이 터졌다.




“오빠한테 당장 전화하라고 해요!”




무려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 경호가 능글맞게 웃으며 전화를 걸어왔다.




“여자 부르지 말래서 뺐잖아. 말 잘 들었는데 왜 화내?”


“왜 오빠 생일을 내 친구들로 채우는 건데?”


“네가 유명한 친구를 뒀잖아. 명색이 김경호 생일파티에 연예인 한 명 없는 게 말이 돼? 초대하면 좋아할 건데 네가 나서서 미리 차단하지 마. 내 생일파티인데 내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 초대하는 거지. 너, 지금 월권이야.”


“그럼 나 안 해.”


“안 한다고 성운동에 직접 이야기해. 왜 안 하는지도 말하고. 할머니나 어머니가 퍽 동조하시겠다.”




지긋지긋한 성운동. 치사한 김경호. 차라리 남이 더 친절하고 다정하다. 이들은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얽어매고 구속한다. 그뿐인가. 필요 없는 건 갖다 안기고 정작 필요한 건 뺏어간다. 차라리 재란에게 관심을 끊어줬으면 좋겠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말들을 하나 꺼내지 못하고 재란이 가만히 있자 경호가 일곱 살짜리 여자애를 달래는 말투로 말했다.




“뺄까? 네가 정 그렇다면 빼 줄게. 대신 나한테 하나 빚진 거다.”


“...비열해.”


“무슨 소리. 난 꽤 좋은 사람이라고. 넌 날 오해하고 있는 게 많아.”




경호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믿느니 지구가 네모나다는 걸 믿겠어! 재란은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경호가 그 빚을 무엇으로 받아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재란의 뒤통수를 칠 거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재란은 케이터링 업체를 둘러보고 마침내 한군데 정한 뒤 경호의 스타일대로 장식을 정했다. 화려하면서도 대담한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뒤로도 바빴다. 미술관에 정식출근전에 인사를 하러 갔고 숙현이 주문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회사 비서실 사람들과 잠깐 미팅도 해야 했다. 세현이 바쁜 이유를 물었지만 미술관에 자리가 생겨서 그렇다고 얼버무렸고 영교에게는 경호의 과거사에 대해 낱낱이 고발해서 방어막을 쳐줬다. 세현이 솔직하지 않은 자신에게 불만이라는 걸 알지만 말해본들 할 수 있는 게 없다. 각자에겐 각자의 몫이 있다. 이번 생에서 재란의 위치는 ‘가지는 사람’이 아니고 ‘내어주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운명지어졌다.




경호의 생일 전날, 재란은 장을 잔뜩 봐서 아르디움 빌리지로 향했다. 다른 건 준비가 다 끝났고 케이크만 남았다. 서대라는 자신이 장을 봐주겠다고 했지만, 남자에 요리에 경험이라고는 없는 이십 대 남자에게 말해봐야 더 힘들 것 같아 그냥 재란이 갔다. 그에게는 케이크를 픽업할 만큼 큰 차를 가져오라고 말해뒀다. 2단으로 된 케이크는 그냥 승용차에 실을 수가 없으므로 밴이 필요했다.


장 봐 온 비닐봉지를 들고 아르디움 빌리지 앞에 선 시간은 오후 3시였다. 부지런히 서둘렀더니 말한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목덜미에 땀이 느껴져 재란은 긴 머리카락을 묶었다. 청바지에 반소매 티셔츠, 흰 운동화를 신은 재란은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이었다. 케이크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이 편이 청결하기도 하고.


택시를 타고 오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을 보았다. 아르디움 빌리지와 외부를 구분짓는 유명한 담이었다. 자연석과 인공물을 섞어 쌓은 담으로 높이는 3미터가 넘고 담 위쪽으로 왕관 모양의 철제 울타리가 무게감을 더해줬다. 우스개 소리로 아르디움 빌리지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데가 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담 옆에는 거대한 자동문이 한 치의 빈틈 없이 맞물려 있었다. 입주자들은 여기에 일단 차를 세우고 본인확인을 거친 후 들어간다. 문 옆에는 관저에서 흔히 보이는 경비실이 서 있다. 3평 남짓한 공간에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다가 재란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키가 작다. 그중 키가 큰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 재란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깍듯하면서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방문자 등록되셨습니까?”


“네.”




괜히 위압감이 느껴진다. 경비원은 패드를 들고 와 재란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물었다. 대답해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에 가려져 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외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빨리 자라는 메타세쿼이아와 개나리 같은 속성수가 심겨 있었다. 이곳에 입성하는 게 성공의 척도라고 했던가? 인제 보니 재란의 생각보다 세현은 훨씬 더 성공한 엔터테이너였다. 재란은 그 성공을 뿌듯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킥킥거렸다. 역시 내 가수. 역시 내 친구. 세현은 모를 거다. 뉴욕에 있는 재란의 미술 스튜디오 창고 방에 세현과 관련된 앨범, 인형, 사진 등등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는 걸. 세현이 이 집을 사는 데 화장실 하나 정도는 재란이 보탰다고 자부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짐 들어 드릴까요?”


“아니 저 혼자….”


“차도 없으신데. 안이 넓어서 짐까지 들고 힘드실 겁니다. 제가 차로 모셔다드릴게요.”




일단 신분이 확인되니 경비원은 훨씬 더 친절해졌다. 재란은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를 경비원에게 건넸다. 키가 작은 경비원이 얼른 정문 옆 작은 철문을 열어주었다. 삐걱하는 소리가 나는 거로 봐선 자주 열리는 문이 아닌 듯했다. 문을 넘자 살짝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재란은 짐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









프리랜서에게 시간 활용은 성공의 포인트다. 세현은 별일이 없으면 오전 운동을 마치고 회사로 출근해서 작업실로 직행한다. 식사는 프로듀서나 엔지니어와 함께하고 가끔 매니저 일을 보는 직원들과도 함께 한다. 이재도 주로 회사에서 만난다. 둘이 저녁에 회사 내 피트니트 센터에서 만나서 운동하는 건 암묵적인 약속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지내는 날이 너무 길어진다. 그러나 재란이 한국에 들어온 것을 안 다음부터 세현은 마음이 부산스러워져서 좀처럼 작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운전해서 가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마음이 힘들면 몸을 더 힘들게 하라는 피트니트 센터의 관장 형님의 말씀에 따라 오늘은 아침 운동을 더 오래 열심히 했다. 그리고는 완전히 지쳐서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비몽사몽간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일어나니 오후 3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다. 무심결에 핸드폰을 들었지만 벨소리는 계속 울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야? 세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벽에 걸린 인터폰에서 불빛이 깜빡거렸다.




“네.”


“입구 경비실입니다. 이재란님께서 정문을 통과하셨다는 걸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누구요?”




잠이 덜 깨서 잘못 들었나 했다. 아직 꿈인가? 운동을 너무 해서 기가 허해졌나? 세현이 아무 말도 안 하고 타당한 이유를 생각해내느라 머리를 돌리고 있을 때. 그의 반응에 불안해진 경비원이 친절하게 추가 설명에 들어갔다.




“입주자님께서 상시방문객 명단에 이재란님 이름을 등록해두셔서 문을 열어드렸습니다.”




그건 기억났다. 여기로 이사 올 때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곳이라 상시방문객을 등록해놓아야 가족들이 드나들기에 편하다길래 부모님과 영교 이름을 넣어두었다. 그러고도 칸이 남아서 고민하다 재란의 이름을 적었다. 언젠가는 재란이 이 집에 놀러 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세현이 아는 재란이라면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세현은 다시 물었다.




“진짜 이재란이에요?”




진짜 이재란인지 아닌지 경비원이 어떻게 알까? 질문해놓고도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재란일 리가 없었다. 이건 그와 재란의 관계를 아는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질문을 바꿨다.




“자기가 이재란이라고 그래요? 어떻게 생긴 사람인데요?”




경비원은 곤란한지 음, 하고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름과 전화번호는 동일했습니다. 혹시 불안하시다면 지금 최 경비가 함께 이동중이니까 전화해서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그것보다는 그냥 재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세현은 알아서 하겠다며 인터폰을 끊고 바로 재란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한참 가는데 응답이 없다. 바로 어제 재란과 짧게 통화를 했다. 집으로 보러 갈까? 했더니 재란은 바쁘다고 했다. 또 선보러 가? 하고 묻자 흐흥 하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하며 웃었다. 세현을 놀리는 웃음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도 그냥 웃고 말았다.




“조만간 미술관으로 출근하게 될 거야. 부르는 데가 많네. 한국만 오면 이렇다니까.”




일을 시작한다니 오히려 반가웠다. 선보러 다니는 것보다 일하는 게 좋다. 지금도 일하느라 바쁠 텐데 이 동네에 나타났을 리가 없다. 역시 누군가의 장난인가? 기자? 세현은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입구 비번을 모르면 들어 오지 못한다. 누가 되었든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 재란이 또 도망 갈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뻗치자 겁이 났다. 증권가 찌라시를 인지하자마자 얼마나 재빠르게 미국으로 가버렸던가. 그리고는 무려 6개월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재란은 그럴 수 있는 여자였다.




“재란이가 도망가야 넌 제대로 일하겠다.”




영교의 냉철한 평가였다. 가끔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놈 같긴 했다. 재란이 옆에 있으면 온종일 재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지내고 싶었다. 두 팔에 품고 그 존재를 느끼고 싶었다. 세현의 어디에 그런 욕심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이 있을 땐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영교는 집착이라고 학을 뗐고 이재는 신기한 눈으로 지켜봤다. 재란만이 온전히 그를 그대로 받았다. 그리고 가끔 도망갔다. 이건 망망대해에서 갈증으로 목말라 죽는 것과 다름없다.




세현은 베란다 통창으로 가 커튼을 젖혔다. 오후의 햇살이 눈이 부셨다. 아래를 내려보니 마침 경비 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까 경비원이 말하길 최 경비가 함께 이동 중이라고 했으니, 자신을 이재란이라고 밝힌 사람이 저기에 타고 있는 걸까? 세현의 시선이 무심결에 차를 따라갔다. 차는 4동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 세현은 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연락해줘. 보고 싶어.






×××







최 경비를 보내고 재란은 신중하게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는 숫자 네 자리로 0000이었다. 비밀번호에는 집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정말 빈집인 모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바닥 카펫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집은 현관에 검은색 카펫이 그리고 입구부터는 진한 갈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인테리어 포인트로 소파 아래나 테이블 아래 까는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집안 전체에 카펫을 까는 일은 흔치 않다. 재란은 이 집 주인은 소리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소도 관리도 힘든 카펫을 깔 리가 없다. 재란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의 집 신발장을 막 뒤지기도 그렇다.


뭐, 어차피 일하러 왔으니 맨발이 더 편하다. 재란은 뒤로 끌리는 청바지 밑단을 접어 올렸다. 자 바쁘다 바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 길이만 봐도 이 집이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닫힌 방문을 세 개 지나니 확 트인 거실이 보였다.




복도에서 두 계단 내려가 넓으면서도 안락한 기분이 들게끔 꾸며져 있었다. 티브이나 오디오가 없는 공간이었다. 정적이 어울리는 공간. 특이한 점은 역시나 바닥은 다 카펫이고 대형 소파 정 중앙에 수족관 같은 직사각형 유리관이 놓여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아마 사람이 살던 때에는 여기에 물고기를 키웠음이 틀림없었다. 여러모로 진공상태 같은 집이다. 재란은 회색 커튼과 아이보리 색 벽지, 그리고 벽에 걸린 짙은 검은 색 유화 그림을 물끄러미 보며 판단했다. 이 집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하기 힘든 사람이 분명하다고. 경호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니 놀랍다. 재란은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단 짐을 든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았다. 재란은 얼른 부엌으로 향했다.




우와.




재란이 환호성을 질렀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분위기는 상반되었다. 부엌도 꽤 넓었다. 사랑스러운 흰색 원목 싱크대와 도기로 된 개수대. 격자무늬 창문과 붉은 체리 무늬가 귀여운 커튼까지. 완전히 소녀 감성의 부엌이었다. 한쪽 벽에는 전문가용 오븐과 반짝반짝 빛나는 베이킹 재료가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어 여기에 체크무늬 앞치마를 메고 빵 굽는 모습을 찍으면 유럽 감성이 물씬 나는 사진이 완성될 것이다. 재란은 부엌이 마음에 들었다. 거실과 부엌의 온도 차가 심해서 도저히 한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재란은 신이 나서 여기저기 열어보며 감상했다. 이렇게 잘 꾸며진 코지한 키친. 언젠가 재란이 상상해왔던 공간이다. 재란은 사진을 찍어 세현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진동음이 울리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텔레파시인가? 꺅!”




갑자기 뭔가가 재란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햇빛을 등지고 커다란 검은 형체가 서 있었다. 재란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있었다. 재란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앞에 선 상대를 바라봤다. 그늘진 상대의 하얀 눈자위가 반짝하고 빛을 발했다. 상대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재란에게 고정되었다. 재란은 일단 상대가 사람이라는 것에 안심했고 다음으로 이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아마 이 사람은 이 집의 주인일 것이다. 경호와 비슷한 정도로 체격이 큰 남자였다. 슈트를 빈틈없이 차려입고 떡하니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이 집 주인이었다.




-빈집이라며!




재란은 속으로 경호를 있는 대로 욕을 하며 재빨리 얼굴을 수습했다.




“아. 죄송합니다. 집이 비어있는 줄 알았어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못 해서. 갑자기 소리쳐서 놀라셨죠?”


“어떻게 들어왔지?”




남자가 한걸음 옆으로 서자 얼굴이 좀 더 또렷이 보였다.




“그거야 당연히 등록되었으니까….”


“나는 아직 등록 안 했는데. 내가 안 했는데 어떻게 들어왔지?”




남자의 말투는 오만하고 차가웠다. 피부가 흰 편이고 턱에 검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까만 동공이 재란을 응시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는 게 미술품 감정 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보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재란은 이런 점에서 경호 친구답다고 생각했다. 근묵자흑. 끼리끼리 이런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 정해진 절차를 따랐어요.”




내 쪽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궁금하면 본인이 직접 알아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들고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핸드폰을 쥔 채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경호를 아주 좋아해서 손수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나선 그 사촌?”


“... 네.”




어이가 없다. 도대체 이 오빠의 머릿속에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제대로 들어있기나 한 건지 궁금했다. 재란은 부글거리는 속마음을 감추고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으나 남자는 핸드폰을 돌려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왔네. 5시 아니었나?”


“전 완전히 빈 집인 줄 알고. 그 정도는 제 마음대로 해도 될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일단은 핸드폰을 돌려달라구요. 재란은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상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이건 불공평하다. 자기소개는 기본 예의 아닌가? 그러나 상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할 마음도 없는 모양이다.




“핸드폰 돌려주시면 나갔다가 5시에 다시 올게요.”


“그럴 필요 없어. 있어도 돼.”




남자는 슈트 안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재란은 얌전히 서서 그의 등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는 “난데. 경비실에 확인해봐.” 이 두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꽤 고압적인 자세였다. 전화는 바로 다시 걸려왔다. 상대가 뭐라고 설명하는지 통화가 길어지자 재란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일이 어떻게 된 거든 약속 시각보다 일찍 온 건 자신이니 사라져 줄 생각이었다.




“알았어. 이해했어.”




남자는 끊는다는 말도 없이 전화를 종료하고 돌아섰다.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았다면 설명이나 해줄 것이지 그럴 마음은 전혀 없는지 다시 재란을 뚫어지라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리 남자의 시선에 익숙하다고 해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보면 불편하다. 재란은 짐을 들고 반듯하게 섰다. 저 남자, 지금 굉장히 무례한데 자신이 그렇다는 걸 인지도 못할 만큼 대단한 사람인 건 알겠다. 그렇다고 인간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아예 없는 건가?




“핸드폰 돌려주시면 나갔다가….”


“있으라니까.”




재란은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그럼 제 핸드폰을 돌려주세요. 제가 누군지 아는 거 같은데.”


“경호한테 이런 사촌 동생이 있다는 건 몰랐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영교라면 이렇게 말했겠지만, 재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재란을 제외한 사촌들끼리는 이럭저럭 교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재벌가 자제들끼리의 모임, 뭐 그런 거에서 만나고 같이 해외로 여행 다니고 그런다고 들었다. 재란은 할머니가 막았기에 그 세상에서는 떨어져 지냈다. 그리고 재란 스스로도 그런 자리에 나가서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몰랐을 리가. 내가 누군지 알잖아요.”




재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남자는 재란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남자의 큰 손에 투명 케이스를 끼운 재란의 핸드폰이 터무니없이 작아 보였다. 재란은 손끝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핸드폰을 가져왔다. 재란의 행동을 보더니, 남자가 피식 웃었다.




“사촌 여동생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전부 다 한 건 아니군.”


“네?”


“이렇게 예쁘다고는 말 안 했는데.”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재란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대화가 길어져 봐야 기분만 더 나빠질 것이다. 일단 있으라고 했으니 예정대로 케이크만 만들면 된다. 이 집 주인장은 빨리 나가기나 했으면 좋겠다.


재란이 장 봐 온 것들을 상판에 늘어놓고 도구를 챙기려 뒤로 도는데 갑자기 벽이 생겨 있었다. 부딪칠뻔하자 재란은 놀라서 뒤로 몸을 젖히고 싱크대 상판을 붙잡고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또 그 남자였다. 재란의 뒤에 바싹 붙어 서서 뭘 사 왔는지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이 남자 뭐지? 더는 참지 못하고 재란은 불쾌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저기요.”




재란은 허리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남자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썼다. 마음 같아서는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경호가 떠올라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걸 드디어 알았는지 남자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실례. 경호 동생이라니 반가워서.”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거짓말을 잘도 한다. 재란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핸드폰을 찾아 더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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