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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Jan 17. 2017

산티아고 길 위에서(9)

그 아홉 번째 이야기,  '해동검도 유단자의 춤'






나는 이전 글에도 썼지만 사모스(Samos)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려 이틀을 머물렀다. 이전 글에서 사모스의 평화로움에 대해 썼다면 오늘은 사모스의 첫날 저녁시간의 추억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사모스에는 수도원 말고도 사설 알베르게가 두 곳이 있다. 난 그 두 알베르게에서 각각 하루 씩 머물렀는데 모든 것이 완벽했던 두 번째 알베르게를 만나기 전 사실 난 한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도원에서 조금 비켜나 떨어진 곳에 있는(그래 봤자 5분도 안 되는 거리다) 이 알베르게는 내가 처음 도착한 날 아무 정보 없이 들어간 곳이었는데 청결한 내부시설과 주인아주머니의 따뜻한 환대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꽤 크고 깔끔한 부엌에는 식기들도 잘 구비가 되어 있었고 방의 침구도 괜찮아 보였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혹시 몰라 아주머니에게 난방이 잘 되는지 미리 확인을 했고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는 걱정 말라며 나에게 큰 신뢰감을 주셨다. 그러나 아주머니가 떠나면서(아주머니의 집은 따로 있고 저녁이 되면 미련 없이 퇴근을 하신다) 난방도 같이 떠나리라는 것?을 나는 예상치 못했고, 혹독하게 추운 밤이 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첫날 머문 알베르게, 다 좋았으나 단지 추웠다.





그날 저녁, 주인아주머니가 떠난 이 호젓한 알베르게에는 이탈리아 남자 1, 스위스 여자 1, 스페인 남자 1, 한국인 남자 1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엠티 분위기를 내며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탈리아 남자, 한국인 남자, 나 이렇게 3인은 일찌감치 근처 슈퍼에 장을 보러 갔었는데.. 이탈리아 남자가 '자진하여' 우리의 저녁을 책임지겠노라 했고 메뉴는 이탈리아 정통 파스타라고 발표했다. 그는 파스타가 거기서 거기지 하며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우리를 제압하며 뭔가 자기네 고장? 의 특별함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인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계란을 한 판 샀다. 나는 와인과 같이 먹을 주전부리를 몇 개 더 추가했다.





우리가 있던 사모스는 산속에 요렇게 포근히 숨겨진 마을이다.




해가 지고 수도원의 종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모여 있던 우리는 슬슬 저녁 먹을 준비를 해야겠다고 느꼈는지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났다. 파스타를 하겠다던 남자만 무슨 영문인지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넌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양심상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괜히 찬장에 그릇을 꺼내서 한 번씩 씻고 닦았다. 스위스 여자와 스페인 남자는 채식주의자들인지 온통 풀과 과일로만 이루어진...(이게 설마 저녁이야 하는) 식사를 한 접시씩 차려내고 있었다. 이들의 식사를 보며 이따가 이탈리아 남자가 파스타를 좀 넉넉하게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스페인 남자와 스위스 여자의 첫인상은 굉장히 내성적인 타입의 사람들로 보였는데 오히려 내가 어색해서 무슨 말이라도 걸면 단답형으로 말하고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나저나 오늘의 셰프인 이탈리아 남자는 7시가 훌쩍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파스타를 만들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았고 참다못한 한국인 남자가 계란을 사정없이 깨더니 지단을 부쳐왔다. 우리는 와인과 계란 지단, 땅콩 주전부리를 놓고 배고픔을 달랬고 이탈리아 남자는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은 한참 멀었다는 듯 딴청을 피우더니 부쳐온 지단을 더 많이 먹었다.




밥 먹을 시간을 넘겨 음식을 기다릴 때만큼 설레는 순간이 있을까. 길에서는 에너지를 많이 쓰기 때문인지 먹는 것에 대한 본능이 과도하게 살아난다. @코엘료 후원 알베




스페인 남자는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수줍어 보였다. 스페인 사람 같지 않게 말수도 많이 없고 눈이 마주칠 때만 환하게 웃었다. 옆에 사모스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하다 온 건 아닌가 싶을 만큼 내면의 평화가 가득 찬 그런 눈빛이었다. 그렇게 수도승처럼 한동안 풀만 먹던 그가 한층 더 수줍은 얼굴로 자신은 한국에 살았었다고 말했다. 보통 상대가 한국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나오는 이야기들인데.. 그는 만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가 본 것도 아니고 '살았노라고' 말이다. 정말이냐며 놀라는 우리에게 그는 '해동검도'를 했다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그는 또박또박 한 글자씩 끊어 해. 동. 검. 도. 를 했노라 말했다. 한국에 살았던 것도 그 이유라고 했다. 자신의 마스터가 누구라고 분명한 한국 발음으로 말해주었다. 파리도 못 내리칠 것만 같은 수줍음을 가진 그가 운동 때문에 한국에 몇 년씩 살았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역시 사람은 처음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의 입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해동검도라는 말이 약간은 익숙해질 무렵 자신은 춤과 음악을 사랑한다고 열정을 담아 말했다. (당시 난 스페인 남자의 말을 경청하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이탈리아 남자가 대체 파스타를 언제 만들 작정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내가 뭘 만들겠다고 나서면 메인쉐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한국인 남자와 나는 지단을 더 부치지도 못하고 슬프게 앉아 있었다.) 스페인 남자는 샐러드로 배를 채워서인지 적극적으로 이런저런 음악을 선곡했다. 식탁 뒤 공간을 확보하는가 싶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응? 춤추자고 여기서? 나는 때려죽여도 못 나간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고, 옆에 있던 스위스 여자도 못 춘다고 했으나 해동검도를 했다던 남자의 결연한 의지에 마지못해 무대로? 나갔다.


 

수도원 옆 고요한 한 알베르게 주방에서는 그렇게 난데없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예상치 못한 퍼포먼스... 사실 기대감보다는 불안했다. 충동적으로 나갔지만 금세 부끄러워져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런데 음악이 흐르고 춤이 시작되자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좀 전까지 알던 그 남자는 어디 가고 새로운 사람이 온 것 같았다. 그들은 살사를 추고 있었는데 낯선 그의 모습에 관람자들마저 이건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여자는 못 춘다더니 정말 못 추는지 춤 선생의 리드대로 거의 끌려다니다시피 했고, 춤 선생은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여자는 얼추 살사 같은 춤을 추고 있었고 유능한 우리의 춤 선생은 수줍음은 어딜 가고 화려한 안무로 보는 이를 경악케 했다. 와인을 각 일 병씩 한 한국인 남자와 이탈리아 남자도 가만히 있는데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스페인 춤선생은 혼자 술이란 술은 다 마신 듯  화려한 스텝을 밟으며 온 주방을 쓸고 다녔다.


둘은 꽤 오랫동안 춤을 추었는데 마치 이 공간에 둘만 있는 듯 보였다. 아마 우리의 존재를 잊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국인 남자는 저들을 위해 우리가 여기에 없었어야 했다고 수 차례 자책했고, 이탈리아 남자는 요리할 생각은 안 하고 와인만 한 병을 더 들이켰다. 우리는 춤 선생의 혼을 담은 퍼포먼스를 다 감상한 후 거의 10시가 다 되어 파스타라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고향의 맛을 담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맛은 있었다. 스페인 남자는 에너지를 다 소진했는지 파스타를 여러 차례 덜어 먹었고 다시 수줍은 모습으로 돌아와 해동검도를 하던 그 시절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우리는 혹독하게 추운 밤을 맞이했다.



춤판이 벌어지던 사모스 알베르게 주방


 






나는 어떤 사람의 이중성을 이야기하려고 이 일화를 꺼낸 건 아니다. 누구나 이런저런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이 스페인 친구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면면이 조금 더 대조되어 보였을 뿐이다. 

어떤 집단에 있느냐,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의 내가 될 수 있다. 어떤 이에게 나는 활달하고 털털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까칠하고 예민하고 감정적인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타인이 그리고 내가 좀 더 좋아하는 내 모습이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도 저도 다 내 모습인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참 수줍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지금의 나를 아는 누군가는 우끼네 라며 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는 학교에 가면 엉덩이에 본드라도 바른 양 내 책상에 줄곧 얌전히 앉았다가 집에 가라 하면 조용히 오는 그런 학생이었다. 누군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결단코 말을 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 대한 평가로.. 내성적이며 차분하다. 책상 정리를 잘한다.. 이런 것들을 주로 적어 주셨던 것 같다. 6학년 때인가.. 한 번은 엄마가 학교에 오셨는데 내 짝이 엄마한테 가서는 아줌마, 현이가 저를 막 때려요 라고 했단다. 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우리 딸이 적극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며 속으로 무척 기뻤다고 했다. 그만큼 내성적인 내가 걱정인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릴 때는 왜 그랬대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때 초등학교 동창은 지금의 나를 보고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냐고 놀랄 수도 있을 거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나 성격도 조금씩 변한다. 사회에 적응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을 자신에게 덧입히기도 한다. 뭔가 주변으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은 내 모습은 더욱 키워지고 강화되는 반면 그렇지 못한 부분은 저 뒤로 감춰 놓기도 한다. 저 뒤에 있는 그것이 결코 나쁜 모습이 아님에도 말이다.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평소와 다른 나의 모습, 한동안 저 구석에 감춰 놓았던 모습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사회적 기대나 '나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부응해야겠다는 심리적 기제가 약해지는 틈을 타고 솔직한 모습들을 보기도 한다. 


어떤 것이 더 솔직한 나일지 모르겠지만 이전보다는 행복한 나의 모습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남의 기대와 시선에서 자유로울수록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수록 인생이 더 편해진다. 나의 의식과 무의식이 막 들이박고 싸우는 일이 덜하다. 어차피 남이 내 인생을 살아줄 것도 아니다. 타인의 인정도 잠깐의 달콤함일 뿐 자신이 없는 껍데기 인생은 결코 지속적인 만족을 줄 수가 없다. 

 





이래야만 한다는 스스로의 기준이 높았던 내가 좀 내려놓게 된 데에는 어쩌면 엄마의 죽음이라는 큰 계기가 있었다. 운이 좋아서 어릴 때부터 환경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이 바라는 시선대로 자꾸만 나를 맞춰 가려고 노력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떠나듯 나도 그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하루를 살더라도 ‘조금 더 나다운 나’에 접근하며 살 용기가 생긴다. 느려도 그렇게 살겠다는 맘을 먹게 한다.




오늘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한 어른의 꿈..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대도. 꿈이 무엇인지조차 잊었다면 하루에 아주 조금의 시간이라도 그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에 나를 놓아주자. 유난스럽게 쓸모를 계산하지 말고, 남 눈치 보지 말고.



적어도 이 스페인 남자에게는 춤을 추고 있는 그 시간이 참 행복해 보였다.



나 아닌 것으로 사랑받기보다는 온전히 나로서 미움받기를 원한다.

- 커트 코베인(Kurt Donald Cobain, 1967-1994)   




https://youtu.be/0M79rTbfauo

'Les jours tranquilles'(조용한 나날들), 김규식 첼로 연주 ver.



* 예전에 누군가 김규식 첼리스트가 속한 무누스 앙상블 공연 표를 줘서 간 적이 있다. 마음이 되게 울적한 날이었는데 첼로가 많은 위안이 되었다. 이전에 만들어 놓은 리스트에서 이 곡이 다시 플레이되는데 문득 그때 생각이 스친다.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되는 음악이 될까 하여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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