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편견에 기초한 갈등은 언제나 거대한 것, 군중을 찾는다. 이런 편견은 초신성처럼 외부로 뻗어 나가려고 하고, 갈등과 관계없는 불특정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한다. 혐오 없는 삶, 바스티안 베르브너
우리는 개인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공감'이 주는 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당신의 범위는 어느 정도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디에 살든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수많은 정보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양한 집단을, 그 속의 사람들을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화, 세계화의 진행에도 일종의 버블 필터(집단 간의 경계)가 더욱 견고해진다면 왜 일까. 다른 버블에 담겨 있는 사람을 더욱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찌 된 것이 혐오의 문제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극단적 우익화를 부추기는 건 왜 일까. 그건 공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미디어에 의해 생산되는 정보로 보는 세상은 그 '필터'에 의해 종종 왜곡이 일어나기도, 필시 일정 방향의 '흐름'이라는 걸 만들어 낸다. 그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다른 집단 안에 개인을 얼마나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집단이 만들어 낸 정체성으로 그 사람을 얼마나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지난해 햇살이 좋던 날 제주 포도 뮤지엄에서 하는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흥미롭게 봤다. 집단 내 과잉 공감이 자칫 생산해낼 수 있는 무서운 결과들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전시다. 과잉 공감은 때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이해'가 들어설 자리를 막는다. 그렇게 볼 수 있는 힘을 잃게 한다.
너 그 얘기 들었어?
소문의 벽 전시에서는 하나하나의 구멍을 통해 가벼운 뒷담화로 시작한 이야기가 객관적인 사실로 점점 부풀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투사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불안감을 이런 집단 내의 '공감'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녹여 버리기도 한다. 공감을 할 수 없는 색깔이 다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는 때론 우아하게 때론 잔인하게 집단의 색을 조정하길 스스로 요구한다. 나치가 자행한 만행도 어찌 보면 이러한 지점에서 시작해서 집단의 광기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닐지.
이런 비뚤어진 집단 내 과잉 공감은 집단 하나하나의 버블을 더 견고하게 만들고 다른 버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재생산해내기도 한다. 두려움을 먹고 자란 아주 뚱뚱해져 버린 막을 가진 버블이라는 일차 필터를 통해 타인의 안을 보는 것이다.
제주에서 나는 쓸데없이 똑똑한 척도 해보고, 어디서 구르다 온 인간인지 모르게 행동도 해보고 나름 여러 역할을 시도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읽는 태도에 차이가 있었다. 무얼 공부했고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고 이런 정보가 없을 때 상대는 불안감을 느낀다. (물론 내색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보통 우리는 상대에게 공통점을 발견하고 자신을 투사할 수 없을 때 불안해한다.
나란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생각해본다. 아직도 파악이 끝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다만 변화하는 나의 모습의 면면이 그때마다 납득이 좀 가고 그대로도 괜찮다는 내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꼭 다 파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그 형태인 것이 나쁘지 않다. 요즘 호흡을 집중해서 해볼 때가 있는데 숨을 잘 쉬고 있네, 음 잘 살아있구나 확인한다.
지난해 책방에서 우연히 본 '혐오 없는 삶'이라는 책에서 바스티안 베르브너라는 독일 기자는 '개인적 접촉'에서 오는 이해에 큰 희망을 가지고 있다. 집단 속에 속한 개인이 그 정체성으로 부딪치지 않고 개별적 존재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을 주목한다. 이를테면 옆집에 이스마엘이라는 친구 한 명을 사귀는 것이 이슬람 사회라는 정체성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이해'(-공감이 아니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자신의 인생에 비추어 비뚤어진 공감을 하느니 그 사람의 텍스트를 그대로 인정해보자는 것이다. 이는 알게 모르게 불쑥 올라오는 '판단'조차 내려놓는 일이기에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과거 유럽 내 제노포비아로 논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는데(-결국 다른 주제로 썼다. 당시 나만큼이나 정체성이 좀 불분명한 것을 쓰고 졸업했다-) 생각해보니 난 그걸 시스템, 정책으로 접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개별적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 같다. 공부가 별로 하기 싫었던 것 같다. 소설을 써야 했다. 나에게도 내공이란 것이 생긴다면 다양한 개인의 이야기를 최대한 그들의 시선으로 담아내 보고 싶다.
바스티안 베르브너가 책에서 이야기하듯 내가 선택하든 강제로 거기 던져지든 다른 버블 안에 개인을 본 경험은 우리가 다양성을 향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지점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https://youtu.be/nDbeqj-1X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