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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Feb 14. 2017

산티아고 길 위에서(12)

그 열두 번째 이야기,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과연 있는가. 


나는 태어나자마자 내 의사를 밝히기도 어려운 시절 유아 세례를 받았고 ‘아버지 집안의 천주교에 대한 유구한 역사’에 ‘어머니의 후천적으로 형성된 강렬한 신앙심’이 결합된 영향으로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신은 있다고 믿어왔다. 아주 어린 시절 신은 내가 말하는 소원들을 꽤 들어주셨고 나는 신의 마음에 드는, 신의 사랑을 받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성당도 꼬박꼬박 나갔고 기도도 정말 열심히 했다. 고할 죄도 별로 없는 것 같았지만 지어내서라도 고했다. 그중 동생과 싸웠습니다... 이건 매번 빼먹지 않고 말했고 진실이었다.




산티아고 길 이후 들른 포르투갈 파티마(Fatima)*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런 순수함만으로 신앙을 보게 되지는 않았다. 신의 사랑을 그렇게 외치는 '일부의 사람들'이 정작 죄는 더 많이 짓고 사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기도 했고 자신들만이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발상은 화합과 사랑을 가르쳐야 할 종교가 스스로 그 본래적 목적을 왜곡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마음을 열고 들어도 가끔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부님의 강론은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세련되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성직자는 더 싫었다. 온갖 진리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감 있게 떠들지만 정작 자신의 모순에 빠져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 빈번히 출연하는 일부 성직자들... 과연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의 종교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기적 논리에 실망한다고 해서 신은 없는 것이다라고 결정짓고 싶지 않았다.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의 저서, '신의 위대한 질문' 의하면 제일 처음 히브리어로 쓰인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의적 해석이나 정치가 작용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사진] 해발 1,300m 높이에 위치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에는 신비로운 전설**과 함께 성경책의 동일한 페이지를 각국의 언어로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작은 성당이 있음.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는 주인공이 검을 발견한 마을이기도 함 




그렇다면 시스템으로서 종교는 차치하고서 '신'은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정말 신은 있다고 확신하세요?라고 어느 성직자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그분은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인간이니 잘 모르죠. 그래도 있다고 믿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밑져야 본전이죠." 그나마 내가 들은 답 중에 가장 솔직한 대답인 것 같았다. '신만이 아시죠.' 보다는 더 와닿았다고 할까. 뭔 성직자라는 사람이 저렇게 대책 없이 말하나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솔직해서 좋았다. 사실 그도 신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지기도 하고 삶의 고통 앞에서 나약해지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일진대. 그렇다면 과연 보지 않고 믿는 자는 행복하다는 성경의 어느 구절처럼 그냥 믿어야 하는 걸까.



나는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기도했었다. 내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다 포기할 테니 엄마를 제발 살려달라고 할 만큼 간절했다. 병원에는 각 종교별 기도실이 있고 가끔 성직자가 찾아와 기도도 해주고 가신다. 한 번은 어떤 수녀님이 오셔서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 크리스티나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계세요.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꼭 들어주실 거예요."



그렇다면 내 기도가 부족했던 걸까. 이보다 온 마음을 어떻게 다했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신이 진짜 원망스러웠다. 설령 내가 부족하다 했더라도 그렇게 신을 향해 일관된 믿음을 가졌던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간단 말인가. 착한 사람들은 신이 당신 곁에 두고 싶어서 빨리 데려간다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신의 큰 뜻을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인간인 모양이다.



    

포르투갈 파티마(Fatima),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며 기도하는 사람들 




    

나는 산티아고 길에서 이러한 나의 궁금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길 바랐다. 갑자기 뭔가 뿅 하고 드라마틱한 계기가 생기거나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큰 깨달음이 오지 않더라도 '신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 세계에서 엄마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산티아고 입성을 하루 앞둔 그날까지도 그렇게 걸었건만 도통 깨달은 건 없는 것 같았고 내일 그곳에 도달한다고 갑자기 극적인 변화가 찾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프랑스 루르드(Lourdes)의 기도하는 여성, 무엇이 이토록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는 것일까. 신은 과연 이 여성의 기도를 듣고 계신 걸까.




산티아고 입성 하루 전 날, 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12km 앞둔 지점에 있었다. 원래 계획상으로는 산티아고까지 20km 정도를 앞둔 페드로우소(Pedrouzo)에 머물러야 했지만 갑자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다음 마을까지 나도 모르게 더 걷게 된 것이다. 40일가량을 걸으며 나는 내가 멈춰야 하는 시점은 누구보다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이상은 절대 오버하지 않았다. 덜 갔으면 덜 갔지 더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계획한 곳을 지나쳐 더 가게 된 것이다. 까미노에서 알게 된 지인들에게도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공식적 날짜는 7일로 되어 있었고 그러자면 굳이 하루에 20km 이상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난 이미 20km를 훌쩍 넘어 걷고 있었고, 페드로우소에 멈추지 않은 나 자신이 너무도 신기한 나머지 난 길가 정류장에 앉아 짭조름한 땅콩 믹스를 먹으며 그 원인을 파악해 보고 있었다.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의 작은 성당 안 십자가



그때 산티아고 방향에서 반대로 걸어 내려오던 브라질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브라질 국기가 들어간 두건을 쓰고 함박미소를 날리며 오는 이 남자는 산티아고를 이미 찍고 다시 거꾸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가끔 800km도 부족했는지 거꾸로 또 걷는 사람을 보긴 했지만 실제 만나서 이야기하기는 처음이었다. 이 남자는 어느새 내 땅콩 믹스를 먹고 있었고 그간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과 북한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 등을 이야기했다. 나는 페드로우소에서 멈춰야 했는데 더 지났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이 남자는 그런 내가 가소롭다는 듯 본인 같으면 그냥 20km를 더 걸어서 오늘 산티아고에 입성하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충분한 경비도 없이 맨몸으로 다니는 이 남자는 심지어 춥지도 않은지 알베르게 밖에서 침낭을 깔고 자기도 하며 포르투갈에서의 셰프 경력으로 누군가 식재료를 제공하면 자신이 요리를 해주며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실내에서 자면서도 지병이 있는 듯 덜덜 떨며 자는데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데 온갖 고생담도 밝게 웃으며 말하던 그가 갑자기 약간 슬픈 표정이 되어 어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 길에서 들었다고 했다. 그럼 브라질에 빨리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내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할머니는 그곳에 없는데 가서 뭐 하겠냐고.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했고 할머니의 사랑은 변함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으니 괜찮다며.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 그렇게 확신하냐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물었는데 그는 본인 할머니 일인데 왜 이러나 생각했는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바에서 커피 시키면 나오던 설탕 모은 것을 내게 몇 개 주었다. 자신은 당이 떨어지면 요긴하게 하나씩 뜯어서 먹는다는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였다. 안 받으면 섭섭할 것 같아 일단 고맙다고 받았다. 그리고 나는 내 가방에서 먹을 수 있어 보이는 건 죄다 그에게 건넸다. 또다시 시작하는 그의 여정이 무사하길 바라면서. 너희 할머니 행복하실 테니 슬퍼하지 말라며 그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가 대뜸 그러는 거다. 결국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을 운명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떠났다고 오랫동안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그래도 마지막에 남는 건 추억이고 사랑이라며.. 너도 산티아고 길의 끝에서 그렇게 느끼길 바란다며.. 도사님 같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설탕을 좋아하던 브라질 청년,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메일 주소를 잃어버리는 통에 아직까지 이 사진을 보내주지 못하고 있다.




            

믿음이란 어쩌면 평화나 치유, 행복 같은 것에 그만 매달리고 왜냐는 물음 없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일일지 모른다.

알렉상드르 졸리앙, '왜냐고 묻지 않는 삶’




다음 날, 산티아고 입성 당일, 더 신기하게도 난 두 시간 반 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중간에 교황 방문 기념탑에서 사진도 찍고 쉬엄쉬엄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한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나중에 산티아고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 너 날아왔다며 내가 좀 과장한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대성당 도착하기 전에 한 바에서 브런치를 먹고 일기도 쓰고 온갖 여유를 다 부리고도 대성당 12시 미사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으로 가는 문/ 이 문을 통과하면 나도 모든 죄가 사해지고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 길에서 신은 존재한다는 걸 마침내 느꼈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한테는 왜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인가 답답해졌다. 그래서 마지막 구간을 걸을 때는 정말 이렇게까지 기도를 해보았다.

'주님..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테니 당신이 존재하고 우리 엄마가 엄청 행복하다면 저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무언가를 보여 주세요. 남들은 보지 않고도 잘 믿고 시련 속에서도 굳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데 저는 의심이 많고 부족한 인간이라 그게 잘 안 되니 무언가 제 눈앞에 보여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상징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세요.'라고.

왜 무지개냐고 한다면... 왠지 무지개는 매번 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아주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혼자 그렇게 정했다. 우박이 쏟아지거나 벼락을 맞는 일보다는 쉽다고 생각했다. 남은 여정 속에 무지개를 본다면 믿겠다고... 그냥 믿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 기도했다.


그랬는데 우연인지 어쩐지 나는 이후 산티아고 입성할 때와 묵시아(Muxia)에서 아주 선명한 무지개를 두 차례 보았다. 이게 남들이 말하는 신앙체험일까. 아니면 우연한 일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걸까.

어쨌든 무지개였다.        



묵시아(Muxia)에서 본 무지개




https://www.youtube.com/watch?v=HK4D-H_ssng

산티아고 길에서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슬픔을 주었던 김동률 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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