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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Mar 02. 2017

산티아고 길 위에서(15)

그 열다섯 번째 이야기, '마음이 따뜻했던 순간에 대해'





산티아고 길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길 위의 천사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 말인 즉 누군가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 고마운 순간이 (운이 지지리 없다 할지라도) 한 두 번쯤은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보통 몸이 아프거나 걷는 길이 고단하고 마음이 지칠 때 불현듯 나타나 도와주거나 하다못해 실없는 웃음이라도 짓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괜히 슬퍼질 때 기분을 알아채고 말을 걸어주거나 혹은 가만히 들어주는 사려 깊은 사람들도 내게는 그런 천사들이었다.




오바노스(Obanos) 성당 기둥



마음이 따뜻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다음의 몇 장면이 내 머리를 스친다.



#1. 민들레 꽃을 건네준 할아버지


하루는 비가 미스트처럼 약하게 흩뿌리는 데다 안개까지 희뿌옇게 낀 음산한 산길을 걷고 있었는데 날씨 탓인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 마을을 지나는데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이 조용했고 동네 개들이 대신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길이 점점 지루해졌고 비가 내린 후라 어디 앉기도 힘들어서 그냥 별 에너지 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뿌연 안개 사이로 키가 작고 등이 약간 굽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오신다기보다 내가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걸음이 하도 느리셔서 걷는 자세로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길에서 가끔 연세가 지긋하신 동네 어르신에게 "올라(Hola)"라는 인사를 건네도 아주 시크하게 무시하고 그냥 가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난 고령에 귀가 어두우셔서 그러실 수 있으리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올라'라고 인사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아이같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시며 먼저 손을 흔드셨다.


할아버지는 내게 무어라 열심히 말씀을 하셨지만 슬프게도 전혀 알아들을  없었고 나는 좋은 말이겠거니 하며 최대한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로도  파악할  없는 할아버지의 일방적 연설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에서  아디오스(Adios)를 공손히 외치고 돌아서는데.. 그때 할아버지는 내게 노오란 민들레 꽃을 건네셨다. 햇볕에 그을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주름이 깊게  손으로부터 민들레 꽃은 내게 왔다. 계속 등산 스틱을 쥐고 다니기에 손이 여의치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해맑은 웃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모자란 사람처럼 함께 웃으며 꽃을 소중히 받았다. 할아버지는 민들레를 그렇게 내게 건네시고는 무엇이 그리 즐거우신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동네 어귀로 사라졌다. 처음 등장처럼 - 느리게.


소년처럼 꽃을 꺾어 들고 다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귀여우시다는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건네는 마음의 여유가 참 따뜻했다. 꽃을 들여다보며 걷는데 노란 프리지아를 좋아하던 엄마가 문득 생각났다. 프리지아가 나는 철이 될 때면 난 엄마가 좋아하는 그 모습을 기대하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 두 단씩 사다 드리곤 했었다. 매번 변함없이 기뻐하던 엄마가 무척 그리워지는 그런 노란색이었다.   



할아버지가 주신 노란 민들레 꽃




#2. 길에 차려진 따뜻한 먹거리


아마 포트마린(Portmarin)으로 가는 길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한국인 언니 오빠 부부와 길을 함께 걷다가 대문이 열린 집 안으로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먹을거리'를 발견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노부부가 직접 준비해 놓은 음식들로 생각보다 있을 건 다 있는 나름 훌륭한 구성이었는데 우리는 이미 전 마을에서 무언가를 먹은 후였지만 이끌리듯 이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음식을 가져다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식탁에 둘러앉아 배부르다면서도 차려진 것들을 골고루 맛보았다. 집주인 부부는 무심한 듯 자주 와서 커피를 내려다 주고 과일도 더 가져다주었는데 옆에 마련된 도네이션 함에 얼마를 넣고 가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꼭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햇살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마당에 앉아 쉬어갈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을 선물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산티아고 길이 지나가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까. 매일 지나치는 사람들의 떠들썩함이나 그들의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관람자가 되어 보는 시선들이 싫을 때도 있을 것도 같았다. 물론 어떤 의미(경제적으로)에서는 순례자들이 마을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생색내지 않고 순례자들을 돕고자 하는 무언의 배려가 느껴질 때면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보다 하는 따뜻한 마음이 들었다.




노부부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던 먹거리




#3. 파울로 코엘료가 후원하는 알베르게의 아침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라는 작은 마을에 머문 적이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날은 왠지 여기에서 멈추고 싶었다. 나는 예상과 다르게 이 마을에서 쉬어 가기로 작정했기에 숙소 정보가 별로 없었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탐사를 하다가 한 곳을 발견하고 무작정 들어갔다. 외관은 아기자기하게 이뻤는데 안에 들어가니 오묘한 아로마 향이 풍기며 명상 음악이 잔잔하게 들려오는, 특색 있어 더 매력적인 알베르게였다.


입구 쪽 책상에 앉아 있던 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나를 맞아 주었는데 한 눈에도 어마어마한 내공의 소유자로 보였고 이곳은 뭔가 파울로 코엘료와 연관이 있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울로 코엘료의 사진과 그의 책들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니 다를까 내면의 평화가 충만해 보이는 그는 자신도 브라질 사람이고 파울로 코엘료와 친분이 두터우며 이곳은 그가 지원하는 알베르게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후원을 받는 알베르게라니... 인테리어부터 나름의 독특함을 간직한 이곳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녁은 기부제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기념으로 팔찌를 구입하는 것으로 저녁 플러스알파의 기부를 하였다. 흡사 인도의 한 요가원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천으로 만든 차양을 젖히고 내부로 입장했는데 푹신한 소파를 하나씩 잡고 앉아 있는 독일 여자와 미국인 아주머니가 보였다. 명상 음악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독서를 하던 그들은 막 들어온 나에게 눈인사를 살짝 할 뿐 금세 책으로 다시 시선을 향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비밀 북클럽을 발견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도 씻고 와 한쪽에 드러누워 코엘료의 저서와 '생택쥐베리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사막을 비행한' 어떤 남자의 책을 보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아로마 향이 머리를 맑게 했고 좋은 책들과 함께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준 저녁 시간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나를 따뜻하게 한 순간은 사실 다음날 길을 출발하기 전이었다.



 


아주 이른 시간부터 주방에 나와 간단한 아침을 준비해 주신 이탈리아인 알베르게 여사님은 그날따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걱정이라며 나가는 문 앞에 서 있는 내게 다가와 여기저기 체크하며 챙겨주셨다. 한데 당시 나는 해결된 줄 알았던 오른쪽 발목 복숭아 뼈가 또 아프기 시작하고 있었다. 발에 물집도 잡히지 않고 이상하리만큼 모든 곳이 괜찮았지만 며칠 전부터 신발이 그 부분에 약간 닿기만 해도 왜 그런지 너무 아팠다. 그전에도 신발을 몇 차례 봐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그날 아침 신발에 발을 넣는 순간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왔다. 이래서는 도저히 못 걷겠다 싶었다. 아주머니는 내 발을 이리저리 보더니 아예 신발 매듭을 다 풀어 보통 운동화 매듭처럼 아래쪽에 묶어 주셨는데 걸어보니 신기하게 괜찮았다. 그래도 내가 여전히 어설퍼 보였는지 가방 줄도 새로 당겨 가장 편한 느낌을 찾아주셨고 밖이 춥다며 모자도 야무지게 당겨 씌워주셨다. 아침에 잠도 얼마 못 잔 얼굴로 나가는 길을 봐주는 모습이 꼭 우리 엄마 같았다.


이른 새벽 시간 밖은 매우 추웠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채워서인지 이겨낼 만한 정도였다.






#4. 로르카(Lorca) 알베르게의 한국인 언니


나는 이 길에서 먹을 복이 많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마치 세상 살며 받을 모든 운을 산티아고 길에 끌어다 쓰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 어지간히 많이 먹었고 공짜 술도 제법 마셨다. 나는 사전에 로르카라는 곳에 한국인 여자분이 스페인 남자와 결혼하여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사신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꼭 머물고 싶었지만 그 전날 난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최소의 거리를 걸었기에 여기에서 멈추어 갈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이 알베르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또 어느새 자연스럽게 잊혔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마을을 관통하여 걷고 있었는데 내가 지나가는 길목에 로르카 알베르게의 안주인인 '그 한국인 언니'가 나와 계셨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기분 좋은 만남이 이루어진 거다. 난 이 길에서는 그냥 마음으로 한 번만 생각하면 현실에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노력 없이 얻어지는 행운들이 정말 신기했다. 욕심과 집착이 사라진 마음의 상태가 어떨 때는 생각지 못한 행운을 가져오기도 하나보다. 언니는 산티아고 길을 이미 걸었고 그때 너무나 호인인 남편 호세 씨를 만나 결혼하고 로르카에서 알베르게를 함께 운영하며 살고 계셨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간단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녀의 용기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사람 좋은 호세 씨는 베푸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듯 자연스러웠고 순례객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두 분이 알베르게 문을 닫고 산티아고 길을 천천히 걸을 계획이라고도 했다. 조용한 마을에서 둘이 이렇게 사는 인생도 좋을 것 같았고 내심 부럽기도 했다. 언니는 내 알베르게 리스트에서 꼭 들러야 할 곳들을 표시해 주셨고 알고 있는 길에 대한 정보도 한국인의 정을 듬뿍 담아 나눠 주셨다. 그곳을 떠날 때가 되자 점심 값도 한사코 받으려 하지 않으셨고 나는 그렇게 또 따뜻한 마음이 되어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로르카(Lorca) 알베르게




#5. 탐 아저씨의 편지


시카고 출신의 미국인 탐 아저씨는 이전 글에도 썼지만 내가 길에서 자주 보던 사람 중 하나다. 아저씨는 첫날 생장에서 만나 꽤나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간파하고 계셨고 길에서 늘 애정 어린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 응원은 단순히 길에서 힘내라는 메시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내 인생 전반이 행복하길 바라는 그런 진심이었기에 따뜻했다. 아저씨가 내게 마지막으로 써 준 메시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I will continue to keep you in my prayers.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계속 기도해 준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도 지금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때로는 나의 이해관계와 전혀 상관없는 그런 기도 말이다. 현실의 나는 언제나 부족하지만 기도의 힘은 좀 달랐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행복하길 기도한다.




오늘도 힘내서 걸어요.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잘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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