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다름인가?
혁신
국어사전에 따르면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라고 정의한다.
기존의 가치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자신 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들은 그냥 방구석에 앉아서 남이 해놓은 것들을 비판하는 사람보다 훨씬 멋지다고 생각한다. 아주 새로운 것을 이야기할 때 흔히 부딪치게 되는 기존 질서와의 불협화음이나 다수의 에이 그거 아니잖아. 에도 자신의 것을 계속 끌고 가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언젠가부터 나도 색다른 나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예술가, 기획자를 종종 본다.
그런데 그것의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꼭 다수의 인정이나 사랑으로 볼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이 어떻게든 세상과 섞이고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일으키거나 자극이 되는 것이라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되고 안 되고의 차이는 단지 운이 드럽게 없어서 일까? 전적으로 그 예술가나 혁신가의 역량에 따른 것일까?
나는 상당 부분 그걸 추구하는 사람의 역량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천재성 같이 타고난 기질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고 그의 이야기가 세상과 섞이는 데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끔 너무도 좋은 아이디어인데 저이는 왜 저렇게 고군분투를 하는 것일까.. 같이 느껴보다가 이런 마음의 소리가 떠올랐다.
'너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
본인은 아니라고 하나 아주 무의식에서는 여기에 사로잡힌 예술가가 생각보다 많다고 느낀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할 재능과 아이디어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다름'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타인의 이해를 받고 싶어하는 표면 의식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분야에서든 다른 시도들을 하는 사람이 종종 가질 수 있는 오류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일치하는지는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나는 그냥 너네랑 다름(혹은 특별함)을 이야기하고 싶어. 인지. 소통하고 싶어 인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정말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들어보면 현실은 참 그대로 펼쳐짐을 느끼게도 된다.
무언가 작금의 현실이 만든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그런 비판의식에서 야심 차게 출발하였으나 무의식에 저걸 깔고 간다면 다름을 위한 다름이 될지도.
나는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 이게 자기 안에서 명확해진다면 다음 물음은 이게 아닐까. '나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가?' 그 이야기가 닿는 곳이 현실을 그저 비판하거나 불만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경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닿길 원하나?
솔직하게 나에게도 물어본다. 그리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의 생각이 있지는 않은지 느껴본다.
어제 제주의 한 카페에 갔다가 사장님으로부터 이스라엘 갈반(Israel Galvan)이라는 플라멩코 남자 무용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넷플릭스에서 '무브'라는 제목의 시리즈물 안에 한 꼭지로 들어있는데 아주 인상적으로 보셨다고 했다. 나도 요즘 플라멩코를 배우고 있는데 또 이런 우연성은 무엇이지 하며 그분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여담인데 이곳은 갈 때마다 뜨악-하는 영감을 하나씩 챙겨 오는 신비로운 곳이다. 그리하여 바로 챙겨본 이 남자의 이야기는... 오늘 여기에 쓰는 이야기들에 해답을 주고 있기도 하다.
플라멩코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세비야)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춤이다. 그 전통을 이어오는 집안에 아들이었던 그는 자연스레 춤을 추며 자랐고 부모님의 기대에 맞게 플라멩코 남자 무용수로 잘 성장했다. 실제 어린 시절 상도 많이 타고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그는 더 이상 기존의 무대에서 성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 만의 언어로 자유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전통을 재연하는 것에 더 이상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집단의 터부들을 건드리고 일반적 규범을 넘어서는 움직임을 추구해 나갔다. 기존의 여자만 할 수 있는 것, 남자만 할 수 있는 움직임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심지어 여장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관에 들어가서 춤을 추기도 하는 등 기존 플라멩코 전통 무용수에겐 낯설고 불편한 것들을 선보였다. 부모마저 그런 아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괴로워했다. 실제 그는 스페인 내에서 공연 중 대중의 시선에 폭력을 느낄 정도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마침내 자신의 고국에 돌아와 인정을 받는다. 나는 얼마 전에 플라멩코 수업을 하면서 빨간 치마를 어설프게 휘적거리는 내가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무슨 투우 경기장에서 소떼라도 모는 느낌이네 했었다. 그런데 이 다큐 영상의 끝이 투우 경기장에서 춤을 추고 관객들과 호흡하는 그로 마무리 되는게 아닌가. 흐흐. 하며 보았으나 끝은 짜릿했다. 어디에도 붉은 이미지는 없었지만 투우 경기장이라면 흔히 떠오르는 죽음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미친 열기, 그게 그의 몸에 흐르는 것 같았다.
https://youtu.be/EOJ-z0fKOHU
그의 혁신은 대체 어떻게 실체를 가질 수 있었을까?
나는 영상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기존의 것, 자신의 전통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걸 제대로 이해했다고 느꼈다. (-받아들였다-) 그는 전통과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그건 그것이 있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반대성의 가치가 없다면 자신의 것도 함께 없는 것이니까. 그를 비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와 관객도 그의 내면에서는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실제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그의 어머니의 움직임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하며 두 번째 질문으로 썼던 나는 나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나? 그것에 그가 직접 답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난 영상에서 그가 한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전 춤을 출 때, 제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여요. 그들이 제 친근함과 외로움을 볼 수 있게요.
그가 단순히 자신의 카리스마와 기술을 선보이기 위한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님을, 그의 이야기가 왜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세비야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온몸을 울릴 정도로 강렬하게 지면을 차는 발의 움직임, 여성의 몸의 곡선들이 역동적으로 쓰이며 발산되는 에너지, 손동작의 섬세함, 이 모든 것을 다 담은 듯한 얼굴 표정, 나는 당시 여성 무용수들로부터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여성 무용수가 워낙 화려한 카리스마를 뿜어서인지 남자 무용수가 생각이 잘 안 날 정도였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우연히 남자 무용수의 솔로 춤을 보았는데 멋있었다.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절도와 힘과 카리스마로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와 멋지다 했었다.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쳤던 것 같다. 그런데 이스라엘 갈반 그는 이 두 가지를 한 몸에 다 구현하고 있었다. 남자의 몫, 여자의 몫으로 정해 놓은 그 틀에서 스스로 완벽하게 자유롭게 움직였다.
커버 사진; 멕시코 시티, 인류학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