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여행 이야기 2.
I'm in Jeju island... It just happened.
오랜만에 내게 안부를 물어 온 산티아고 길에서 만났던 탐 아저씨에게 이렇게 i-message를 보냈다. 거기에 대해 아저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달랑 이 한마디만 한다.
Happy?
답을 보내면서 생각해 본다. 내 인생에서 정말 꼭 필요한 시간일까? 난 잘 하고 있는 건가? 라고.
이 질문에 나 스스로 명쾌하게 대답하기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여하튼, IT HAPPENED... 그러니 후회는 없다고 믿는 수밖에.
사실 지금껏 살면서 제주에 대한 나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나이가 좀 들고 본 제주의 모습 중 내게 인상적으로 남은 것이 있다면... 논문 학기에 인턴으로 일했던 기관의 한 행사에 따라가면서 보았던 것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았던 무언가라기보다 느껴졌던 그날의 여유로움일 것이다.
몸보다 괜히 마음이 더 바빴던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차를 렌트하여 제주에 오면 다들 한 번쯤 가본다는 곳들을 중심으로 대략 훑어보았더랬다. 긴장이 풀려서 일까..
당시 팀장님께서 손수 운전을 하시고 젊은것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상황에서 어쩜 그렇게 편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도록 화창한 5월이었는데 무인도에 온 것 마냥 인적 없이 한산한 도로도 생경했고, 모든 것이 햇살과 함께 빛나며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빴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은 그 시간이 너무나 달콤했다. 얼마나 편했으면 세상 근심을 잊고 정신까지 놓았을까. 고개가 반쯤 꺾이다시피 졸다가 일어나 본 노오란 유채꽃 밭은 잠결에 봐도 예뻤다. 시간이 유독 이곳만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뭐든 빨리빨리해야 하는 일상에서 좀 피로해질 때면 그때의 여유롭고 친절했던 제주의 공기가 그리웠다.
이후 몇 차례 일로, 그냥 놀러, 갈 일이 있었으나 왜인지 그 날의 제주만큼 여유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장소를 괜히 가보았다. 세련되게 변했지만 더 이상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찾은 제주에서 놀랍게도 황사 먼지를 의식해야 하는 도심의 분위기는 더욱 어색하게 느껴진다. 다 더럽혀져도 왠지 제주는 청정하게 남아 반겨줄 것 같았는데 이놈의 먼지는 이젠 우리나라 어딜 가도 피할 수 없는가 보다.
그래도 제주는 여전히 서울보다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 시간도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고 어떨 땐 몽환적인 그림 속에 존재하는 느낌마저 든다. 모든 구획이 완벽하게 드러난 그림 말고 경계가 불분명하고 모호한 그런 그림 말이다.
(사진) 선흘리 동백동산/ 람사르 습지로 지정(2011년)된 곳으로 전 날 잠을 몇 시간 못 자고 갔음에도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난해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 몇 차례 나타났고, 봄에 보는 낙엽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제주에 들렀을 때 김영갑 갤러리에 갔었다. 자연 속에 위치한 호젓하고 아담한 그 공간에서 작가님이 촬영하신 오름 사진들을 보며 무언가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한생 동안 이다지도 강렬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며칠 전, 시내에 위치한 어느 독립 책방에 들렀다가 그분의 사진집을 보니 새삼 그때 생각이 났다. 난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고집스럽게 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절박함이나 열정이 난 없었던 것 같다. 나름 열심히 산 것 같기는 해도.
제주도 사람 누구나 알고 있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꼭꼭 숨어있는 속살을 엿보려면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이해해야 한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 보고 느낄 뿐이다.
김영갑,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中
김영갑 작가님의 말씀대로 제주의 바람을 좀 이해해 볼까 하며 나섰다가
몰아치는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우산 살이 우두득 부러졌다. 근처에 온몸으로 사나운 바람을 맞고 있는, 나보다 더 안쓰러워 보이는 현수막의 펄럭임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어디선가 간판이라도 날아올 것 같아 두리번거리는데 앞에 가는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치마가 자꾸 뒤집어져 이와 중에 그것도 신경이 쓰인다. 몇 차례 더 우산이 뒤집어지고 우산 살이 세 개나 부러지고 나서야 우산을 접었다. 차라리 안 쓰고 그냥 맞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을 것 같았다. 제주의 바람마저 즐기긴 아직 무리인 것 같다.
아무리 적응하려 애를 써도
'혼자 남는다'는 건 참 쓸쓸한 장면이야.
아무리 혼자 살다 가는 인생이라지만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둘'이고 싶은 걸.
(라이킷 책방에서 우연히 본...) 테리티리, '우울한 식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