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언어

끝나지 않은 여행 이야기 3.

by Iris K HYUN




'혼저옵서예'


제주 곳곳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이 말이 '어서 오세요'라는 의미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매번 볼 때마다 여전히 '혼자 오세요' 하는 것 같다. 좀 전에도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현수막에 쓰인 이 말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비단 언어뿐 아니라 모든 사고가 이러하다.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본다고 하지만 살아온 세월에 걸맞은 자아와 사고 체계가 생각보다 견고하다. 같은 것을 보면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은 각기 '지맘대로' 인 거다.


물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은 언제나 좋다.



"그건 서울 말이 아닌데요."


나와 집을 같이 쉐어하고 있는, 경상도의 어느 촌(그녀의 말에 따르면)에서 온 어린 동생이 내게 이렇게 말한다. 순수해서 귀여운 그녀가 서울말을 자연스레 쓰고 싶어 하기에 그럼 대화를 좀 해보자 했다. 무엇을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생각해 보려고 시작한 대화에서 그녀가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인천에 가서 서울말을 배워 온 동생이 있었는데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고 했다.

"J야, 언니 평생 서울에 살았는데, 대체 어떤 느낌을 말하는 거니?" 라고 물었으나 그녀는 여튼 언니가 쓰는 건 서울말이 아니라고 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애매하게 어려웠다. 억양은 지적하면 할수록 더 어색하게 들렸고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동화되어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마저 이게 맞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한참 그녀가 쓰는 말을 듣다가 말 끝마다 버릇처럼 붙이는 "맞죠?" 대신 "진짜?"를 써보라고 제안해 주었을 뿐이다. 허나 '서울 남자'를 만나고 싶은 열망이 강한 그녀는 내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서울 남자'는 나처럼 말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내가 되려 묻고 싶었다. 서울 남자가 대체 어떻게 말하든?이라고.

그러다 혹시 싶어 존댓말을 해 보았다.

"밥 먹었어요?"

J는 바로 그거라며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좀 의아했으나 어떤 드라마를 같이 보다가 문득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찾는 그 느낌이 뭔지. 훗날 그녀가 서울에 왔을 때 부디 많이 실망하지 않길 바랐다.

여하튼 난 드디어 그녀에게 서울 언니가 되었다.




얼마 전에 들른 김창열 미술관(제주 저지리 예술인 마을, http://kimtschang-yeul.jeju.go.kr/kimArt/mainView.do)의 '물'을 테마로 한 작품들은 내게 꽤 인상적이었다. 그곳을 선택한 건 더운 날 단지 시원함을 제공해 주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언어'가 아마도 내 방식대로 와 닿은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물방울*은 그대로이지만 배경에 따라 그 이미지와 가치 또한 유동적이고 유연하다.'

작가는 다양한 배경으로 때론 셀 수 없이 수많은 물방울을 반복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흡사 수행과도 같았을 일정한 형태의 반복 작업을 보고 있노라니 숙연한 감정마저 들었다. 물방울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증발하고, 다시 물로 생성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연상케 하며 동양 철학의 단면을 보는 듯했고, 다시금 새로운 것들과 결합되어 존재하는 물방울로부터 묘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Water that remember all)'을 테마로 하는 전시에서는 빌 비올라(Bill Viola)의 'Three Women'(2008)이 인상적이었다. 9분 6초쯤 되는 영상 작품으로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어둠 속에서 존재하던 세 여인들은 차례로 물 장막?을 통과하며 색채가 존재하는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어둠이 내린 (동시에 반짝이는) 어떤 뒤안의 세계로 들어간다. 엄마로 보이는 나이 든 여인과 그녀의 딸들인 것 같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녀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보이는 장막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물폭탄을 맞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영상을 함께 지켜보던 관람자 한 분은 멕배스에 나오는 여자 예언자들처럼 정말 섬뜩하다고 했는데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섬뜩하기는커녕 그냥 편안했다. 어둠으로 처리된 뒤 편의 새로운 영역이 완전한 끝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백남준의 조수로도 일한 바 있는 (동양 철학의 깊이가 남다른) 미국의 비디오 작가인 그는 과거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고 했다. “죽으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늘 함께한다. 나는 죽음을 생각할 때 어둠이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을 생각한다.”





좋은 글은 진실한 글이다.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그 이야기의 진실성은 작가가 지닌 삶에 대한 지식의 양과 진지함의 정도에 비례한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를 창작할 때 그 이야기는 작가만큼 진실해진다.

Ernest Hemingway, '헤밍웨이의 글쓰기' 中



어떻게 하면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진실성만 담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모두 가치가 있는 말이고 글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영화 '컨택트(Arrival, 2016)'에서 여주인공은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방식과 인식구조가 바뀌는 경험을 한다. '시간'의 개념마저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그렇게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요즘 들어 일상에서 내가 자주 쓰는 말이라는 것이 너무 불필요하고 하찮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이러이러한 의도로 말을 했는데 본의 아니게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일이 전개되었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아껴야 함을 한번 더 느낀다. 하물며 글은 더 정제하고 다듬을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만 표현의 한계, 능력 부족으로 역시 제대로 전달이 안 된다. 헤밍웨이가 말했듯 (좋은 글의 기본이 되는) 진실성의 요건으로 그래도 난 진지함은 조금 있을 것도 같은데 아마도 지식의 양이 많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확실히 무언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쓴 작가의 글은 핵심이 명확하게 전달되기는 한다.


저지리 예술인 마을, 현대 미술관 뒷편/ 늦은 오후



중학교 때 즈음인가. 엄마가 선물로 주신 (포켓 사이즈로 된 누리띵띵한 커버의)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을 좋아했다. 한참 읽다 보면 주어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긴 호흡의 문장들이 쓰인 책 사이에서 짧고 군더더기 없이 쉽고, 맑게 쓰여진 그분의 글들이 참 좋았다. 그런데 마음이 복잡한 날 찾아간 제주의 자그마한 책방 한 구석에서 이 책을 보니 너무나 반갑다.

뒤로 눕혀도 눈이 감기지 않는 인형들이 안쓰러워 안대를 해주었다는.. 나이 든 아버지의 순수함은 어린아이들의 감성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어쩜 이렇게 맑을까.



이건 제 평생을 바쳐 쓴 글(노인과 바다)입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면이 담겨져 있고 동시에 인간의 정신세계도 담고 있지요. 지금으로선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입니다.

Ernest Hemingway, '찰스 스크리브너에게', 1940 <서간서집, Selected Letters 中>



용두암, 바라나시 책골목


- 커버 그림 출처: 제주 현대 미술관(박종호, '그림감상')


*김창열 전의 '물방울'은 그의 인생과 맞닿아 있다. 전쟁과 해방을 겪으며 고향을 떠나온 동양의 작은 나라 출신의 작가가 서양에서 예술가로서 활동하는 가운데에서의 '나'를 찾는 여정과 자기 예술의 확립, 기억에 선명하지만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전쟁 중 소중한 이들을 갑작스레 떠나보냈던 고통, 작가로서의 고뇌와 환희 등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의미한다. (물처럼, Like a water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