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섬의 기억_고양이의 꿈 3

코팡안 Koh phangan

by Iris K HYUN




>고양이의 꿈 3<


코팡안 Koh phangan



햇살이 기분 좋게 따스하다. 한층 더 세심하게 털을 고르다 한 여자를 봤다. 고양이가 사는 나무 바로 앞에는 멋진 바다가 있다. 저 물색 같은 수건을 머리에 쓴 여자는 고양이를 보고 자꾸 웃는다. 고양이는 여자가 왜 웃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걸 기억하는 고양이이지만 가끔 아니 자주 사람의 감정을 읽기가 어렵다. 그들은 감정을 감추는데 능하기도 하지만 끝 간데없이 부풀리기도 잘한다. 상대의 눈에 비친 자신으로 장대한 드라마를 쓰기도 하니까.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릿수건 사이로 조금 삐져나온 앞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잡을 수 없는 담배 연기가 생각나서 괜히 몸이 간질간질했다. 혀로 몸의 구석구석을 닦는 도중에 어디선가 스탄 게츠가 연주하는 The girl from Ipanema가 연기처럼 흘러나왔고 여자는 모래 위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어차피 지워질 글자들을 그녀는 아주 정성을 다해 썼다.

무명 4, 그녀는 더 멀리 떠난 것인지 감감무소식이다. 올 때가 되었는데. 그 생각을 하며 배를 하늘로 향하고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는다. 비슷한데 매번 다른 그 소리.

파도가 들이닥쳤고 글자는 지워지고 고양이는 잠이 든다.





꿈이구나. 내려다본 내 몸이 여자의 몸으로 바뀌었다. 고운 털이 몽땅 사라진 심심한 허연 다리를 보는 게 불쾌하지만 이 여자로 경험하는 세상도 나름 재밌겠다. 내가 느끼는 걸 이 몸으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알게 되니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대강 참아줄 만하다. 하지만 어쩐지 이 몸에서는 내 본능이 다 표현되지 않는다. 마치 그들이 쓰는 문자 언어처럼 그것이 그것이 아닌 거다. 핵심에 닿지 못하는 주변을 빙빙 도는 그런 미치도록 화려한 수사에 숨이 턱 막혀 온다.


해변에 누웠다. 아무것도 걸친 것 없는 맨몸이다. 한낮 동안 제대로 달구어진, 적당한 온도보다 훨씬 더운 모래를 손으로 쓸어 보고 발가락 사이에 붙은 모래 덩어리를 꼼지락거리며 움켜잡았다가 놓는다. 온몸이 나른해서 움직이기 싫지만 한편으로는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모래에 몸을 굴려 더러워지고 싶기도 하다. 저마다 꽉 채워진 색들 사이에 어색하리만큼 텅 빈 허연 육체는 어딘지 모르게 좀 심심해 보였다. 파도 거품이 밀려와 허벅지 정도까지 사르르 스치고 다시 멀어진다. 왔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스치고 사라진다.


하-


무의식에 뱉은 숨에 섞인 소리는 나의 정신을 번뜩하게 했다. 살아있는 느낌 이상이었고 모든 감각이 살아나 물의 리듬처럼 같이 출렁였다. 흐릿하게 채색된 수채화 같은 그림들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흔들거리더니 어느 순간 또렷하게 제 형상을 찾아가고 있다. 무너진 이미지들이 별안간 선명한 이야기로 살아났다. 이거 뭐 혼자만 알아도 되는 거야 싶어서 벅찬 마음이 되자 모래가 묻은 손으로 요란하게 눈을 막 비벼댔는데 이어 붙은 그 이야기 덩어리 중 하나가 형체 없이 마구 흐트러져 버렸다. 그리곤 산산이 부서져 이리저리 다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 느낌을 분명 어딘가에서 들었다. 그저 허무한 느낌이 아니다. 비운 동시에 채운 것 같은, 설명하기 어려운 요상한 희열. 그걸 어디에서 들었더라.


이탈리아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정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울리던 종이 있었다. 평소에 주의 깊게 듣지 않아서 몰랐던 그 소리가 나에게 들어온 날이 있었는데 그때 난 머리에 냉수마찰이라도 한 것 같았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종탑 꼭대기에 거대한 녹슨 종은 생각보다 높고 가벼운 소리를 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그 소리는 나를 자극했는데 파도가 나를 만지는 순간에 내게서 찾은 그것과 비슷했다.


노출하여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내 몸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 모른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부족한 걸 찾으면 끝도 없다는 걸 알잖은가. 영혼을 다해 밤낮으로 공들여 빚은 완벽한 조각상이 아닌데도 햇볕 아래 당당히 누워있는 저 다양한 생김의 육체들 사이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판단이 사라진 세계에 들어선 이상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엇이 싫었던 건지. 무엇이 그토록 부끄러웠던 건지. 그것이 정말 보기 싫은 거였나.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볕에 아주 보기 좋게 그을리며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황홀한 외출이 아닐 수 없다. 태양 볕도 바람도 물도 더 잘 느껴진다. 심지어 몽실몽실한 하늘 속 구름이 내 가슴을 살살 간질이고 지나가는데 그게 엉덩이까지 들어왔다 나간 물의 감촉과 섞여서 모래 밑으로 한없이 더 깊이 가라앉고 싶게 한다. 나는 다리를 활짝 벌리고 물이 지나가는 그 길에서 개헤엄을 치듯 버둥댔다. 투명한 이불처럼 친절하게 나신을 덮어주는 물 대신 공기가 음부로 확 지나가는 순간 그 생경한 느낌에 내가 실제로 야외에서 다 벗고 이러고 있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따끔하다. 다리 하나를 하늘로 번쩍 추켜올려 보니 자갈밭이던 다른 해변에서 이미 깊게 베인 발가락에 상처가 보인다. 꾸덕꾸덕해진 피 주변에 모래들이 딱지처럼 들러붙어 있다. 난 순간 그 못난 발가락을 입에 넣고 싶었는데 내 유연성으로 봐서 여러모로 곤란해 보였다.



그때 어떤 남자가 내게 왔다. 나는 눈을 뜨고 있지만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다. 그의 머리칼의 물이 날리듯 내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꿈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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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사진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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