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les 아를르 (1)
무명(無名) 5
Arles 아를르
무명 5는 충동적으로 잤다. 터키 여자랑. 아니 어쩌면 시리아 여자인지도. 터키 어느 동네에서 만났는데 국적을 물어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냥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그녀는 히잡을 둘러쓴 모습으로 왔다. 무명 5가 새 모이를 주는 아저씨 곁에 앉아 모이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리를 응시할 때 그녀는 무명 5를 쳐다보고 있었다.
뭘 쳐다봐요.라는 말 대신 메르하바,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메르하바.라고 했다.
힐끗 본 그녀는 온통 검은색이었다. 두 눈밖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서 아주 옛날 중국에서인가 멀쩡한 발을 전족을 해서 작게 만들어버린 소녀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물웅덩이 위를 걷는 자그만 새들의 걸음을 한동안 보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숨을 쉬는 만큼 클 수 없었던 발, 꽉 조인 헝겊에 맞게 숨을 쉬던 발, 뭐가 됐든 언제가 무명 5가 실제로 보았던 아주 기묘하게 작은 성인의 발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뜬금없이 전족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망설이다가 던진 말이 이거였다.
내가 있는 호텔에 갈래요?
낯선 여자랑 한 번 자볼까 하는 마음이 든 것도 이 여자에게서 색다른 끌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무명 5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 좀 놀랐는데 어쩌면 날이 추운데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거다. 여자도 추워 보였다. 단지 그 이유였다. 별 기대 없이 한 말인데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본인이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어딘지 알고 가요?
무명 5는 그녀를 따라가며 웃었는데 여자는 무명 5가 쓰는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향은 얼추 비슷하게 맞춰서 가고 있길래 무명 5는 한동안 그녀가 가는 대로 두었다. 여자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걷다가 몇 차례 뒤돌아보며 그를 확인했고 그는 계속 앞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1km 즈음 걸어 호텔에 도착했다. 그녀가 갈림길에서 가만히 섰을 때만 무명 5는 방향을 손으로 표시했고 그 외에는 호텔 이름에 대한 언급도 어떤 지시도 없이 둘은 그곳에 와 있었다. 호텔 로비의 문을 힘차게 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무명 5는 어쩌면 그녀가 머무는 호텔에 자신이 온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와인 마실래요?
무명 5는 어제 사다 놓은 와인 두 병이 생각났고 그중 더 드라이한 아이를 집어 그녀가 앉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눈만 깜빡이는 인형처럼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먹겠다는 거죠?
무명 5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 대신 일어나 선반에 진열된 와인 잔을 찾아왔다. 아니 어제 여기서 잔 사람 아니야. 싶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둘은 말없이 마셨고 서로의 빈 잔을 번갈아 채웠다. 어디 살아요. 뭐 해요. 뭐 이런 여러 질문이 있을 법도 한데 그 흔한 질문 하나 건네지 않고 그저 마시다가 가끔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무명 5는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또 막상 물어보려고 하면 그렇게 중요한 질문 같지도 않았다.
머리카락 색이 뭐예요?
오랜 정적을 깨고 무명 5는 물었다. 그녀는 이건 알아들었는지 대답 대신 히잡을 벗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긴 웨이브 머리칼이 드러났다.
눈동자 색이랑 비슷한 갈색이네요.
무명 5가 대답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져봐도 돼요?
그녀는 무명 5에게 가까이 왔고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만졌다. 어딘가 모르게 거칠었는데 그게 아프게 느껴졌다. 손이 아픈 건 당연히 아닌데 어딘가 숨을 못 쉬는 발을 잡은 것 같았다. 괜히 그녀의 발을 봤다.
발이 크네요.
머리를 만지다가 발 이야기라니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발을 한번 내려다보고 장난스럽게 무명 5의 발에 대어 보았다. 큰 차이가 없어 보였는지 혼자 까르르 웃었다. 진짜 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네 싶을 정도로 웃었다. 손 사이로 느껴지는 머리칼, 히잡 사이로 나온 매끈한 얼굴 피부와 다른 결이었고 그제야 그녀가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덥지 않아요?
별안간 더워진 무명 5는 이렇게 물었고 어느 순간이 되자 둘은 나신이 되어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이런 속옷일지 몰랐어요.
침대 바닥에 놓인 그녀의 속옷을 쳐다보며 말했다. 검은 레이스가 디테일하게 수 놓인 아기 손바닥만한 브라와 푸른 나비 문양이 골반 자리에 어렵사리 새겨진 검은 티 팬티를 쳐다보며 말했다.
뭘 예상했는데요?
그녀는 처음으로 긴 문장을 말했고 자신의 그 소리가 맘에 들었는지 자그마한 몸을 굴려 무명 5의 몸에 더 가까이 붙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머리칼처럼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이랄까. 들을수록 더 듣고 싶게 하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사진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