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섬의 기억_무명 5

Arles 아를르 (2)

by Iris K HYUN








무명(無名) 5

Arles 아를르




담배를 피우고 와서 다시 본 그녀의 눈은 고양이에게 전달해야 하는 그 눈이었다. 이런 갈색빛은 사람의 눈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약간 노르스름한 것이 호박 빛깔 같기도 하다. 본 적이 없다고 그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 거다.


아니다. 아를, 거기 어딘가에서 이런 눈을 본 적이 있다. 눈을 보고 있으니 어떤 기억이 스친다. 무명 5는 그 기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떤 이름 모를 여성의 것이라는 걸 안다.







에드가, 나는 이 스페인 남자를 아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흐의 그림 속 카페를 찾다가 지쳐서 아무 데나 일단 들어가자는 심정이었다. 춥기도 했고. 카페 옆 벽에는 푸른색 해골 그라피티가 담쟁이덩굴에 감겨 나를 맞이했다. 그 벽에서 가장 강렬한 파란색은 며칠 전 보았던 성모 마리아의 초상을 떠오르게 했다. 울트라마린색 안료를 아낌없이 쓴 그 옷자락만큼이나 숨 막히게 진했다. 붉은색 카페 문에 붙은 글자를 읽었다. 메뉴판인 줄 알고 들여다본 거기엔 질문이 하나 있다.



고흐, 당신은 타인의 인정 없이도 어떻게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나요?



손님도 별로 없는 카페에는 무척이나 나른하고 지루한 표정의 여사장이 있다. 그녀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앉아 한 번씩 얼굴로 날아드는 날파리를 귀찮은 듯 손으로 쳐내고 있었다. 겨울에 파리가 살 수 있던가. 잠시 생각해 봤다. 유리창 밖으로는 매서운 겨울 아스트랄을 맞으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케 하는 푸른색이 있다. 눈 덮인 길 위에 점점이 피어난 푸른 빛깔의 작은 꽃들, 그들은 하늘의 눈이 포근한 모래라도 되는 것처럼 그 위에서 예쁘게 흔들리고 있다. 그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이름은 무엇일까. 갑작스러운 푸른 환영은 나를 그 자리에 붙잡아 버렸다.


카페의 유일한 손님인 남자는 방금 자다 일어난 듯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밝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에 히피 같은 장신구들을 여기저기 걸치고 엉덩이에서 곧 떨어질 것만 같은 헐렁한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겨울 햇살에 비친 옆얼굴의 실루엣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하얀 손을 내려 탁자 모서리를 일정한 리듬으로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에 검은 투르말린 반지가 눈에 띄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힐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하이라고 했는지, 봉쥬르라고 했는지, 올라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조차도 일순간 진정하게 할 만한 그런 미소였다. 그는 묻지도 않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좀 독특한 여운이 있었는데 그건 그가 스페인어를 쓸 때 유독 두드러졌다. 특히 카스티야 지방의 'c'나 'z' 발음은 영어와는 전혀 다르게 무척이나 섹시하게 들렸다. 그 어감은 닿을 수 없는 타고난 분위기처럼 내가 아무리 오랜 시간 연습한다 한들 만족스러운 결과를 끌어내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뱉는 말에 섞인 그 음향학적 자극을 혼자 깊이 경탄했다.


에드가는 자신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어떤 영화를 만드냐는 물음에 그는 상상하는 걸 좋아한다고 답했다.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분명 일어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다면서.


영화로 만들고 싶은 장면이 있어요? 내가 물었다.


글쎄요. 지금 생각나는 장면이 있긴 한데.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그는 비밀 이야기를 전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들이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어요.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나무 기둥에 단단히 고정된 다리 빼곤 몸의 모든 부분이 온통 아래로 늘어져 있어요. 머리카락은 좀 과장되게 성난 모양으로 갈기갈기 흩어져 땅에 박혀 있는데 그게 물길처럼 사람들 몸으로 무언가를 전달하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매달려 있어요. 머리 아래 땅에는 저마다 글자가 쓰여 있는데 그 행렬이 멀리서 보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죠. 사람들은 거기 매달려서 그 글자를 마시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의 곁으로 더 가까이 몸을 옮겼다. 그처럼 목소리를 줄였다.


글자를 마신다... 벌써 엄청 강렬하네요. 거기 글자는 대체 뭘까요?


음.. 거기엔 글자를 읽고 있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어요. 묶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얄미울 정도로 자유롭게 다니는. 털이 새하얀 아이는 사람들이 쓴 글자를 전부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죠. 고양이한테 물어보세요. 뭐라고 쓴 지는. 말해 놓고 보니 좀 미친놈 같네요.


그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흥미로울수록 어떤 특별난 이야기도 없는 나의 현실이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사진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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