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les 아를르 (3)
무명(無名) 5
Arles 아를르
내 삶은 가짜 같아요. 원래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세상을 잃은 내 표정에 그의 호박색 눈이 더 커졌다. 한동안 서로 멍하니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는 모르겠다. 그는 내게 글을 써주고 싶다고 했다. 눈앞으로 자꾸만 내려오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동안 무언가 열심히 적었다. 글을 적고 있는 손가락이 참 예뻤다. 중지에 검은 투르말린이 반짝이 아니고 번쩍했다. 종이에 쓰인 글자가 신비롭게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아름다운 춤을 추는 사람의 에너지 파동처럼. 안토니오 마차도라는 스페인 작가의 시를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고 했다.
걷는 자여,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한 모든 것은 남습니다.
걸으니 곧 길이 되었습니다.
바다 위의 길들...
걷는 자여, 길은 당신의 발자국일 뿐
어느 다른 이의 것일 수 없습니다.
물결 같은 글자의 의미를 해석해 보느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나 보다. 그는 심각하지 말라는 시늉으로 자신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찡그렸다 폈다.
당신의 여정을 글로 써보면 어때요?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자신의 낡은 노트를 펼쳐 들었다. 묻지도 않고 이 테이블로 온 그는 묻지도 않고 그의 세계로 돌아갔다. 바다 위의 길이라니... 나는 중얼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명 5가 눈을 떴을 때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눈을 보았다. 호텔에 암막 커튼 덕분에 아침이 밝았는지 아직 그 밤에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같은 갈색 눈이 아직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이 좋았다. 고양이의 질문을 할 타이밍이다. 질문지에는 질문은 없고 고양이의 필체로 적힌 짧은 글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이 누군지 몰랐기에
나를 인정해 줄 수 없었고
나의 어머니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기 전에
나를 사랑하길 택했고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자유롭다는 건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편안한 삶이다
어떤 기대나 갈망 없이
세상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이다
아낌없이 내가 주는 그것을 받는다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는 22살 파드마입니다. 터키에 살고 춤을 춥니다.
당신은 왜 춤을 추나요? 당신의 존재의 의미는 무언가요?
춤을 출 때 전 제 안에 다른 문을 여는 느낌이에요. 살아 있어요. 제게 가장 진실한 표현 방식입니다. 존재의 의미, 너무 거창하네요.
거창한가요?
네 의미가 거창해지다 보면 무거워지거든요. 몸도, 마음도.
소원이 있나요?
매 순간 가장 솔직한 표현을 하고 싶어요.
이미 그러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 소원..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자유로울 거예요.
저는 어떤 사람 같아요?
솔직한 사람이요.
무명 5는 그녀의 몸이 다시 뜨거워지는 걸 느꼈고 그건 화염처럼 번지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강렬하게 그를 휘감았다. 제대로 타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올 그런 화염, 그건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히잡 사이로 그가 보았던 그 눈이었다.
무명 5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히잡을 쓴 여인은 어디로 가고 고양이가 나무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당신이 본 눈은 어땠나요?
아름다웠어요.
아름답다는 말은 모두가 합니다.
고양이는 아름답다는 말이 여간 식상한 것이 아니라는 표정이다. 무명 5는 새침한 고양이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눈은 자신의 욕구가 무언지 압니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죠. 그 눈은 저도 솔직하게 만들어요.
고양이는 그에게 더 묻지 않고 노트를 폈다. 그리고 한 문장을 적었다.
당신의 존재는 나의 자유입니다.
고양이는 무명 5가 떠나고 아를의 조각들을 크게 확대해 보았다.
아를의 투우 경기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소와 열광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인다. 한 귀족 청년이 실연의 상처로 성당 앞 계단에 앉아 눈물짓고 그걸 의미 없이 바라보던 부랑자는 성당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다. 론강에는 달빛이 흐르고 연인들이 사랑을 노래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테이블에 접시를 거두는 종업원과 들뜬 얼굴로 자리에 앉는 관광객이 있다. 사람들은 화가의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감탄하고 아이들은 새를 쫓느라 광장을 뛰어다닌다.
가까이 보니 무얼 이야기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연결성이 전혀 없는 그저 작은 점들이 촘촘하게 찍혔을 뿐이다.
줌 아웃, 줌 아웃 또 줌 아웃
아주 멀리 떨어졌다.
작은 점들의 존재감이 너무도 미미해서 존재한지도 모르게 그렇게 멀리.
겉모습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그림이 고양이에게 별안간 읽히기 시작했다.
감탄한 고양이는 푸른 눈을 한동안 껌뻑였다.
조화롭다.
지금으로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어느 시점인지 모를 공간들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별을 그리던 화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어.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할 말고 진짜 나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림을 그린 거야.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사진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