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Island 하와이 (4)
무명(無名) 6
Big Island 하와이
캐시어 했어요. 오랫동안. 세븐 일레븐에서도 하고 월마트에서도 하고.
주유비를 내려고 줄을 섰을 때 말했다. 여자의 옷차림은 쓸쓸하고 무서웠다. 그녀의 그림자가 자신까지 덮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심상을 자아냈다. 깜깜한 밤에 같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그녀는 무명 6이 꺼낸 돈을 보더니 절반만 캐시어에게 대신 건넸다. 나머지는 허릿춤에 삐딱하게 걸려있는 자신의 벨트 사이로 밀어 넣는다. 챔피언 벨트라도 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번쩍거린 그건 아주 닳아서 번들거린다.
잠깐만요.
여자는 무명 6을 계산대 앞에 세워놓고 다시 진열대 쪽으로 향했다. 웰컴투 파라다이스. 붉은 꽃을 머리에 얹은 폴리네시안 여인이 나뭇잎 비키니를 입고 우쿨렐레를 들고 있는 포스터에 적혔다.
과자 몇 봉지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파란색 물감 같은 음료를 기계에서 넘치도록 뽑고 있는 여자를 본다. 그녀가 무명 6을 향해 손짓한다.
무수비 좀 집어줘요.
네? 이거요?
주먹밥 위에 스팸 하나가 덜렁 올라있다. 두꺼운 김 한 줄이 몸통을 감쌌다.
파란색, 그거 맛있어요?
무명 6은 그녀가 골라온 물건들을 보며 말했다.
먹어 볼래요?
무척이나 아이 같은 표정이다. 알 수 없는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그걸 듣는 무명 6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제가를 떠올렸다. 대체 무슨 상관인 건지는 모르겠다.
올림픽 주제가가 머릿속에 남은 건 이때가 유일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건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언덕을 넘을 때의 감격 때문일 거다. 순전히 그 이유다.
92년을 함께 지켜보던 한국인은 36년의 챔피언의 기억을 동시에 떠올렸다. 기나긴 길을 달려 그가 제일 먼저 스테디움에 들어섰을 때 관중석엔 연로한 손기정 선수가 있었다. 36년 챔피언의 슬픔은 92년 챔피언의 영광을 더 귀하고 값진 것으로 만들었다. 같은 월계관이 빛을 받았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 멜로디는 지금도 이렇게 또렷하니.
여자의 노래를 들으니 무명 6은 굉장히 큰돈을 건넨 기분이다. 달달한 물감을 같이 마신 것처럼 마음이 말랑말랑하다.
여자는 운전대를 다시 잡았고 익숙한 듯 컴컴한 도로 위를 달린다.
어찌나 어두운지 차량의 빛이 없는 길을 겨우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야생동물이라도 튀어나오는 건 아닌가 싶어 무명 6은 몇 번이고 허공에다가 브레이크를 밟아댔다.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왜 쓰려고 한지조차 잊었어요.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녀는 풍요의 땅에서 전혀 풍요롭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와이어를 쓸 줄 아는 그녀는 그것이 어떤 자부심이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외지인에게는 풍요롭게만 보이는 그녀의 언어가 고단했다.
무얼 쓰냐고 물어보려다가 글을 쓰는 고양이를 생각했다. 세상 모든 기억을 가진 고양이가 신처럼 느껴졌는데 정작 그 아이는 스토리를 지우고 있었다니.
참 제 양아버지가 작가예요.
그녀에게 이야기를 쓰는 고양이가 있다는 말을 꺼내볼까 고민하던 중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유명한 분인가요?
평범한 이름에 따라오는 그의 독특한 성은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천 년도 더 된 고성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다. 보이는 거라곤 목초지밖에 없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마을을 한참 달리다가 별안간 시야를 가득 채우는 이끼 낀 성. 그런 느낌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유명 위스키 브랜드 행사가 열리고 있을 것 같다. 난데없이 말이다.
진짜 이분이에요?
알파벳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그의 성을 만들어가는데 다 쓰기도 전에 구글이 알려준다. 자동으로 생성된 그의 이름보다 유명한 그의 작품들에 눈이 번쩍 떠진다.
네 양아버지인 거죠.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분이에요.
그녀는 '양'을 강조했다. 정작 그런 유명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실제 만난 적 있어요? 무명 6은 흥분해서 물었다.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어요. 유명한 작가라서 특별한 말을 해줄 줄 알았죠.
밥 먹는 동안 딱 한마디 해줬어요.
무명 6은 별안간 그의 작품을 통째로 다 읽은 팬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떴고 그녀는 웃었다. 차가 멈췄을 때 여자는 무명 6의 눈을 보며 그 말을 떠올렸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자신도 그렇다면서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어딨어요. 다 특별하지. 무명 6은 자신이 더 서운해져서 말했다.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 맞아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거죠. 그 말이 나를 자유롭게 했어요. 그제야 내 이야기로 세상과 소통하게 된 거예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