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섬의 기억_무명 6

Big Island 하와이 (3)

by Iris K HYUN


무명(無名) 6

Big Island 하와이




어둠 속에서 처음 등장한 건 고양이었다. 밤의 한가운데 아주 검은 고양이.


나무 위에 흰 고양이가 떠오르는 검은색이다.



무명 6에게 다가온다.

검은 아이는 마치 이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롭게 도로 한복판을 걷는다.

밟을 수 있는 곳이 사방천지인데 굳이 한 줄 걷기를 하겠다는 집념인 건지 앞으로 내뻗는 걸음 하나하나가 도도하기 그지없다.



차라도 오면 어쩌려고.



무명 6은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고양이의 눈은 분명 무명 6을 보고 있다. 속 타는 건 네 사정이지 라는 얼굴이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죽 늘어나는 느낌에 숨이 막히다가 탁 멈췄다. 무명 6의 정맞은편이다. 아예 몸을 말아 웅크리고 앉는다.



얼씨구.



양쪽 차선 딱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아스팔트와 한 몸이 된 돌부처 같다. 움직일 생각이 없다.



미치겠네.



무명 6은 하는 수 없이 도로변으로 나갔다. 어떻게든 이 아이를 움직여야 로드킬 당하는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겠나. 검은 아이가 나타나고 십 여분이 흐르는 동안 차량이 한 대도 안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언제 차가 올지.




그때였다.

저 멀리서 차 대신 사람이 걸어왔다. 고양이만큼 여유롭게.



체격이 무명 6의 곱절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여자다. 허옇게 탈색된 머리를 대강 묶었는데 검은 뿌리색 머리가 손 한 뼘보다 더 된다. 엉덩이 살 아래가 보일 정도로 아주 짧은 붉은 치마에 무지개가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었다. 허리엔 옛날에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따낸 것 같은 굵은 벨트를 차고 말 갈기 같은 장식이 달린 롱 웨스턴 부츠를 신었다. 나이는 꽤 있어 보이는데 옷차림은 유행을 전혀 모르는 십 대 히피 소녀 같다. 약을 하고 흐린 눈빛을 보내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 좀 도와줘요.



무명 6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여자에게 앞뒤 없이 말했다.

아주 절실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꼼짝없이 이곳에 갇힐 판이었으니.

여자는 무명 6을 대강 훑더니 말한다.



차는 있는데 가스가 없어요. 음, 가스비를 내주면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했고 무명 6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명 6은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한지 모르겠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웃었고 무명 6은 그녀의 눈을 보았다.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 옷차림은 어수선해도 눈빛만은 또렷했다. 눈을 믿기로 했다.



그래 이 눈이다. 그녀의 차에 타기 전에 이미 결심했다. 고양이에게 전달하기로.



여자는 주차한 곳이 멀지 않다며 차를 찾으러 갔고 무명 6은 흐릿한 가로등 빛에 고양이의 질문지를 열어 비춰본다.





갇혔다.

내가 만든 스토리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건 그걸 없애는 거다.

붙인 이름을 떼어내고 보는 세상은

완벽하다.



맞고 틀린 것

옳고 그른 것

좋고 싫은 것

아름답고 추한 것

그 기억이 사라졌다.

다시 시작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영상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






영상 출처: 파이어룰 달마의 <빤뚠, 빤뚬, 뚠뚠, 따나가...의 생성(베루케라, ㅂ*ㄴ 탕786, 새로운개체들을향하여, 아우타스페이스의 AI덴과 레 루후르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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