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섬의 기억_무명 6

Big Island 하와이 (5)

by Iris K HYUN


무명(無名) 6

Big Island 하와이




낮인 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또 밤이었어요. 꿈을 깬 줄 알았는데 또 꿈인 거예요.



세상과 드디어 소통하게 되었다던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언어에는 어딘가 화산의 열기가 흐른다. 아주 고요한 바다를 찾았는데 여기서 끝날 고요라면 이걸 왜 찾았지 하는 마음이 드는 거다.



깜깜한 길에 홀로 서 있던 막막함과 가슴에 용암이 흐르는 찌릿함이 서로 닿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도로에 길이 끝도 없이 생겨나고 있다. 그게 어디로 향해 있는지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조수석 바닥에 아까부터 뭔가가 굴러다닌다. 무명 6이 집어 올린 그건 초록 머리칼이 양 갈래로 힘차게 뻗은 양파다.



이게 왜 여기 있나요?라고 묻기 전에 여자가 말한다.



머리카락이 부러졌어요. 원래 세 갈래였는데.



아 네.



이 차가 정신 병원으로 가는 건 아닐 거다. 진지하게 어둠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무명 6은 양 갈래 머리를 컵 홀더 위에 올렸다. 초록 머리칼이 수신기에 안테나 역할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먼지를 톡톡 털고 신중하게 위치를 조정했다. 모를 일이다. 지지직 거리며 한 번도 들어맞지 않는 저 망할 라디오에서 노래라도 나올지. 어둠이 깨지는 소리를 잠깐 기대했지만 별 소용이 없다.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양파가 인형처럼 웃는다.










나는 작가였어! 글을 쓰는 사람이야!



무명 6은 별안간 자신이 글을 쓰고 있던 기억이 났다. 라디오는 여전히 의미 없는 소음만 만들고 여자는 양아버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그리는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거기엔 소리도 없는 컴컴한 곳에서 글을 쓰는 여자가 있다. 라디오의 지지직 소리조차 없다. 외로워 보인다. 고통스러운 것도 같다. 심지어 그녀의 글자들은 쓰는 족족 죄다 바람에 날려 존재한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허무하다. 절망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싫었다. 그녀의 연약함을 마주하면 온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녀가 쓰는 글을 대신 들여다봤다.




파도를 바라보며 해변에 누워있었다. 파도는 오고 간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모든 것은 아주 푸르렀고 완벽했다. 나는 흠 잡을 것 없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었다.


불과 삼 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한 소녀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언제 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말없이 그저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난데없이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주 심하게 말이다. 그건 정말이지 나를 짜증 나게 했고 급기야 나의 정신을 마구 흐트러트려 놓았다. 하늘과 바다의 이 모든 푸른색이 그녀의 고통과 슬픔에 섞여 붉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나의 평화로움을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나는 약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를 압도하는 그녀의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난 내가 있는 그 자리에 그저 머물렀다. 마치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놓여 있는 듯했다.


갑자기 난 눈을 감은 채로 몸을 그녀 쪽으로 틀어 마치 자궁 속에 아기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녀의 울음과 물소리를 동시에 들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 순간 엄마의 자궁 속에 있었다. 태아인 나는 그녀의 모든 불안과 슬픔을 그대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말한다. 내가 여기 있어요. 걱정 말아요.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몇 차례 더 파도가 오고 간다. 나는 Sea blue를 다시 느낀다. 더 이상 그녀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름도 없는 글은 바람에 날려 순식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눈을 뜨고 봐. 가슴의 용암이 말한다.



더 이상 도망가지 말고 똑바로 쳐다보라고.



무명 6은 그녀를 보았다. 눈을 아주 부릅뜨고 본다.



세상에. 그녀는 웃고 있다. 정신병자인가 싶지만 웃고 있다.



아주 미묘한 표정이라 단번에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미묘한 희열이 있다. 양파의 초록 머리에 붙은 먼지만큼이나 그렇다. 잘라내도 샘솟는 초록 머리카락 분량은 늘 있다. 가끔 기억이 사라져 잊어버리긴 해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알고 있다.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그 언어가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걸.


그림 속이 더 이상 갑갑하게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실체가 있다면 와락 껴안아 주고 싶었다. 깜깜한 밤이 없다면 결코 쓰지 않았을 그 모든 글자를 바라보며 그제야 그녀는 그림을 나올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자신의 두 발로 성큼 걸어 나왔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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