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섬의 기억_고양이의 꿈 5

서울 Seoul

by Iris K HYUN


> 고양이의 꿈 5 <


서울 Seoul



꿈을 꿨어. 이 꿈에서 나는 딱히 어떤 형태가 있는 존재인가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여기 있구나 뭐 그런 느낌만 있어. 어떤 남자가 등장했는데 마치 모든 장면이 그이의 독백을 듣는 거 같았거든.



3년 전이었지 아마. 내가 널 본답시고 한국에 간 적이 있잖아. 그야말로 무계획으로 뒷산 가듯 그저 배낭 하나 둘러메고. 너에게 의지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넌 내 예상보다 훨씬 바쁜 작가였어. 그런데 왜 한국인 거야? 라는 나의 질문에 해외 작가 초청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라고.. 넌 초청을 아주 힘주어 말했지. 그렇게 그곳에서 존재의 합당한 의미를 되새기는 너를 보며 내 존재는 더 의미를 잃은 느낌이었어. 따지고 보면 나는 네가 초청해서 거기 있는 거도 아니었잖아. 난 왜 한국에 갔던 걸까.



그 일주일의 한국은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렸고 젖은 도시는 밤이 늦도록 화려한 조명에 반짝였어. 호텔 구경하러 그 멀리까지 간 건 아닐 텐데 어이없게도 난 호텔에 주로 있었고 일층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담긴 것 없는 빈 워드창을 열고 커피를 마셨어. 그 카페 입구엔 포시즌스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었는데 매일 그걸 보며 입장을 하는 게 낙이었다면 너무 처량한 건가. 그리 크지 않은 화폭에 사계절이 다 담겨 있는데 그걸 보는 나는 정작 어느 계절에 있는지 혼란스럽더라고.


내가 앉은 자리 뒤편엔 대리석 사이로 크기가 일정치 않은 나무색 격자무늬가 수많은 구획을 그리고 있어. 언젠가 네가 보내준 사진 속에 한국의 성, 궁이라고 불렀던가, 거기에 문들이 생각났어. 주로 연한 청록색의 문이었지. 노란색 문도 있고. 그 문들은 뭐랄까. 안을 들여다보고 싶게 한다기보다 그 문을 열고 나오고 싶은 사람이 그 속에 있을 것만 같은 거야. 체면에 헛기침을 내리하며 애써 앉아 있긴 한데 밖이 몹시 궁금한 거지. 세월에 벗겨진 색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언젠가 본 쿠바의 집들도 떠오르는데 정반대의 느낌인 거야. 밖에서 안으로 향한 시선, 안에서 밖으로 향한 시선 어떤 게 더 강하게 느껴지니 넌? 갑자기 궁금하다.



문의 격자들이 빗소리에 둥글어지면서 ㅎㅎㅎㅎㅎㅎ 웃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양이야. 히읗.



넌 비 오는 날 처마 아래에서 듣는 빗소리를 좋아한다고 했어. 우두두두두두두 떨어지는 그 소리가 아주 낭만적이라면서. 그때의 너를 생각해. 비를 보는데 ㅎ이 보이는 거 보면.









넌 그 글자가 어찌나 좋은지 한국이름을 짓는다면 호호호.라고 해달라고... 그런 매력적이지 않은 생각을 떠올렸을 정도였지. 하긴 네 이름은 발음하기가 쉽지 않아. 언젠가 어둠 속에서 네 차에 탔다던 한국 여자, 그 사람이 지어준 이름있었잖아. 엔젤. 아직도 의문이다. 그 여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한국에서 사람들은 널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하다.



그래 난 계속 빈 워드창이야. 한숨이 나올 지경이라 차라리 노트북 너머로 시야를 넓혀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판단했어. 시야에서 약간 우측 벽면에는 영상이 돌아가. 프랑스 파티셰가 초콜릿을 장난감 다루듯 이리저리 주무르고 있어. 그가 먹는 딸기는 무척 맛있어 보여. 빈 노트북을 하염없이 보느니 그가 딸기 먹는 걸 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 벌써 서른 번은 더 봤어. 마지막에 그는 그가 창조한 달콤한 초콜릿 라즈베리 쿠키를 살짝 베어 물며 말해.


화려하지는 않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 여자의 이미지, 그게 남았어. 긴 웨이브 펌을 한 여자는 통창 바로 옆 소파에 앉아서 비에 젖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어. 누군가는 전화를 하고 어떤 이는 책을 들여다보고 또 누군가는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저마다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밖을 쳐다보는 것 말고는. 그것도 제법 오랜 시간을. 다들 무언가를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데 여자는 뭐랄까 그냥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무언의 위안 같았어. 그 공간에서 나와 같은 계절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묘한 느낌이었어.


여자가 보는 풍경을 보았어. 호텔 안만 들여다본 게 그제야 억울해지더라고. 사람 구경이 이렇게 재밌는지 처음 알았지. 한국 사람들의 다양한 생김과 패션이 눈에 들어왔어. 그들은 꾸미는 걸 참 좋아하는 거 같아. 멋스러운 그들의 모습 그리고 여백이 없는 빠른 걸음들. 그러다 보았어. 아스팔트 길 위에 비가 고여 생긴 작은 웅덩이, 거기 비둘기 몇 마리가 번갈아 몸을 적시는 모습. 날개를 펼치며 아주 낮게 몸을 띄웠다가 이내 다시 제자리에서 뒤뚱이는 새의 무리.


땅속으로 스미지 못하는 물, 날지 못하는 새.


이미지를 마음으로 계속 중얼거렸어. 카페에서는 The girl from Ipanema가 흘러나왔어. 비가 더 세차게 내렸고 존재의 의미를 억지로 찾으려는 마음이 어디론가 쓸려갔어.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