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한국 (1)
무명(無名) 7
Korea, 한국
고양이는 눈을 발견하는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다고 했다. 어떤 이는 멕시코, 터키, 프랑스, 또 누구는 쿠바, 하와이까지 갔다면서. 무명 7은 멀리 떠난 이들과 달랐다. 집으로 가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곳인데 아주 아득하게 먼 길처럼 느껴진다.
가는 길은 내내 깜깜했다. 한낮인데 형태 없는 짙은 구름은 기묘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불투명하게 낮게 내려앉은 구름을 보며 숨이 막혔다. 그렇다고 보통 비 내리기 전에 꾸물거리는 그런 날의 느낌은 아니다. 익숙한 거리가 자주 지나던 곳곳이 누군가 뿌려놓은 인공적인 회색 거품 덩어리처럼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존재하는데 느낄 수 없는 허깨비 같은 덩어리, 부풀만큼 잔뜩 부풀었는데 그 덩어리들이 계속 말한다.
나 이 정도면 매끈하지 않아?
하늘은 당장이라도 음울한 회색빛을 제대로 터트려 무언가 쏟아낼 분위기를 잡지만 그건 비가 아닐 거다. 그르르르------------그르르르ㅡㅡㅡㅡ-릉. 소리가 들린다기보다 몸이 진동한다.
가는 길에 아주 매우 귀여운 아기를 만났다. 손잡이가 없는 노란색 문이 있길래 툭 밀어보았더니 그 안에서 나왔다. 튼튼한 요람에 누운 아이는 포근한 이불에 쌓여 무명 7을 바라본다. 시간을 보니 11시 24분이다. 아침인지 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는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검은 눈을 반짝인다. 투르말린 원석 같기도 하고 일렁이는 밤바다의 물결 같기도 하다. 잠에서 막 깨서 가물거리는 정신을 지금 이곳으로 돌려놓으려고 미간에 힘을 준다.
볼록한 뺨과 오동통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다양한 표정을 짓던 아이는 무명 7의 눈을 똑바로 맞추더니 누군지 심사하듯 빤히 본다. 용돈 얼마쯤 줄까 하는 어르신처럼 자비로운 위엄마저 느껴졌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을 탁 터트렸다. 단순히 환하다는 말로는 결코 성에 차지 않아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의 환희다. 가슴에 뜨거운 바람이 훅 들어오면서 온몸이 사르르 녹는다. 세상의 회색빛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한껏 움츠린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맘껏 웃는 너는 어떤 꽃을 피울 거니.
무명 7의 눈앞에 청록색 격자무늬의 문이 있다. 아이를 들여다보다가 깜빡 잠이 든 것인지 모르겠다. 문고리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달린 그 문을 여니 갓을 쓴 어떤 선비가 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비쩍 마른 사람은 문고리보다 더 위태롭게 일렁이는 호롱불 아래 책을 들여다본다. 그 앞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그를 향해 앉았다. 해맑게 웃는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린다. 별안간 호롱불이 힘을 내기라도 하는 듯 밝아지는 그런 소리다. 남자는 아이를 보지만 웃지 않는다. 웃는 아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외로이 앉았다. 바람이 분 적도 없는데 호롱불은 스르륵 꺼졌고 갓을 쓴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이는 그 방에 홀로 남았다. 아이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청록색 문을 열었다. 아까 그 문보다 색이 더 바랬고 낡았다. 문고리는 어디로 갔는지 달려 있지도 않다. 그 안에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 아이가 있다.
문의 격자들이 빗소리에 둥글어지면서 ㅎㅎㅎㅎㅎㅎ 웃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히읗.
아이는 신이 나는지 몸을 크게 들썩이며 웃는다. 비가 오는 날 해라도 본 것처럼 양 갈래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댄다. 아이의 앞에는 문처럼 ㅎㅎㅎㅎㅎ 웃을 수 없는 남자가 있다. 웃는 아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앉아 있다.
미안하구나. 나는 너를 위해 웃어줄 수 없어.
남자는 말한다.
검은색 굵은 핀처럼 생긴 가시가 콕콕 찌르는 느낌이다.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ㅎㅎㅎㅎㅎ 문이 격자무늬로 변해 가슴을 찌른다. 회색빛 세상에서 아이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한다.
잊어버렸나 봐요. 당신이 내 이름을 이렇게 지었잖아요. 히읗.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