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한국 (2)
무명(無名) 7
Korea, 한국
무명 7은 또다시 공간을 이동했다. 볏짚으로 지붕을 잇고 흙과 나무로 지은 허름한 집이 한 채 보인다. 지붕이 하도 낮아서 들어가려면 등을 한참이나 구부려야 한다. 누군가 노래한다.
물레야 윙윙 돌아라 워리렁 웽웽 돌아라--
새벽같이 시작한 작업은 어느덧 해 질 녘의 노을에 닿았다. 무명 7은 여인의 거친 손마디를 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여인의 목소리에 시간이 흐르니 소녀는 익숙한 듯 손을 움직인다. 소녀의 손끝은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풀잎처럼 가볍고 조심스럽다. 손톱보다 더 얇게 뽑아낸 하얀 모시실이 빗살 틈을 지나고 소녀는 숨조차 가늘게 내쉬며 실의 흐름에 온 신경을 쏟는다. 그 작은 손이 만드는 짜임새는 마치 먼 들판의 이슬 맺힌 거미줄처럼 섬세하다. 실을 엮을 때마다 빛을 머금은 모시의 결이 부드럽게 반짝인다. “스르륵, 스르륵” 작은 물레가 돌아가는 소리와 실이 고르게 이어질 때마다 나는 “찰칵” 소리가 소녀의 손끝에서 끊임없이 리듬을 타고 이어진다. 그녀의 눈에는 초여름 새벽의 안개처럼 맑은 결의 모시옷이 선명히 비친다. 모시실을 잇는 손가락 사이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다. 누군가 이 모시옷을 입을 때 이 작은 손길을 따뜻하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 몸을 감싸 안을 차갑고도 부드러운 결들을 느끼며 무명 7은 눈을 감는다.
아버지!
소녀가 쏜살같이 맨발로 달려 나간다. 그녀의 환대가 무색하게 지주댁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무겁다. 일 년 내내 애써 길러낸 목화송이는 얼마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지주의 몫으로 대부분을 빼앗기니 손에 쥔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 고된 일의 대가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여보, 이거 뭐게요? 귀한 걸 얻었어요. 이화주예요.
아내가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들고 나온 작은 사발에 남자의 시선이 멈춘다. 소박한 상에 놓인 이화주의 은은한 향기가 어느새 방안 가득 퍼져 묵직했던 공기마저 부드럽게 감싼다.
누룩을 소나무 잎에 싸서 오래 숙성시켰대요. 이렇게 좋은 향은 참 오랜만이지요?
아내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잔을 받아 든 그는 가만히 이화주를 들이켜 본다. 목을 타고 흐르는 술이 가슴까지 퍼지는 순간 오늘의 피로와 고단함이 노랫가락처럼 날아간다. 그의 눈에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의 거친 손이 작은 그녀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자 맑은 눈망울이 배꽃처럼 환하게 빛난다. 괜찮다. 웃는 눈 속에서 잠시나마 서로의 무거움을 내려놓는다. 무명 7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밭은 여전히 빈 듯하지만 곳곳에 봄동배추가 푸른빛을 내며 살아 있다. 아이는 겨우내 남아 있는 봄동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기특하게 자라난 것들을 찾아낸다. 억센 바람을 맞으며 움츠러들지 않고 살아남은 배추 잎사귀들이 아이의 손끝에 닿자 아삭한 소리를 낸다. 모진 겨울을 견뎌낸 단단함과 그 속에 달큰한 맛을 모두 품었다. 아이는 조심스레 하나를 뜯어 입안에 넣는다. 살짝 쌉싸름하면서도 속은 감미로운 봄동의 맛이 입안 가득 퍼져 시린 바람마저 잠시 잊게 한다. 추운 계절에도 꿋꿋이 남은 봄동을 야무지게 씹으며 아이는 자신도 그 기운을 함께 삼켜버린 듯 어딘지 마음이 강해지는 기분이다.
깨지거나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더 큰 원이 되는 거라고.
물 위에 떨어지는 잉크 방울을 보는 무명 7에게 누군가가 고요하게 말했다. 물방울 패턴의 히잡을 쓴 터키 여자다. 기억의 이동은 순식간이다. 물 위에 그림을 그리는 여자는 그걸 Ebru Art라고 했다. 섞일 수 없는 것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있다가 서로 만나서 더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끝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났다. 여자는 무명 7에게 자신의 작품을 건넨다. 붉은 튤립이다. 그 뒤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호수에 작은 낙엽이 떨어지면 그 주위는 커다란 지진이 난 것처럼 수면이 찰랑이겠지만 저 호수 건너편에서는 그 낙엽을 눈치챌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낙엽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호수가 되어 네가 원하는 삶에 생명을 줘.
눈앞의 아이가 웃는다. 무명 7은 별안간 세상의 빛이 다 살아나 풍요롭게 쏟아지는 느낌에 전율했다. 아이는 어떤 판단도 없이 자신의 감각으로 잘 논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어려움도 없다. 아주 즐겁게 다 움켜쥐었다. 자신의 손으로. 무명 7은 집에 돌아가기 전에 글을 남겨야겠다고 느꼈다. 아이에게 주고 싶은 말들. 뜨거운 가슴의 말.
입 안에서 굴리는 어떤 사탕보다 넌 달다. 네가 언어 이전에 해석 없이 보여주는 모든 표현이 어떤 초콜릿보다 달콤하다. 아주 진한 다크 초콜릿이 더 좋았는데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왜냐고 묻는다면 그게 덜 심심했거든. 그걸 집는 게 덜 미안했거든. 눈앞에 아주 단 것이 있어도 난 어딘가 모르게 그걸 집었어. 그리고 입 안에서 느껴지는 그 맛이 가장 달콤하다고 내게 말해줬지. 그냥 처음부터 아주 달아도 이젠 좋을 것 같아. 씁쓸할 필요 없는 그저 달콤해서 웃음이 나는 그런 거. 아니다. 씁쓸한 거 그 맛을 맛보지 않았으면 이토록 달콤하다고 느끼지 못했겠네. 너는 이미 피어 있는 꽃이구나. 반짝이는 보석이구나. 너에게 어떤 꽃을 피울 거냐고 물어본 내 질문이 무색하게 너는 그냥 완벽하구나. 아름다워서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나고 가슴이 벅차. 존재해 주어서 고맙다 아가야.
아이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이러고 한나절을 보내도 지겹지 않을 것 같다. 이토록 맑고 빛나는 검은색이 있을까. 그 속에 무명 7이 웃고 있다. 아이가 말한다.
쫄지마. 다 누리고 가려고 왔잖아.
왜 멀리 떠나지 않았어? 멋진 나라들이 많았잖아. 다른 사람들은 이국적인 곳에서 찾아온 멋진 눈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고. 고양이가 무명 7에게 물었다.
그러게. 그런데 네가 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난 제일 가까이에 있는 눈들이 궁금해지더라고. 아주 새삼스럽게 말이지. 오래 보고 있다고 해서 듣고 있던 건 아니었나 봐. 그 눈에서 나랑 공통점을 찾아내는 건 사실 쉬웠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열었을 때 난 내가 가장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를 보았어. 나의 아버지, 외모 말고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고 느끼는 그분,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사람을 안을 수 없었어. 그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이었거든. 나의 눈을 닮은 그 눈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
고양이는 눈을 감고 그 문 안을 함께 바라봤다. 거기엔 웃는 아이를 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들리는 소리로 말한다.
네가 두렵고 외로울 때 나는 그걸 아주 잘 느낄 수 있단다. 표현하지 않지만. 왜냐면 그 감정이 내게 익숙한 것이거든. 아주 오랜 노래처럼. 이렇게 느낄 때 나는 이 모든 게 나의 책임처럼 느껴져 더 두려워진단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미안하다. 너를 위해 마음껏 웃어줄 수 없어서. 아가야. 너는 이제 다른 노래를 부르면 좋겠구나.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크게 울렸고 귀가 아닌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나무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모든 눈처럼 우리를 바라봤다.
세상은 생각보다 안전하단다. 사랑받기 위해 너를 증명하며 살지 말고 그냥 막살아. 마음껏 너를 표현하면서. 그게 설령 두려움일지라도.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은 가시가 톡톡 떨어져 내렸다.
고양이는 나무에서 내려온 지 오래다. 해변에 앉아 노을빛이 내리는 바다를 바라본다. 그 바다는 제주의 어딘가라고 했다. 같은 걸 보고 있는 무명 7은 고양이에게 자신이 쓴 글 한 조각을 내밀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글을 내보인 것이 처음이라서 몹시 부끄러웠다. 고양이는 그걸 힐끗 보더니 자신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무명 7은 숨을 크게 한번 쉬고 글을 읽는다. 제목은 풍요, 한국어였다.
세상은 애초에 우리에게 하얀 종이를 주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풍요로운 사람,
그들은 세상이 주는 백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백지가 백지가 아니라고 느낀다면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내가 그린 그 얼룩덜룩한 모든 색을.
그걸 대체 내가 왜 그렸을까.
한참 밖에서 들여다보면
백지를 받을 시간이 온다.
고양이는 꼭 감은 눈을 아주 천천히 떴고 잠시 정적 속에 있다가 입을 뗐다.
고작 백지 한 장 받으려고 그렇게 돌아다닌 거야?
무명 7이 대답한다.
응 그게 얼마나 큰 건데.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사방으로 흩날리고 금빛 노트의 한 페이지가 저절로 펼쳐졌다. 고양이는 앞발로 그걸 야무지게 밟고선 마지막 문장을 썼다.
당신의 존재는 사랑입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