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야?
고양이는 놀라서 여자를 본다.
다른 것도 열어 봐.
또 다른 점 하나를 펼치니 돌고래한테 서핑을 배우는 어느 날이 보인다. 거센 파도를 맞아 보드 아래로 나동그라질 때, 연거푸 물을 마시고 추레한 몰골로 보드에 다시 오를 때, 중심을 잡고 눈을 부릅뜨며 파도 사이로 정면을 응시할 때, 모든 모습이 차례로 연결된다.
고양이는 몇 초의 파도가 주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중얼거린다.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발로 물살을 거침없이 헤치며 파도에 맞춰 그 위를 미끄러질 때 그 느낌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단단한 힘과 균형으로 파도를 타고 있다는 그 강렬한 성취감에 가슴이 부풀고 보이지 않는 열기에 한껏 도취되었다.
꾹꾹이 발을 더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으로 돌아가는 그 화면에 풍덩 빠졌다.
여자는 모래 위에 계속 글자를 썼고 그 글자가 바람에 날리듯 공중에서 이미지를 그린다. 북소리가 더 커지고 아무 의미가 없는 여자의 울음이 의미처럼 귀에 들어오니 고양이는 숨을 고르고 더 먼 곳의 지점을 올려다봤다. 보드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그 보름달 얼굴에서 드디어 좀 멀어진 거다. 그 시점부터다. 고양이의 눈에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양이를 흐뭇하게 보는 돌고래, 하늘 위를 나는 새의 무리, 햇살, 바람, 구름, 바다 안에 수많은 생명체, 그건 펼치지 않은 다른 점들과 모두 이어진다.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듯 화폭에 온몸을 맡기고 나른하게 소리를 낸다.
ㅁ...야.....아....오....옹....
고양이의 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스크린 위에 다른 점들이 흔들거리며 저마다 다른 속도로 화면 안에 펼쳐진다. 고양이를 낳아준 엄마 고양이, 아빠 고양이, 할아버지 고양이, 할머니 고양이, 그 위에 조상 고양이들.... 그 끝도 없는 이야기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줄기와 잎사귀처럼 무한하게 확장된다.
갑자기 두려운 감정이 든다. 큰 파도가 올 때마다 그렇다. 파도가 너무 거대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몸이 젖는 것, 그게 아주 불쾌하다. 아니 불쾌함 이상이다. 물이 나를 오염시켜 버릴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감각과 감정이 요동친다. 좀전까지 서핑을 했던 자신을 당최 믿을 수 없을 지경으로 두렵다. 언제부터 나는 두려웠던 걸까. 질문을 떠올리는 동시에 고양이는 누군가의 소리를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물의 진동이 전해주는 느낌에 가까운데 스크린에서 보는 것과 우연인지 어쩐지 일치한다. 의식을 그대로 상영하는 그 필름에서 누군가의 길고 긴 나레이션을 순간적으로 '본다.'
나의 조상은 대대로 중동 사막에 살았어. 그러니 털이 물에 젖는 일도 애초에 별로 없었을 건데 만일 시에 그럴 일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어. 일교차가 큰 그곳에선 치명적이었을 거야. 보송보송하고 얇은 속털까지 몽땅 젖어버린다면 아. 끔찍해. 날렵한 몸은 순식간에 천근만근일 테고 체온 조절도 제대로 안 되니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일이지. 응 아주 심각한 일이야.
의식이 이동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펼쳐지는 이미지에 고양이는 정신이 없다. 머리가 뱅뱅 도는 듯 어지럽다. 숨을 좀 쉬고 의식을 옮겨 보드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맘에 든다, 직접 고른 보드. 자신의 찐빵 얼굴 캐리커쳐와 'ㅎ' 을 이니셜로 새긴 나무 보드는 꽤나 멋지다. 이번엔 한층 더 빠르게 점들이 펼쳐진다.
나무 보드를 쉐이핑 하는 사람, 코팅하는 사람, 나무를 베는 사람, 운반하는 사람, 셀 수 없는 그 모든 이야기가 한꺼번에 움직인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파도랑 대화하고 있는 달의 서사다. 달이 그렇게 말이 많은지 몰랐다. 더 가관은 파도다. 매 순간 달의 빛을 그대로 느끼며 응답하고 있었다. 그 조각들이 이리저리 제멋대로 흔들거리다 희미해진다. 매끄럽게 움직이던 모든 시간들이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것인 양 고양이의 발짓 한 번에 모래처럼 사르르 밀려간다.
너는 어디에 있어? 너의 점은 어디에 있어?
흥분한 고양이는 다른 점들도 확대해 보려고 두 발을 조급하게 모니터에 가져다 댔다.
진정해. 함부로 펼치지 마.
여자는 고양이의 발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힘을 주고 모은 두 발을 펼치기 직전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