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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Aug 08. 2018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7)

힘든 날 덤덤한 위로를 건넨 영화




머리가 복잡한 날,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충동적으로 봤다.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말고, 사람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기에 다큐로 제작된 이 영상을 보면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저 별생각 없이 그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광고인 박웅현 씨는 그의 어떤 책(그의 저서가 많아서 어디에서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이;;)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음악 속에 드라마가 아주 잘 느껴지는 곡이며,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 곡의 클라이막스 부분이 흘렀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의 경우는 어릴 때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 음악을 듣고 드라마틱한 서사가 참 잘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영화음악이니 더욱 그러하겠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너무나 유명한 'Rain'은 음악이 마치 스스로 나서서 인물의 심리 상태나 상황을 아주 디테일하게 그리는 것 같다. 혼란과 격정의 드라마 한 편이 음악 속에 있다.  


난 이 음악이 쓰인 영화(마지막 황제, 1987)를 보지 못했기에 늘 이 음악을 들을 때면 내 맘대로 떠올려 보는 몇 가지 장면이 있었다.


비가 무진장 세차게 내리고 있다. 그럼에도 우산도 쓰지 않은 한 여성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주체 안 되는 감정 상태로 어디론가 냅다 뛰어가는 모습이 그중 하나고, 또 하나는 역시 비슷한 감정 상태의 위태로운 여자가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와이퍼에도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울 만큼의 비가 콸콸 쏟아져 내리고 여자는 목적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차를 막 몰아간다.  


 

이제야 유튜브에 찾아보니, 이런 장면에 쓰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e2k4PWONj7g

Rain이 배경으로 깔리는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



원제는 'I want a divorce'이며, 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와 이혼을 원하는 숙비 문수가 이혼하고 싶다고 선포 후 빗속으로 뛰어가는 장면에 깔리고 있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묘한 해방감도 느껴지는데, 영상 없이도 대략 비슷한 것들이 연상되었으니 그가 음악으로 극을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연히 등장할 것만 같았던 'rain'은 이 다큐에서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라도 왠지 나오지 않을까 싶었으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처음과 끝은 'Merry Christmas Mr.Lawrence'였다-이도 너무 좋다!) 뭔가 뇌를 쾅쾅 때리는 강렬한 사운드가 오늘의 나에게 힐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무도 잔잔한 그의 일상과 마치 내 앞에 앉아서 들려주는 것처럼 진행되는 소박한 인터뷰가 어쩐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게 느껴진다.


그는 지속되는, 사라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그런 소리를 동경해 왔다고 말한다. 보통 어떤 악기든 한 음을 연주하고 멈췄을 때도 여전히 이어지는 소리가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조차도 약해지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말년에 암 진단을 받지만, 이 영상에선 이를 어떤 극적인 장치로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처음 의사의 진단에 농담인 줄 알았을 만큼 믿기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이 나오긴 하지만 영상 속에서 그는 비교적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시간에 자신의 작업들을 그저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약을 삼키고, 피아노 앞에 앉고, 작업하는 그 모습들은 작위적이지 않고, 아주 일상적이어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빛나는 눈빛을 가진 예술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탄생한 음악들은 생명력을 가지고 빛나고 있었다.




류이치 사카모토, 나이 들어도 멋지다.



그는 언젠가부터 자연 속에서 나는 소리들을 집요하게 채집하고 연구한다. 숲 속 한가운데 서서, 그리고 빙하 아래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새가 지저귀는 자연 그대로의 소리 자체에서 영감을 얻고, 인공의 사운드와의 적절한 조화를 시도한다. 심지어 쓰나미에 의해 폐허가 된 곳에 버려진 조율 안 된 피아노마저 그 자연스러운 상태대로의 사운드의 미(美)를 찾아내는데 그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양동이를 쓰고 빗소리를 듣고 있는 류이치 아저씨



그가 소리 채집을 하는 장면에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방송국에 계시던 부모님의 영향이었는지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 이거 저거 녹음을 해보기도 하며 놀았다. 동생과 함께 목청이 터져라 동요를 불러 녹음하기도 하고, 엄마가 하는 시낭송을 따라서 녹음하기도 하고, '우리는 왜 살아가는 걸까' 라며 쓸데없이 진지한 보이스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영화 음악을 좋아해서 방송에 나오는 영화 음악들을 죄다 녹음해서 분류하여 놓고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 당시 MP3계의 샛별이었던 아이리버(설마 아이리버 모르시는 분 계실라나요?;; 모르는 척.. 그러지마요 허허;;)가 야심 차게 내놓은 새 모델을 장만하여 신나게 여행을 갔었고, 그때 나는 음악을 듣는 것만큼이나 참 많은 것들을 거기에 녹음했더랬다. 인상적인 연주는 무조건 녹음했고, 자연 소리, 각국 친구들의 노랫소리 등 오만 잡소리들이 추억처럼 차곡차곡 그곳에 담겼다.

하지만 프랑스 시골의 어느 강가에서 엠피쓰리와 함께 내가 '잠수'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액정에 출렁이는 물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했었다. 장난치려고 나를 들어다 물에 빠트리고 좋아하던 친구는 주머니에 엠피쓰리가 있을 줄 몰랐다며 본인도 너무 놀란 나머지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을 때려도 된다고까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때린다고 해결이 될 일인가. 녹음한 것이 졸지에 다 날아갔다는 생각에 쉽게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 생각한 소리들이었지만, 내겐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다행히 이후에 자료들을 어찌 복원할 수 있었다ㅎ)

 

물론 난 류이치처럼 예술적 경지로 소리를 듣고 채집한 건 아니지만ㅡ우습게도 혼자 진지했던 이런 과거가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시각적 자극 못지않게 우리의 청각적 기억도 참 신비롭게도 오래가는 것 같다. 마치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연주하는 'The girl from ipanema'를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들었는데, 다른 곳에서 그 음악이 들려도 베니스의 그 광장이 자주 떠오르는 것처럼.




그는 멋진 아티스트다.




정말이지 가끔은 깜빡 졸 수도 있을 만큼이나 잔잔한 이 영화에서 그래도 약간의 웃음 포인트가 있다면, 그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과 작업할 때의 일화에서다. 곡 작업을 다 마쳤고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삼십 여분 앞두었을 무렵, 감독은 돌연 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류이치에게 수정을 요구한다. 그는 그건 이미 늦은 일이라 좀 힘들 것 같다고 하자 그 감독이 이렇게 말했단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해주던데" ㅎㅎ

그리하여 어찌어찌 다시 수정을 했고, 결과는 대박으로 이어졌다는 그런 일화였다.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훌륭한 아티스트이기도 하지만 환경 문제를 포함 정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멋진 지성인이기도 하다. 이번 다큐를 통해 몰랐던 이런 점들도 알게 되어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난 자신이 작업한 소리를 듣고 만족스러웠는지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가 더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좋은 음악을 많이 들려주길 팬으로서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부끄럽지 않은 것들을 좀 더 남기고 싶어요.

-류이치 사카모토, 영화 속 인터뷰 中-




http://naver.me/5lYcgVZl

처음과 끝은 그의 곡, Merry Christmas Mr.Lawrence가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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