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으로 사는 세상
어른의 몸을 하고 아이처럼 다시 사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영화에서 만삭의 여자는 다리 아래로 스스로 추락한다.
천재적인 의사 갓윈은 이 여자를 데려다가 태어나지 못한 그 생명의 머리를 여자의 머리에 이식한다.
말도 안 될 것 같은 몸의 부활과 부활 이후 그 생명이 몸과 살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은
주인공 벨라의 모험에서 무얼 느낄 수 있을까?
나는 누구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무엇이지.
우리는 정신없이 살다가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굉장한 철학자가 된 것처럼 진지해진다. 어쩌면 태아의 머리를 이식하여 삶을 살게 된 벨라의 질문이기도 하다. 막판에 감독이 나름대로 여기에 해답을 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워낙 자신의 색깔이 독특한 감독이니 그가 표현하는 방식으로 느껴볼 답이 궁금했다. <참,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다.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 Alasdair gray, Poor things, 1992/을 바탕으로 했다.>
어른의 몸을 한 벨라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아이처럼 세상을 경험한다.
뭐가 좋고 나쁜 것인지 혹은 적절한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한 기준이 없는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걸 그대로 표현한다.
주변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편견이 없으니 경험이 곧 그녀의 세상이 된다.
자신의 안에서 저항하거나 제어하는 관념이 없는 상태에서 무얼 경험하는 것은 다 즐거운 것이다.
감탄의 연속이다.
말을 배우고
타인의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다.
또 그걸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너무도.
브레이크가 없는 차를 모는 아이 같다.
순간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
그런 그녀는
자신을 만들어준, 안락한? 갓 윈의 집을 떠나
모험을 떠난다.
갓윈이 말해주는 집 밖 세상은
예측불가능한 두려운 곳이었지만
그것을 만나보려는 호기심과 설렘은 그 여정을 시작하게 했다.
심지어 자신만 바라보는 충실한 약혼자도 두고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낯선 남자, 던컨을 냅다 따라나섰다.
원초적 욕망을 제어하는 사회적 자아가 없기에
어쩌면 그렇게 냅다 따라나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벨라는 아이의 눈으로 세상 여행을 시작한다.
마주하는 매번의 세상
바다를 건너
리스본, 알렉산드리아, 파리.
그녀가 처음 마주하는 그 세상들은
그들의 색과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초기 여정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던컨은
어느덧 소유에 집착하는 인물로 본색을 드러내며
그녀의 이야기에서 점차 사라진다.
배 안에서 다양한 상류층 사람들의
시선과 문화를
아이처럼 접하던 벨라는
책을 읽으며 작가의 철학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그러다 그곳에서 냉소주의자 해리를 만나고
그는 배 밖의 세상을 벨라에게 보여준다.
배 안과 전혀 다른 그 모습에
그녀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
파리에서는 아픈 손주의 병원비를 위해
매춘업소를 운영하는 마담 스위니를 만나
그 생활을 경험하기도 한다.
선악이 없던 세계에
선악이 생겨나고 좋고 싫고가 생기고
두렵고 아프고 고통스러움이 생긴다.
타인에 의해서 보는 세상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판단 없이 체험하고 느끼며 만든 그 세상에서
그녀는 어쩌면 신의 마음을 알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생명을 준 갓 (윈)은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녀의 모험을 기꺼이 허락했다.
떠나는 길에 종잣돈까지 쥐어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신은 그녀가 기뻐하는 삶을 기뻐한다.
마지막의 벨라의 표정은 신의 마음을 아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다시 돌아온 그녀의 집은
그녀가 보고 싶은 세상이 되어 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누구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무엇이지
이 질문에 답은
밥그릇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행복하게 밥을 먹는
저기 귀여운 강아지가 더 잘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아주 어린 아기 때
나는
이런 질문을 하지도 않고
세상을 가장 충실히 느끼고 살지 않았을까.
https://youtu.be/HGptTzZQE-w?si=mlSzmPI5pH--BN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