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 Dec 30. 2016

산티아고 길 위에서(4)

그 네 번째 이야기,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순간들'

 




산티아고 길에서는 웬만하면 서로를 배려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런 아름다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누군가 아프면 자신의 일처럼 걱정해 주고 서로 나서서 기꺼이 도와준다.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의 여유도 어느 때보다 강해서 뭘 주지 못해 안달이다. 물론 길 위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피차 별로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눌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고 예상치 못하게 받은 관심과 사랑은 희한하게도 전염성이 있어서 또 남에게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든다. 정말 콩 한쪽도 나눌 용의가 생긴다.



까미노는 함께 도우며 걷는 길이다.




평소 같으면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하며 자신을 위해 아껴놓을 것들을 선뜻 꺼내 놓을 수 있다. 나에겐 '신라면'과 '너구리'가 그러했고, 아프면 붙이려고 들고 갔던 '휴족시간'도 그중 하나였다. 한국 음식을 꼭 먹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는,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인 나에게도 하나씩밖에 챙기지 않았던 신라면과 너구리는 소중한 비상식량이었다. 말 그대로 비상시에 먹으려고 가방 한 구석에 소중히 품고 다녔지만 여정 초반에 만난, 더 절실해 보이는 동생에게 과감히 주었다. 이후에 중국 슈퍼에서 라면을 살 기회가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라면들이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신 라면 파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 에서 몇 번 맛볼 기회가 있었으니 그리 서운할 일은 아니었다. '휴족시간'도 피레네를 넘고 난 후 론세바예스에서 나이팅게일이나 된 마냥 이 사람 저 사람 붙여주고 다녀서 정작 나중에 내가 쓰려고 보니 몇 장 남아 있지 않았다. 아빠 협찬의 등산용 스틱도 '피레네 산맥 넘을 때'는 무슨 자심 감이었는지... 다른 사람을 주고 나는 그냥 넘었다. 내가 나눈 것들은 이렇게 '갖은 생색을 다 내며' 떠올려 봐도 얼마 되지 않겠지만 반대로 받은 것은 대충 생각해도 벌써 수십 가지다.


누군가 그랬다. 까미노에선 모두가 한 번쯤은 자신의 천사를 만나게 된다고. 나의 천사들 덕분에 나도 좀 더 상대에게 너그러워져서... 천사 비스무리한 뭐라도 된 순간이 반드시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이곳은 식당은 아니고, 기념품 가게인데 한국 라면과 우동, 햇반 등을 팔고 있다. 포트마린(Portmarin) 가기 조금 전에 위치해 있음







그러나 오늘은 사랑이 넘치는 에피소드가 아닌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까미노의 훈훈한 미담은 워낙 개인마다 많기에 오히려 식상할 수 있으니?... 이번 지면에는 평화로운 여정 속에서 분노를 금치 못했던,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순간'을 아주 생생히 되살려 적어볼까 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날 나는 이들처럼 평화로웠다. 론세바예스에서 주비리로 가는 길.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그 첫 번째는 '불가리아 여자와 피자'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금 말하지만 까미노 길에서 가장 분노한 사건 중 하나다.



생장에서 출발한 지 삼 일째 되는 날 나는 주비리(Zubiri)라는 마을에 있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그리하여 나름 평이 괜찮다 하는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그곳에는 오리손 산장(피레네 산맥 중턱에 위치)에서 만났던 스페인 남자와 불가리아 여자, 그리고 그의 사촌오빠가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니 마냥 반가웠다. 스페인 남자가 세탁기 돌릴 사람을 모집하길래 나도 잽싸게 지원을 해놓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불가리아 여자의 목소리가 옆 방에서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미국에 여느 '자뻑이 심한' 십 대 소녀가 떠는 줄 알았을 정도로 소란스럽게 영어를 구사하였고, 과도하게 발랄했다. 같은 방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불가리아 여자는 자신이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저녁을 먹으라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안내 방송을 했고 야외에 준비된 테이블 세팅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고 있었다. 까미노 길을 걷고 나서 녹초가 된 나에게 그녀의 이런 열정적인 모습은 참 신선했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샘솟는 것인지...



주비리(Zubiri) 마을 전경



시간이 지날수록 더 파이팅 넘치는 불가리아 여자는 수시로 벌떡 일어나 건배 제의를 하였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꾸준히 들려주기도, 너네도 추천 좀 해보라며 부담을 주기도 했다.


한국인 언니 오빠 부부도 이곳에서 처음 만났는데 나처럼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나만 특별히 비실거리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불가리아 여자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이 어서 쉬고 싶어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잡고 더 놀자고 졸라댔다. 참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으나 그럼 내일 팜플로냐(생장에서 출발할 경우, 처음 마주치는 제법 큰 도시?임)에 도착해서 더 놀자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달래고 들어가려는데... 팜플로냐 가면 자신이 아는 클럽에 가자고 여러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다. 너도 갈 거지?라고 하는데... 아 뭐지... 이 여자... 이렇게 흥이 주체가 안 되는데 까미노 길은 왜 걷는 걸까... 순간 복잡한 심경이 되었으나 그냥 알았다고 쿨한 척 웃고 들어왔다.



론세바예스에서 주비리 가는 길, 오랜 시간 서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도 내가 신기하니?



다음 날 나는 불가리아 여자와 그의 사촌이 다 떠난 후 일부러 더 늦게 숙소에서 나왔다. 헤어질 때 말로는 이따 보자라고 했지만 다시 본다 해도 그렇게 막 반가울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온갖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걸었기에 웬만하면 불가리아 여인을 못 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보다 걸음이 느렸고 서너 시간쯤 걷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바에서 우린 다시 마주쳤다. 다른 반가운 얼굴들은 이미 점심을 주문하여 먹거나 혹은 먹은 후였고 나는 비슷하게 도착한 일본 여자와 배낭을 내팽게치듯 땅바닥에 내려놓고 음식을 주문하러 갔다. 일본 여자와 나는 너무 배가 고팠다. 우리는 돌도 씹어 먹을 기세로 유리 진열대 안에 파이와 오믈렛, 보카디요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본 여자는 진열대 안으로 거의 들어갈 정도로 얼굴을 아예 유리에 딱 붙이고 서서 우리 주문을 빨리 좀 받아주겠니 하는 간절한 눈빛을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주문하려는 우리를 막았다.


"안 돼. 먹지 마. 너희 후회할 걸." 


잘못한 것도 없건만 괜히 움찔 놀랄 만큼 우렁찬 그 목소리는... 여전히 파이팅이 넘치는 불가리아 언니였다.

아니  다 맛있어 보이는데 왜? 라며 혹시 주인이 듣기라도 할까 눈치 보며 말하는 우리에게 불가리아 언니는 여기서 20-30분 정도 더 가면 피자집이 있는데.. 정말 어메이징한 곳이라고... 일급비밀이나 되는 것처럼.... 인심 쓴다 애들아 하는 투로 알려주었다. 이런 간식류 따위로 점심을 때우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걸 하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일본 여자와 나는 홀린 듯 파이에서 눈을 거두고 그냥 카페 콘레체를 시켜서 나왔다. 훌륭한 피자를 위해서 잠시만 참자고 생각하며 빈 속에 커피만 넣고 무거운 가방을 들쳐 메고 다시 길에 올랐다.


날씨는 정오를 넘으면서 살인적으로 더웠고 이글거리는 태양은 이제 뒤가 아닌 정면에서 얼굴을 아프게 했다.







 

일본 여자는 키가 매우 작았는데 배낭은 자기 몸집보다 몇 배나 큰 걸 메서 왠지 더 안쓰러웠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불가리아 언니 한 번은 믿어보자. 그래도 까미노 두 번씩이나 했던 사람인데.. 오죽하면 이 피자집을 추천하겠니... 분명 이 고통을 감수한 만큼 정말 맛있을 거야... 라며 더 이상 없을 것만 같았던 최후의 힘까지 다 짜내어 걸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피자집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거다. 40분은 족히 걸은 것 같았다. 이날따라 햇살은 한층 더 잔인하게.. 마치 모든 걸 태워 없앨 듯 우리들 머리로 내렸고 강렬한 햇살 때문인지 정신이 나간 건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물이 눈 앞에서 제 형태가 아닌 모습으로 일렁였다. 그럴 무렵 저 멀리 오두막집 같은 건물이 보이는 것 같았고 일본 여자는 너무 기뻤는지 '피자, 피자'를 외치며 그 큰 가방을 멘 채로 그리로 막 내달렸다.



그런데 그 철골로 된 대문에 믿을 수 없는 글자가 보였다.

Closed 

일본 여자는 그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고 나는 순간 (평생 살면서 들어만 봤지 내 입으로 감히 내뱉어 보지 못한) 욕이 나올 뻔했다. 그때 그 집에서 먹었어야 했어... 불가리아 언니가 그깟 파이라고 취급했던.. 그 빵 부스러기라도 지금은 이렇게 간절한데. 못 먹게 막아서도 난 그냥 시켰어야 했어...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2시가 훌쩍 넘어가는 시간에 아무것도 못 먹고 땡볕에 아침부터 온종일 걷고 있으니 정신줄을 그만 놓을 지경이었다. 일본 여자는 화도 못 내고 얼빠진 얼굴로 계속 '피자, 피자...'이러고 있는데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하필 피자집이 그 날 영업을 안 할 줄은... 불가리아 언니 역시 꿈에라도 예상치 못한 일 일터이니 우리가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으나 (또 어찌 보면 선한 의도로 한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본인도 민망할 거라 생각하고 화를 다스려야 하지만...) 정작 나를 분노하게 했던 건 불가리아 언니의 이어지는 반응들이었다.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도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 상황에 '자신은 괜찮다'는 것이다. 배가 그렇게 고프지는 않단다. 인생이 다 그렇지... 라면서.


사이코패스까지는 너무했고 소시오패스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언니는 상대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제로인 것인가. 다음 마을까지 '11km 정도' 남았는데 자신은 괜찮을 거 같단다. 뭐? 1킬로도 아니고 11킬로? 아무것도 안 먹고 거기까지 가야 하는데 괜찮다고? 미친 거 아니야? 여봐 너 말만 믿고 일본애랑 나랑 거기서 아무것도 못 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 있잖아? 너만 괜찮으면 다야? 일본애 이 아이 꼴을 봐라. 이러고도 너가 지금 괜찮다는 말이 나와?라고 하고 싶었는데... 너무 기가 차니 말도 안 나와서 그냥 실 없이 웃고 있었다.




하하하. 그냥 웃지요.




그랬더니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여자의 사촌오빠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괜찮겠냐고... 계속 나에게 물었고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노를 다 끌어모아 말해줬다.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그런데 불가리아 언니는 여전히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자신은 이 김에 살도 빼고 아주 좋단다. 이따가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겠단다. 사람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는데 그녀의 사촌오빠가 무언가 급히 들고 왔다. 옷에 가득 쌓아서 들고 온 건 무화과였다. 무화과가 열려 있는지도 몰랐는데 지천에 있는 나무가 그 나무였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불가리아 오빠는 자신의 마실 물을 아낌없이 부어서 무화과를 열심히 씻더니 나와 일본 여자에게 건넸다. 불가리아 언니의 죄를 대신 사죄하겠다는 사촌오빠의 진정성 있는 제스처가 분노로 일그러진 내 마음을 약간 진정시켰다. 그러나 정작 불가리아 언니는 무화과를 받아먹지도, 끝내 미안하다거나 너희 괜찮니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민망한 나머지 더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뭐라고 하지 않았다.




샘물을 몇 바가지 퍼 먹는다고 해도 화가 식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여자는 자신은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여기서 좀 쉬겠다고 했다. 그래도 뭐라도 먹으려면 어서 가야지 싶었지만 그녀는 한동안 넋이 나간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많이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기 죽치고 있다가는 정말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억지로 일어났다. 금방 오라고. 좀 있다 만나자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별 표정 없이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돌아봤다. 나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못 먹어서 힘도 없는데 저 큰 가방을 어찌 들고 오겠냐며... 도와주지도 못 할 거면서 불가리아 언니에게 걱정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언니는 너무 쿨하게 그러는 거다.


"쟤 힘들어 보이긴 하는데 신기하게 매번 다음 장소에 잘 와 있더라. 걱정 마. 알아서 올 거야."


어쩜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하는지. 그럴 때마다 흰머리의 사촌오빠가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괜찮냐며... 무화과 더 먹고 싶으면 말하라고... 그렇게 미안한 얼굴이 되어 내 눈치를 봤다. 아마 젊은 나이에 흰머리가 난 건... 이 불가리아 언니랑 여행 다니다가 저래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불가리아 언니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르던 사촌 오빠



이후 나는 매우 다행히도 한국인 언니 오빠 부부를 길에서 만나 이 답답한 심경을 토로할 수 있었고 부부가 준 초코바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팜플로냐에 입성한 불가리아 언니는 소망대로 클럽에 가셨는지 알 수는 없었다. 여전히 파이팅 넘치는 모습만 지나치며 몇 차례 보았을 뿐이다. 일본 여자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만나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으나(길에서 일본인만 만나면 그녀를 아냐고 물어봤다), 거의 산티아고 길 중반 이후에 만나 서로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각자 일행이 있어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그때 그 피자'라고 하며 같이 한바탕 웃고 헤어졌다.







나를 두 번째 시험에 들게 한 순간은... 다음 편에 써야 할 것 같다. 불가리아 언니와의 추억을 이렇게 길게 쓸지 예상치 못했다.


매번 여행에서 닥치는, 내 인내심의 바닥을 보게 되는, 이런 유쾌하지 못한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좀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당시 사안이 주는 '심각성' 내지는 '불편한 감정'이라는 곁가지는 다 날아가 버리고 팩트라는 딱 알맹이만 남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되기도 하고 가끔은 우리를 웃게 하는 그런 묘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불가리아 언니를 이야기하면서 그때처럼 화가 나지 않는 걸 보니 그렇다.


  

신기하죠. 당시엔 죽을 만큼 심각했던 일도 지나고 보면 그냥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러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길 위에서(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