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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Jan 04. 2017

산티아고 길 위에서(5)

그 다섯 번째 이야기,  '시작'의 의미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작이다. 늘 당연하게 내게 덕담을 해주시던 엄마가 부재하는 사실 말고는. 지인들과 비슷한 인사를 톡으로 주고받는다. 크게 기대할 것 없는 새해라도 지난 해 보다는 나을 거라는,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희망을 담아서.


사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는 그 앞에 붙는 연도가 바뀌는.. 아주 큰 일처럼 보이나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가 다를 뿐 앞서 지나온 날들과 다르지 않은 보통의 어제와 오늘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해로 구분지은 까닭에 타성에 젖은 나를 한번 돌아보고 뭐라도 다시 정비해서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든지 간에) 새로 파이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봐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다.




포트마린(Portmarin)의 해질 무렵




새해를 맞이하면서 까미노에 관한 글을 쓰려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사리아(Sarria)라는 지역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목적지를 약 100km 정도 앞두고 만나게 되는 마을이며, 생장부터 출발한 사람들에게는 이제 산티아고가 얼마 안 남았음을 느끼게 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보 시 100km를 완주해야 함)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시간이 얼마 없거나 체력적인 이유로 전 구간을 다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이전부터 계속 걸어온 사람들과 이제 막 출발하는 사람들이 혼재된 구간의 시작이기도 하다.






아마 별 대화를 나눠 보지 않고도  사람들을 이 두 그룹으로 분류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외는 언제나 존재한다.) 여기서 막 출발한 뉴페이스들은 대체로 일주일 내외로 걷는 여정이기에 짐이 매우 단출하거나 또 외면적으로 덜 상해? 있다. 때로는 풀 메이크업을 한 여성들을 발견할 수도 있는데 거의 백 프로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소 들떠 있기도 하는데... 오랜 여정의 고단함으로 그 길이 그 길이지.. 라며 매너리즘에 빠진 올드 멤버들과 비교할 땐 좀 그런 편이다. 계속 말하지만 예외는 존재한다.


간혹 오래 걷는 이들 중에는 조금만 걷는 사람들을 보며 진정한 순례의 자세가 안 되어 있다고 혹은 진지하지 못하다고 쓴소리를 하는 경우도 보았다. 특히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중간중간 멈춰 서서 맛보기 탐방을 하는 경우도 몇 차례 보았는데 본래 순례길의 취지가 너무 상업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아 좀 씁쓸했다. 이곳은 사실 여타 다른 관광지와는 다른, 이 길이 오랫동안 축적해 온 고유의 문화적 분위기가 매력인데... 자꾸 유명세를 타면서 어떤 패키지 상품의 하나로 소위 그냥 찍고 가는.. 그런 곳이 되는 건 정말이지 반대다. 뭐 내가 반대한다고 상품이 안 만들어지겠나 마는. 그러나 십 킬로를 걷든 백 킬로를 걷든 혹은 팔백을 다 걷든 자신의 체력과 시간을 감안하여 충분히 잘 소화할 수 있다면 거리의 양과 진지함은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래 걷고 있다고 더 진지하고 뭘 더 깨닫는 것도 아니고, 적게 걷는 사람한테 에이 그거밖에 안 걸어요... 할 일도 아니라는 거다.




사리아 가기 전, 두 개의 갈림길을 마주친다. 사모스(Samos)를 통해 가는 왼쪽 우회길과 산실(San Xil)로 가는(사리아로 바로 가는) 길/ 난 왼쪽 사모스 길을 선택하였음


사리아에 있는 이탈라아 사람이 하는 피자집, 아이라이너를 너무 과하게 한 남자가 주문을 받았는데 이날이 아마 할로윈데이라 그러고 있었던 모양임(그 남자 사진은 못 찍었다)


나름 여러 가지 토핑을 골고루 체험할 수 있는 모듬 피자?/ 맛은 놀라울 정도는 아님. 배고파서 그런대로 맛있었음  





'시작'의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사리아'라는 지역이 생각난 이유는 나에게는 '거의 다 왔다'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시작이었고, 그런 누군가를 바라보며 나의 시작을 새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한 나에게는 이 지역이 10월의 어느 늦가을이라면, 누군가에게는 1월 1일이었다. 까미노 길을 일 년 열두 달의 여정으로 바꿔 비유하자면 그렇다. 정확하게 같은 세팅 속에서 같은 무언가를 보고 있으면서도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까미노 매너리즘?에 빠져 모든 것들이 처음만큼 경이롭지는 않았다. 낯선 풍경이나 사물에 쉽게 감탄하고 감동하였던 건 아마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가 최고였던 것 같다. 별일 아닌 것에 와와 이것 봐 저것 봐하며 매번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지니 그렇지가 못했다.



(까미노 매너리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리아로 가는 길 도중의 이 풍경은 정말 멋졌다.




그런데 나의 이런 매너리즘에 경종을 울리는 자가 있었으니 사리아에서 만난 콜롬비아 청년 호날도다. 그는 사리아에서 출발하여 5일 일정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할 계획이었는데 첫날 사리아 초입에 있는 호텔에서 나오다가 나를 만났다. 나는 그 호텔은 아니고 마을 초입에 있는 다른 알베르게에서 묶었는데 그 호텔 옆을 지나가다가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그를 보게 되었다. 등에 멘 가방을 여러 차례 들썩 거리며 가다가 서길 반복했고, 날씨에 비해 너무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었으며, 나무 지팡이를 뭔가 모르게 불편하게 짚으며 걷고 있었다.


내가 그의 옆을 스치면서 버릇처럼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했는데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하는 모습마저도 뭔가 어색해 보였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은 콜롬비아에서 왔고 오늘이 까미노 첫째 날이라고 했다. 아, 어쩐지... 그랬구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 그래 힘내렴 하는 미소를 보내고 내 갈 길을 가려는데 그는 자꾸 말이 하고 싶은 눈치였다. 어디에서 시작했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생장에서 출발했노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는 믿을 수 없다며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그게 뭐라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눈을 보니 정말 진심으로 감탄하는 그런 빛이 역력했다. 자신은 딱 5일을 계획했고 그러려면 하루에 평균 잡아 20km를 걸어야 하는데 지금 20km도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없다며... 정말 슈퍼 히어로나 되는 것처럼 나를 추켜세웠다. 난 누구나 닥치면 다 한단다 라며 생장에서 누가 나에게 그랬듯 선배스러운 말투로 말해줬다. 더군다나 20대인 네가 30대 누나 앞에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면 되겠니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나이가 더 들었다는 사실을 굳이 내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관뒀다. 




알베르게가 모여 있는 사리아 길목




이 청년의 이름은 호날도 어쩌고저쩌고.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로널드 철자 그대로이지만 자기네는 요로케 발음 하노라 친절하게 알려줬다. 오잇 축구선수 호날두도 있잖아? 라고 말하면서 참 느낌은 다르다 생각했다. 그는 '현'이라는 외자의 내 이름을 발음하기 무척 힘들어했다. 여러 번 따라 하면서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일 무렵 나는 그럼 크리스티나로 하라고 내 세례명이자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가끔 쓰는 영어 이름을 알려줬다. 그는 땡큐를 연발하며 안도했고 길 가면서 정말 지겨울 정도로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었다.  


호날도는 몇 발자국 걷지 않고 자꾸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고 핸드폰으로 똑같은 풍경을 찍고 또 찍었다. 내가 보기엔 아까 풍경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하나 없는데 호날도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수시로 사진을 찍었고 어메이징, 비유티풀, 나이스.. 를 백만 번쯤 외쳤다. 매일 보던 화살표 표식, 특이할 것 하나 없는 나무, 땅바닥에 벌레, 돌, 하늘, 구름, 심지어 소똥까지 정성스레 카메라에 담느라 열 발자국쯤 걷고 다시 서기를 반복하는데.. 어느 세월에 20킬로를 가려고 저러는지 싶었다. 먼저 가겠다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크리스티나, 여기 좀 봐, 저기 좀 봐, 너무 멋지지 라며 자꾸 말을 시키고, 셀카를 함께 찍자고 하는 통에 도저히 놓고 갈 수가 없었다. 세상에 처음 온 신생아 같은 순수한 눈을 가졌다 한들 이렇게까지 모든 것들에 감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가 물었다. "넌 까미노에서 콜롬비아 사람 만난 적 있어?"

아니. 네가 길에서 처음 보는 콜롬비아 사람이야.라고 대답하고 나서 나도 똑같이 물었다. 길에서 한국 사람 만난 적 있느냐고. 물으면서 아차 호날도 오늘 사리아에서 막 출발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질문도 되게 성의 없이 한다 생각했을 텐데... 그의 대답에 약간 뭉클해졌다.

"네가 까미노에서 만난 내 첫 번째 친구야." 

첫 번째 친구라니.. 유치원 때 처음 사귄 친구를 엄마한테 소개하는 것 같이 해맑은 표정이었다. 워낙 라티노에게 친구란 개념은 우리의 친구보다 더 흔하게 쓸 수 있는 용어일지 모르나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뭔가 따뜻함이 느껴져서 정겨웠다.


이후에 나는 호날도를 두어 번 더 마주치고 볼 수가 없었는데 잘 아는 한국인 언니 오빠 부부를 만나 이 친구 소식을 들었다. 콜롬비아 애가 크리스티나 어딨냐고 그렇게 찾았다고. 같은 한국인이니까 물어본 모양인데 그렇게 내 친구... 내 친구... 하며 이야기하더라 했다. 마음이 짠했다. 난 사실 까미노 길 초반에 만난 사람들이 아니고선 후반부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기도 해서 한 명 한 명을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처음처럼 상대를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호날도에게는 내가 까미노 길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처럼.. 그런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을까.. 길에서 서로 안부도 묻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호날도, 내가 찍은 그의 사진은 이 한 장이 유일하다.


 

나는 호날도에게서 이 길을 처음 들어섰을 때의 나를 보았다. 생장에서 처음 출발하면서 모든 것이 낯설 때 두근대던 설렘으로..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며 작은 것도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내 모습을 이 친구에게서 볼 수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나도 이 친구처럼 별 거 아닌 일에도 감탄했고, 사진도 자주 찍었다. 지금까지 700km 이상을 걸었기에 800km까지 남은 거리는 뭐 그냥 다 왔네 정도로 느끼는 나에게 100km를 이제 막 시작하여 설레고 있는 호날도는 정말 제대로 나를  돌아보게 했다.






뭐든 시작할 때의 마음을 쉽게 잊게 된다.

새해의 첫 날도, 해의 마지막 날도 크게 다를 것 없는 날들이지만

그 구분의 의미가 나에게 좀 더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특히 올해는 더욱 그랬으면 한다.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느낌보다는... 그 날이 또 그날 같아지겠지만

그럴 때마다 난 콜롬비아 청년을 떠올리며..

조금 낯설게 보고, 많이 감탄하고, 감사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한 해를 어찌하든 잘 살아내고 싶다.




별 것 없는 새해를 그래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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