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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Jan 05. 2017

산티아고 길 위에서(6)

그 여섯 번째 이야기,  '일본'에 대하여.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국적은 참 다양하다.

당연히 스페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인접한 나라나 여타 유럽지역 사람들이 많은 편이고 미국이나 캐나다, 남미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본다. 특히 파울로 코엘료의 영향인지 브라질 사람들을 길에서 자주 마주쳤다. 그들 중 상당 수가 브라질 국기를 가방이나 소지품 어딘가에는 달고 있었기에 묻지 않아도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유독 자주 본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하여 산티아고 길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도 한국인이 왜 이렇게 많이 오느냐 였다. 근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 길을 동네 마실 나오 듯 편하게 오지만 그 멀리서 하필 왜?라는 궁금증은 나 같아도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도 왜 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이 길이 여기저기 많이 소개되기도 했고, 이 길을 걷고 온 서명숙 씨가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들고.. 이러면서 국내에 걷기 붐이 조성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영화도 하나 개봉했고... 뭐 그때마다 생각나는 걸 아무거나 말했었다. 그런데 몇 번을 대답하며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사회가 좀 아파서 그럴 것 같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대답이었을까 싶었다. 우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좁은 땅덩이 안에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안정된 노후를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체면문화는 또 오죽 강해서 곧 죽어도 남들 보기에 그럴듯해야 하고 또 그 속에서 끊임없이 괜찮은 척하다가 정작 자신이 뭘 좋아하는 지도 잊고 살게 된다. 그러니 이런 것들로부터 잠시라도 떠나 위로받고.. 지친 마음을 달래고.. 가식을 떨친 나를 좀 보고 싶어서 오기도 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학연 지연을 찾는 분들을 보며 꼭 다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싶었다.  



Arzua에서 출발하여 가는 길에는 순례자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곳이 있다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인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건 아무래도 일본 사람들이다. 대만 사람들도 의외로 3명이나 만났지만 내가 길에서 자주 본 사람들은 주로 '20-30대의 일본 여성'이었다. 왜 젊은 일본 남자는 많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남자의 경우 절대다수가 은퇴하신 아저씨였다.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일본 사람은.. 여정 초반 피자집이 문 닫는 바람에 같이 굶어 죽을 뻔했던 일본 여자 S와 페이스가 비슷해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같은 그룹에서 걷고 헤어지길 반복했던 일본 여자 Y, 그리고 베드 버그에 물린 후 나에게 한동안 여러모로 의지했던 일본 여자 M, 그리고 사모스 수도원부터 나를 과도하게 챙겨주시던 일본인 아저씨 K 정도다.


그들을 만나면.. 보통 나는 내가 경험한 일본에 대해 그들은 그들이 아는 한국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함께 하지 않는, 단둘이 하는 식사 자리에서는 공감대 형성을 위해 뭐라도 이야기해야 했기에 주로 상대방 나라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동원하게 된다. 그러면 공통의 주제가 없어 어색하다가도 금세 화기애애해지며 거기서 이야기가 또 시작된다.


한 사람이 전체 국민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이미지가 그 사람 같이 각인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의 경험은 미천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단편적인 것으로 때론 전체를 그러려니 바라보는.. 그런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작은 창으로 세상을 보고 산다. 그 너머를 그저 짐작하며.



내가 아는 일본에 대한 경험도 단편적이고 미천한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할 이야기가 떨어지면 일본 여자 M이 딱 한번 들러 본 명동을 계속 이야기하듯 나도 별거 없는 이야기를 수차례 우려먹었다.


 


난 일본의 K대학에 두 차례 가본 적이 있다. (물론 학교 안에 들어앉아 있는 시간보다 그 외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 첫 번째는 대학원 첫 학기에 아무 생각 없이 수강한 한. 중. 일 원격 수업의 일환으로 그곳에 갔고, 중국 여인들의 기에 눌리면서 말도 안 되는 토론 아닌 토론을 하다가 왔다. 두 번째는 두 학기나 더 흐른 후에 학부생을 데리고(P 교수님은 나에게 잘 데리고 가라고 당부하셨지만 그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했다) 이름만 거창한 뭔 심포지엄이라 하여 갔지만.. 더 말도 안 되는 발표 아닌 발표를 하고 왔었다.


이후 P 교수님께서는 여러 차례나 학부생들 보는데 부끄럽지도 않으냐며 새털처럼 가벼웠던 발표 내용을 지적하셨지만 겉으로는 뉘우치는 표정을 하며 뻔뻔스럽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원래 이 수업 자체가 친교의 장으로서의 목적이 큰 것이다 라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학교 안이 어떻게 생겼던가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친교’의 목적으로 방문했던 곳곳의 이미지와 추억은 단편적인 것이나마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나의 일본 체험기(K대학 구경한 이야기, 도쿄 싸돌아 다닌 이야기..)는 까미노에서 만난 일본인들에게는 그리 흥미로운 것이 못 되었다. 그저 마지못해 아.. 아.. 하면서 친절하게 들어주었지만 내게 그들의 명동이야기가 그렇듯 막 재미난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첫 학기에 그 대학의 S군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있노라고... 이야기할 때는 무한한 관심을 보이며 즐거워했다. 이건 내가 자랑하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남자들이 대체로 shy 하다고... (이건 여자 Y의 생각이다. Y는 이 길에 젊은 일본 남자가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나이엔 돈 버느라 바빠서 없단다.) 하길래, 이런 케이스도 있노라 설명하다가 나온 에피소드였다.


 


그 문제의 편지는 마치 딱 맞춘 듯 내 생일날에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집으로 온 이유는... 명함에 집주소를 썼기 때문이다. 일본에 간다고 명함을 만들라기에 학교 복사집에서 준 시안에 내 정보를 꼼꼼히 기재해서 드렸다. 그런데 난생처음 명함을 만들어 보는 거라.. 학교명 밑에 주소까지 우리 집 주소로 친절히 바꿔서 드렸는데 그걸 또 고대로 인쇄하여 주셨다. 다들 학교가 니네 집이냐라고 한 소리씩 했다. 그리고 편지가 배달 온 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지만 엠티 날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우체함에서 집어 들고 곧장 학우들이 모여있는 집결지로 갔고, 기차에서 다들 돌려가며 편지를 읽었다. 여러 가지 황당한 내용이 난무했지만, 그중 압권은 네가 없는 이곳은 'empty city'라는 충격적인 구절이었다. 아마 딴 사람이랑 나랑 착각해서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눠 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적인? 이야기조차 별로 나눠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매주 수업자료를 주고받느라 메신저에서 만났던 다른 S군이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엄청 설렜겠지만 이건 뭐 너무나 난데없는 일이었다. 윗 학기 오빠는 완전 미친놈이라 했고 설마 답장 쓸 거냐며 웃었다. 그렇구나 난 미친놈에게서 편지를 받았던 거였어... 씁쓸했다.




일명 산티아고 케익, 달달한 이 케익도 그리 달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있듯 우리의 기억도 씁쓸하게 남는 경우도 있다.



일본 여자 Y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여전히 일본 남자가 shy 하기에 편지를 쓴 것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여자 M은 결코 shy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며 나쁜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닌데도 일본 남자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는 선입견일 뿐이고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했다. 나는 좋고 나쁘고를 이야기한 것이 전혀 아닌데... 그녀와 나 사이에는 언어장벽이 생각의 차이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서로가 이상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다른 기억 하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분위기 좋은데 괜히 슬퍼질 것 같아서였다.


 


나의 마지막 일본에 대한 기억은 엄마와의 여행이었다.


엄마와 가는 여행인 만큼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료칸을 예약하였고 2박 3일 일정으로 큐슈로 향했다. 엄마는 그 당시 머리도 아프고 좀 힘들어하셨는데 그 여행에서 모든 것이 치유된 듯 너무나 행복해하셨다.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이후에 다른 여행도 가긴 했지만 엄마는 유독 이때 갔던 일본 여행을 잊지 못하셨고 자주 그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엄마가 치료로 마음이 불안해질 때나 많이 힘들 때.. 엄마 옆에 누워 그때 일을 같이 상상해 보자고 했다. 왠지 그 날의 기억들이 엄마에게 다시 생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다시 여행 갈 생각을 하며 벌떡 일어날 것 같아서였다.


그때 우리가 예약한 방 뒤로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아늑하게 들렸다. 6월 규슈의 여름은 꽤 더웠는데 목조로 지어진 료칸 건물 안에서는 에어컨을 안 틀어도 제법 서늘했다. 창문을 열고 마당을 내려다보면 닭장이 하나 있었는데 닭은 (이른 새벽에만 운다고 알고 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그래도 이 닭이 열심히 알을 낳아 준 덕분에 우리는 매일 간식으로 신선한 달걀을.. 삶은 고구마, 차와 함께 먹었다. 우리 방이 있는 독채 건물을 나와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있었고 엄마와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오랫동안 거기에 들어 누워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호호 떠들었다. 샤워 후 유카타를 입고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나막신을 삐그덕거리며 끌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 덕에 기분마저 상쾌했다. 엄마는 공항에서 오면서 들었던 성시경의 거리에서가 계속 기억에 남는지 그 노래를 자꾸 흥얼거렸다.





저녁에는 닭 대신 개구리가 울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시끄럽다기보다 정겹게 들렸다. 기분까지 좋아지는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침구는 일본 아주머니가 들어와 매일 밤 경건한 의식을 치르 듯 꽤 오랫동안 정성스레 깔아주고 가셨다. 나이도 많으신데 무릎까지 꿇고 매번 서빙을 해주시는 통에 내가 뭐라도 도와야 할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도 료칸 문화겠거니 하고 조용히 구석에 서 있었다. 스미마셍 하며 여러 차례 들어오셔서 우리를 챙겨주시는 덕에 문이 열릴 때마다 이번엔 또 뭘까를 생각하며 엄마와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엄마는 대화도 안 통하지만 매번 아주머니에게 눈을 맞추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집에 갈 때는 두 분이 손을 마주 잡고 한동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기도 했다.


엄마는 2박 3일 일정을 아쉬워했고 나는 또 오면 되지 뭘 그러냐며 다시 올 것을 약속했었다. 이런 기회가 여러 번 다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일본에서 소녀처럼 웃던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더 이상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산티아고 길 이후 찾은 포르투(Porto), 엄마 당신은 이제 저 새처럼 아무 걱정 없이 훨훨 날고 계신가요.



일본 여자 Y에게 다른 설명 없이 일본에서 찍은 엄마 사진을 보여줬다.

Y는 우리 엄마가 이쁘다고 했다.


그지.. 우리 엄마..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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