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편 3/ 쿠반 살사> 즐겁게 하는 게 중요해!
자유롭게 움직여, 물결처럼.
쿠바 춤은 노예의 춤이야. 그들은 자유로울 때만 춤을 췄어. 수천만 리 떠나와 잡혀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 춤은 그 순간 자신의 표현이야.
영화 '더티 댄싱 하바나 나이트' 中
쿠바를 이야기하면서 춤과 음악을 빼놓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체 게바라만큼이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살사를 함께 떠올린다. 그들에게 춤과 음악은 의식주의 해결만큼이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자 문화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춤을 추기 시작한 사람들처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일이 아주 자연스럽다. 그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음악이 몸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드는데 이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배워서 될 게 아니야 하는 남다름이 있다. 사실 관광지치곤 인프라가 취약한 쿠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도 그들의 춤이고, 음악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문화가 아닐까.
그래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중에서는 쿠반 살사를 배우거나 적어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까닭에 살사 강습소도 쉽게 찾을 수 있고, 굳이 배우러 어딜 가지 않는다 해도 현지인에게 배울 기회도 충분히 많다.
나에게 살사는 당연히 자연스럽지 않다. 춤은 남이 추는 걸 보는 거지 내가 추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하기에 가끔 배울 기회가 있으면 어째 어째 따라는 하지만 흉내 내는 수준의 초보적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내가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춤을 추던 상관없이 마치 고등학교 때 무용 시간(우리 고등학교는 2학년 때 체육 대신 난데없이 무용을 했다.)처럼 이내 재미가 없어지고 내신관리라는 미명 하에 줄곧 엄숙해진다. 살사는 지난해 처음으로 아주 조금 접해 보긴 했지만 베이직 스텝을 가지고 그저 끄는 대로 미는 대로 왔다 갔다 하다 말았다.
이런 비루한 실력으로 쿠바를 가기엔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몬트리올에 있을 때 용기 내서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했었다. 거기 선생님은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는데 오랜 지도 경력을 가지고 계셨고 엄청난 열정의 소유자셨다.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것들을 알려주셨다.
처음에 왜 본인한테 수업을 신청했냐고 하셔서 소박한 나의 꿈을 말했다. 난 곧 쿠바에 가는데 그들 사이에서 쭈구리가 안 되고 적어도 즐겁게 춤을 추고 오고 싶다고. 그런데 선생님의 첫마디가 이거였다.
"내가 너를 살사 퀸으로 만들어 주겠다." 정말 이렇게 말했다!
사기꾼은 아니고ㅋ 그만큼 말도 안 되는 긍정 에너지와 활기로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능력이 있으시다. 비록 선생님의 바람은 실현이 안 되었지만 무한 긍정과 칭찬의 힘으로 자신감 하나는 최고로 얻었다. 실수하기 싫어하거나 완벽하려는 생각은 초보자에게 독이기 때문에 일단 즐겁게 하라고 조언해 주셨다. 이 말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선생님은 모를 거다.
그러나 쿠바에 도착하여 쿠바노들의 태생적으로 자연스러운 리듬감과 현란한 움직임을 보니 나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현지인들을 알게 되고,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춤을 같이 출 기회들이 종종 생겼다.
한 번은 트리니다드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하고자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정말 춤을 잘 출 뿐만 아니라 '너무나 즐겁게' 췄다. 그 바이브가 전달이 되니 상대방도 안 즐거울 수가 없다.
춤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그 친구들은 이랬다. "내가 뭘 가르쳐. 그냥 같이 추는 거지."
내 하찮은 동작들을 보고도 (포기했는지) 별로 지적하지도 않는다. 즐겁게 하라고 충분히 내 공간을 만들어주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칭찬한다. 아르헨티나 선생님이 오신 줄 알았다. 그래서 난 내가 되게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당연히 그건 아니었고, 한참 즐겁게 추고 난 이후에 이렇게 해보자고 조언해 준다.
사실 난 어렸을 때부터 실수에 관대한 분위기에서 자라지 않아서인지(잘하는 건 당연한데 못하면 당연하지 않은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뭔가 내가 잘하지 못하는 분야에 도전해서 실수하는 걸 끔찍이도 두려워한다. 새로운 걸 할 때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난 새로운 걸 알고 싶은 열망은 참 강하다. 한 친구는 나한테 그랬다. 그냥 가만히 걸으면 쉬운 길인데 넌 자꾸 이리저리 가보려고 한다고.
여하간 이게 뭐라고 춤을 배우면서도 모자란 나를 더 잘 알게 되기도 하고, 새로 발견한 내가 좋기도 하다. 쓸데없이 진지하고 엄숙할 필요가 없기에 원래 나답게 유치하고 유쾌해진다. 난 이 친구들 덕분에 단순히 테크닉을 배워서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음악을 듣고 본인이 즐기는 게 먼저라는 걸 배웠다. 고맙다 친구들!
춤과 관련하여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이 있다. 잘 추는 사람들을 보고 감탄한 이야기가 아니다. 잘 추는 사람은 하도 많아서 그렇게 인상적이지도 않다.
그중 하나는 트리니다드 한 바에서 혼자 너무나 즐겁게 춤을 추던 한국인 동생이다.
그날 함께 갔던 한국인들 중 거의 가장 어렸던 것 같은데 중요한 사실은 이 친구가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거다. 살사는 배워 본 적도 없고 춤을 잘 추는 타입의 사람도 아닌데 한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정말 '혼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보통 살사는 남자가 리드를 하기에 배우지 않은 남자들은 그냥 보고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는 과감하게 무리 사이에 들어가 당당히 '혼자' 본인 기분에 맞게 정체불명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그 친구 멋지다고 진심으로 칭찬했던 것 같다(외모가 멋진 게 아니고). 아무도 춤을 신청하지 않으면 어떤가. 본인이 저렇게 즐거운데.
'니가 짱이다'
또 하나는 아르헨티나 친구 과달루페!
그러고 보면 여행 중에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몇 명 만났었는데 그중 가장 친해진 친구다.
이 친구는 트리니다드에서 알게 되었는데 위에 살사 대회 출전자를 소개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와 성격은 다르지만 신기하게 깊이 있는 대화마저 잘 통하는 친구였다.
여기 오기 전, 사실 나에겐 심리적 충격이 한 차례 있었다. 아바나 숙소에서 캐나다 달러 육백 불이 없어졌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밖에 의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한테 날치기라도 당했으면 화나고 억울한 감정만 있겠지만, 나에게 그렇게 웃고 잘해주던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속상하고 싫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 길어지니 잠깐 생략하고. 이 상황에 스페인어를 모르니 대화에 한계가 있고, 정말 답답한 나날이 있었다.
그리하여 트리니다드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감정 상태가 저 밑으로 한없이 다운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만난 좋은 친구 중 하나가 이 친구인데 흥이 많고 춤을 좋아하지만 또 진지할 때는 한없이 진지할 수 있는 친구다. 그녀는 트리니다드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밤 살사를 추러 다녔는데 하루는 나와 함께 카사 데 라 뮤지카(Casa de la Musica)에 있었다. 거기는 관광객들이 한 번쯤 가보는 야외무대인데 다른데도 그렇듯 공연팀은 공연하고 아래에서 춤출 사람은 자유롭게 춤을 춘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인상적인 장면 두 번째다!
보통 남자들이 와서 춤을 신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친구의 경우는 달랐다. 우선 계단 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한동안 무대를 관망한다. 아주 여유 있는 자세로. 그러더니 어느 순간 다녀오겠다면서 큰 걸음으로 펄쩍펄쩍 뛰어 내려간다. 아니 누가 춤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왜 저러고 나가나 싶었는데,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서 모히또 먹는 남자한테 느닷없이 가서 손을 내밀고 있다. 그 남자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춤을 추러 일어선다. 그런데 그렇게 당당하게 나간 그녀... 생각보다 그다지 춤을 잘 추지 못한다. 이런 반전이. 아마 잘 췄다면 그토록 인상적이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 친구 너무나 즐겁게 방방 뛰어다니며 한 곡을 다 추고 들어오는 거다.
쿨하게 들어오더니 너도 나가라고 나를 민다. 앉아 있을 거면 뭐하러 왔냐고. 이 친구 덕분에 자신감이 생겨 나갈 수 있었다.
카사 데 라 뮤지카,
늘 그렇듯 음악이 방방 울리고, 공연팀은 무대에서 준비된 공연을 열심히 한다. 사람들은 웃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음악과 사람들의 소리가 이 작은 동네를 가득 채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음악도 멈췄고, 조명도 꺼지고 그야말로 고요한 암흑이다.
정전이 된 것이다. (내가 트리니다드에 있는 2주 동안 이 동네 전체가 정전이 된 것이 서너 차례 정도 된다. 대체로 삼십 분 안에 금세 복구가 되긴 했다) 춤을 추던 사람들도 계단에 앉아 무대를 감상하던 사람들도 놀라서 웅성거렸다. 그런데 암흑이 된 그 순간, 하늘의 수많은 별이 일제히 나타났다. 드문드문 보이던 별들이 암흑이 되니 머리 위에서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 좀 봐" 누군가 말했다.
'아-'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과달루페와 난 한동안 말없이 하늘의 별을 바라봤다.
정말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