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없었다. 그냥 어디라도 떠나고 싶었다. 아무런 의욕이 없고 답답했다. 딸아이를 낳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삶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결혼과 출산’으로 생긴 부자유함이 나를 짓눌렀다. 마음의 병이 점점 깊어질수록 남편에 대한 원망이 커져만 갔다.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는 나의 마음 따윈 배려받지 못하는 듯했다.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남편’과 출산으로 집에만 갇혀 있게 된 ‘나’ 사이에는 더욱 단단한 벽이 생겨만 갔다.
딸아이가 갓 두 돌이 된 겨울 한날, 잊고 있던 사진첩을 열었다. 불과 오 년 전 사진이다. 파리의 센 강을 뒤로하고 마치 파리지엥인 양 한껏 멋을 부리고 서 있는 그녀가, 눈물 나게 부러웠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을 때를 뽑으라면 그 사진 속 ‘나’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외로워도 자유로움이 좋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학창 시절을 벗어난 것으로 행복했다. 이십 대에 파리에서보낸 삼 년이라는 시간은 달콤했다. 그런데 결혼이 또다시 나를 답답하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어린 시절과상황은 달랐지만, 그저 나를 자책하고 절망하고 그리고 외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어린 딸이옆에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대소변도 못 가리는 아이를 데리고 어딜 가냐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떠나고 싶었다.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혼자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떠나고 싶었다.
어디선가 다시 용기가 생겼다. 마음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나 아닌가. 세 살 딸아이와 떠난 첫 여행지는 인도네시아 빈탄이었다. 그리 멀지도 않고 리조트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아이와 놀아주어야 하는 의무는 있었지만 그래도 집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수채 색연필로 스케치(26×36)
예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을 떠나니 복잡하고 불편하던 마음들이 잊혀졌다. 생각이 단순해졌다. 식사 때가 되면 리조트에서 맛나게 밥을 먹었다. 내리꽂는 자외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지치면 썬 베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단순함을 달래주는 특별한 이벤트도 있었다. 매일 오후 검게 그을린 에어로빅 강사의 신나는 멘트에 맞춰 체조를 했다. 아니, 춤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사람들은 물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강사의 몸짓을 따라 하고 있었다. 딸은 중심 잡기도 쉽지 않은 몸으로 춤을 따라 추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깔깔거린다. 넘어져서 물이라도 먹지 않을까 나는 잔뜩 긴장한다. 한바탕 소음이 멈추자 외국 사람들이 딸에게 다가온다. 이름도 물어보고 악수도 청한다. 딸은 사람들의 모습과 언어가 다른 환경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리조트를 즐긴다. 온종일 물속에 있어도 지치지 않는다. 건강하게 태어나서 특별히 아픈 곳 없이 자라준 것이, 여행을 오니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음식도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니 비로소어디든 같이 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수중 에어로빅에 열중하다(2005년)
하지만 딱 하나가 신경 쓰였다. 어쩌다 만나는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보통 리조트는 가족여행으로 많이 오는데 나는 딸아이와 단둘이니 사람들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진다. 내가 먼저 나서서 “아빠는 바빠서 못 왔어요.”라고 말하면 이내 사람들이 안도의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십오년이 넘는 여행기간 내내 이 물음표에 답을 해야 했다. 여행이 꼭 가족 모두 함께 가야만 하는 거라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다. 원하는 기간에 원하는 장소로 훌쩍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아이와 함께, 때로는 가족 모두 떠나보면 여행이 한결 다채롭고 재미나다는 걸 알게 된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용기 내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가슴속을 켜켜이 쌓고 있는 딸아이와의 진한 추억은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고들 말한다.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 성인이 된 딸을 보면서 오늘도 절실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