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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 Aug 15. 2022

'힐링’에 대하여

딸을 위한 위로 여행-유후인, 일본


일본 온천여행을 계획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너무 추운 곳에서 지내다 온 딸아이의 몸을 녹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딸이 살고 있는 미국 북동부 지역은 3월이 지나도 겨울 외투를 벗을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이다. 몸만 추운 게 아니라 아직도 적응 중인 유학생활로 마음이 꽁꽁 얼어서 하루하루를 고단해하고 있었다.

짧은 성탄절 방학이라지만, 한국에 오면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어보자 계획했다.

여행 준비부터 온전히 나의 마음을 담았다. 온천지역으로 잘 알려진 곳, 규슈지역 ‘유후인’이 마음에 끌렸다. 고급스러운 료칸에서 단 하루라도 머물러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고민 끝에, 딸을 위한 여행이니 과감하게 원하던 곳을 예약했다. 료칸은 단순한 숙박시설이라기보다는 일본인의 전통과 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적 의미가 크다. 딸에게 이왕이면 일본 문화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일본 전통식 코스 요리로 제공되는 가이세키 요리를 맛본다는 것과 더불어 ‘프라이빗(private) 온천’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후쿠오카 국제공항에서 ‘유후인’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온천지역은 한겨울이 성수기라서 버스는 만석이었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나라 고속도로 풍경과 비슷했다. 일본 여행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와 가까우면서도 비슷한 풍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 사람들의 친절함과 청결은 높이 사고 싶을 정도이다. 그들의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친절하니까 여행객으로서는 기분 나쁠 리 없고, 작은 호텔일지라도 조금의 먼지도 허락지 않는 위생상태는 일본을 갈 때마다 경이로울 정도이다.

 

버스로 두 시간을 달려 유후인에 도착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마을이, 딸의 첫 유학생활에서의 맘고생을 달래주는 듯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기차역 맞은편에 유후다케산이 우리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우리가 묵을 ‘잇코텐’은 한적한 마을에서도 택시로 5분 정도 걸리는 깊은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후다케산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으로 숙소에 과소비를 한 만큼 기대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니 직원이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차 문까지 열어주는 택시 기사님의 친절함에 감동하고, 호텔 직원과 기사님이 서로 우리 캐리어를 챙겨주려고 하는 친절함에 다시 감동이 되었다. 하늘까지 닿을 것만 같은 삼나무가 숙소 둘레로 쭉쭉 뻗어있었다. 딸의 유학으로 몇 개월간 가슴 졸이며 보냈는데, 이곳에 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까지 시원하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각각의 건물을 둘러보았다. 건물들 사이로 아기자기한 돌길이 연결되어 있고 중앙에는 정성스레 가꾸어 놓은 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작은 도서관 건물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책과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넓은 부지에 별채는 단 여덟 채뿐이었다. 하루에 여덟 팀만을 위한 숙소여서 사람들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유후다케산이 바라다보이고 나무들로 둘러싸인 이층짜리 집 한 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별채에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었다.

                                                 힐링이 되어준 공간(2017년)

 

딸은 비행과 시차로 많이 지쳐있었다. 별채에 들어와서 무엇보다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노천탕에 몸을 담그는 거였다. 12월의 한 겨울이라 바깥 기온은 몹시 차가웠다. 발끝부터 서서히 물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40도가 넘는 물 온도가 온몸을 데우기에 충분했다. 머리끝부터 땀이 줄줄 흐른다. 반면 코끝으로 흡입되는 차디찬 공기에는 풀냄새 나무냄새가 섞여 있었다. 귓가를 스치는 풀벌레 소리는 멋진 음악이 되어준다. 코가 뻥 뚫린다. 프라이빗 온천은 정말 최고였다. 어느 각도에서도 프라이빗한 우리의 온천탕이 노출되지 않는다는 직원의 설명을 굳게 믿고, 실내와 외부를 차단하는 가름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자연이 우리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머리는 차고 가슴은 뜨거웠다. 딸은, 몸이 릴랙스 되니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염없이 쏟아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힐링’이 무엇인지 조금씩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유후다케산이 보이는 숙소에서(2017년)

단지 하룻밤만 주어지는 호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석식이었다. 오롯이 딸과 나만을 위한 맞춤 음식 같았다. 그날의 가장 좋은 재료들로 최고의 요리사가 선사하는 음식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나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일식이었다. 플레이팅이 너무 예뻐서 음식을 입으로 먹는지, 눈으로 먹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먹고 감각하는 일들로 오늘 하루가 저물어갔다. 쏟아질 듯 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밤 온천을 즐겼다.

                    '잇코텐'에서 제공된 가이세키 요리(2017년)

 

나는 자연에 대한 감탄에 돌입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차라리 인간에 의해 완성된 것에 대한 경외심이 훨씬 많았다.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건축, 미술, 문명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오랜 기간 유럽을 여행하며 그것에 큰 매력을 느꼈었다. 딸에게도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에 커다란 학습효과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여러 해 전 북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딸아이는 북유럽이 좋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내 생각에는 아이들에게 눈요깃거리가 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자작나무 숲을 걷거나 넓은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한적한 공원을 걷는 것이 여행의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은 딸에게 다시 북유럽을 가고 싶다는 소망을 불러일으켰다.

딸이 나와 비슷하게 온천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번 여행에 약간의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온천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라는 테마가 있었다.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완벽한 자연 속에서 즐기는 온천이란 그간의 걱정과 두려움, 아픔을 씻어주기가 충분했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여행을 경험하고 있었다.

온천과 자연을 즐기며 딸아이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매 순간이 궁금하지만 전화로 자세히 알 수 없었던 이야기, 어차피 함께 있지 않으니 말해도 해결해 줄 수 없어 혼자 감내해야 했던 이야기, 그런 일상을 다 듣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엄마로서 말해주고 싶지만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딸은 나의 마음을 아는 것 같았다. 딸아이도 자신의 힘듦을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딸아이가 한국에 돌아오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내 욕심이 내려졌다. 온천에서 우리의 몸이 녹아지듯 서로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점점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딸과 엄마로서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고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예전처럼 더 이상 딸아이의 해결사가 될 수 없다.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고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음이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어차피 스스로 한 번은 겪어내야 함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딸아이와 나는 알고 있었다.

                             종이에 파스텔로 스케치(26×36센티미터)

 

여행은 언제나처럼 우리의 경계를 허문다. 프라이빗 온천에서 유후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걱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물에 담근 몸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만큼 차가웠던 마음이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현실에서 더 팍팍해질수록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또 하나 알아간다. 자연은 그렇다. 우리 마음의 치료제이다. 잠시 잊고 있었던 북유럽의 여행이 유후인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은, 자연과 교감했던 것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백 마디의 말보다 값진 위로를 준다. 유후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힐링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딸은 상처가 아물어가듯 몸과 마음이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여행노트에서 꺼낸 추억 이야기 4.

                           -2017년 열다섯 살이던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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