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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Jan 17. 2020

헤브론의 이방인들 [1]

뜻밖의 세계, 팔레스타인 1부 ①

   

“잠시 후 저희 비행기는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2019년 8월 13일 나는 이스라엘 텔아비브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목적지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전역이었지만, 회사에는 이스라엘에 간다고 둘러댔다. 팔레스타인에 가려면 이스라엘 벤구리온 국제공항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이미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비행기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춰 스마트폰을 열자 달갑지 않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서안지구는 특별여행주의보(철수권고) 발령….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지속, 위험지역 방문자제, 다중밀집지역 신변안전 유의.”


벤구리온 공항의 입·출국 절차는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입국장에서 공항 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이스라엘 방문 목적이 뭐죠?”


“성지순례를 가려고요.”


“어디에 갈 거죠?”


예루살렘이요(그리고 팔레스타인도, 물론  말은 하지 않았다).”


사진=김양균의 코드블랙


도장이 쾅. 통과였다. 사람들이 붐벼 입국 심사는 금방 끝났다. 나 말고도 한국인 여행자들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 성지 순례자였다. 내심 히죽이며 그냥저냥 잘 끝났다고 여겼다. 착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출국 심사는 몇 곱절 더 까다로웠다. 내 경우는 세 시간 가까이 걸렸다.


한 시간을 더 달려 팔리스타인 서안지구 베들레헴 모처의 숙소로 이동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서자 체크포인트(검문소)가 나타났다. 나는 우리나라의 톨게이트 정도로 여기며 창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여권을 꺼내라”는 낮고 굵은 목소리. 퍼뜩 놀라 돌아보자, 운전사(그는 이스라엘 거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인이었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여권의 ‘대한민국’이 잘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이 차 안을 스윽 살폈다. 그는 얼굴색과 머리색이 다른 나를 보고는 고개를 까딱하며 통과 신호를 보냈다. 눈빛에 약간 짜증이 섞여 있었다. 다시 차는 팔레스타인의 이름 모를 언덕을 내달렸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둘 사이의 대화도 없었다. 나의 짧은 영어 실력 탓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공통의 화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나는 악수를 청했다. 사내는 씩 웃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곤 이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의 손은 부드러웠다. 긴장이 풀린 난 일행과 만나 술 몇 잔을 들이켠 후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사진=김양균의 코드블랙


이튿날.


눈을 떠보니 이미 해가 밝았다. 잠결에 노랫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까이 있던 모스크로부터 들려온 기도소리였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한국에 돌아온 후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종종 그 이국적 음률을 떠올렸다.


팔레스타인 각지로 이동하려면 대중교통보단 차를 빌리는 것이 편하다. 여정을 총괄한 셀림(사단법인 아디 팀장)은 운전사 ‘니달’을 고용했다. 니달은 에어컨이 고장 난 노란색 봉고차를 끌고 나타났다. 그도 노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잘 손질된 수염과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아무리 세찬 바람에도 요동치지 않았다. 나는 종종 그를 ‘나달’로 헷갈려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사진=김양균의 코드블랙


헤브론


첫 여정은 헤브론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지구 남부에 위치해 있다. 헤브론은 약 20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다. 고대로부터 번성해온 이곳은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모두의 성지다. 그러나 과거의 번화는 온데간데없다. 헤브론 올드시티는 적막함과 긴장감이 함께 들어 기묘함마저 느껴졌다. 갈등의 진원지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유대 정착촌이다.


피점령지에 점령국 주민 이주는 제4차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불법행위로 규정된다. 때문에 헤브론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 내 곳곳에 조성됐거나, 진행 중인 유대정착촌의 앞에는 ‘불법’이란 말이 붙는다. 이스라엘은, 그러나 그들의 뿌리라 여기는 ‘아브라함의 땅’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헤브론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요르단의 영토였지만,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6일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후 이스라엘에 점령됐다. 이후 이곳에는 유대 정착촌이 건설됐다.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이었다. 1980년 유대인이 6명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1994년에는 팔레스타인인 29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을 입었다.


1995년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관할이 되었지만, 2년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헤브론 협정을 맺고 만다. 조약에 따라 헤브론은 H1, H2의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H1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H2는 유대인 거주 구역으로 지정된 것이다. H2에는 구도심지와 이브라힘 사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주민은 12만 명인데 반해 유대인 정착민은 450명에 불과했다. H2 지역조차 팔레스타인 주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진=김양균의 코드블랙


한참을 걷다 보니 주변이 급격히 한산해짐을 깨달았다. H2 지역과 가까워지자 도처에 부서진 건물이 즐비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유대 정착민과 원거주민(팔레스타인인) 사이의 긴장이 남긴 흔적이었다.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원래 살던 이들은 쫓겨나거나 생계 곤란으로 이곳을 등지고 떠났다. 이스라엘 당국은 원 거주민인 팔레스타인인에게 재산권 증명을 요구, 이를 증명치 못하면 재산을 몰수했다. 재산 증명을 위해서는 적잖은 비용과 까다로운 과정과 시일이 소요됐다. 내가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조치가 처음부터 거주민을 몰아내기 위한 의도였다고 주장했다.


갑자기 들고 있던 카메라 안으로 낯선 소년의 얼굴이 훅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해 땀을 줄줄 흘리고 서 있기만 했다. 아이는 내게 영어와 아랍어를 섞어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헝그리’, ‘헬프’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의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아이의 바람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적선을 위해서든, 물건을 팔기위해서든 도처에서 만난 팔레스타인인은 퍽 호의적이었다. 촬영 중인 나를 보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사진을 찍어달라는 아이들도 부지기수.  


사진=김양균의 코드블랙


점령자는 나가라고 했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의 통행로는 달랐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다. 전통시장 곳곳 H2로 이어지는 통로는 모두 봉쇄돼 있었다. 누군가 페인트로 다음처럼 써놓았다. “Make love, Not walls.” 흡사 폭격이 있었던 듯 부서진 건물이 도처에 즐비했다.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는 악취를 풍겼다. 이날은 ‘이드 알 아드하’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드 알 아드하는 무슬림이 성지순례 이후 갖는 사흘간의 축제기간이지만, 시장에서 축제의 흥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오가 가까워 태양은 작열하는데, 시장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뚫린 천장을 철조망과 판넬 따위로 막아두었기 때문이다. 2002년부터 이스라엘 정착촌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전부터 1층은 상인들이, 2~3층은 이스라엘인이 거주했다. 위층에 사는 이들이 팔레스타인 상인과 행인을 겨냥해 각종 오물을 투척하며 위협하는 통에 천정을 막아둔 것이었다. 녹슨 철조망을 뚫은 햇빛에 먼지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H1을 관통해 다시 H2를 지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 나왔다. 회전 철문을 통해 이스라엘 구역으로 이동하자 기관총을 멘 군인이 출입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척에 ‘알 이브라힘 모스크’가 있었다. 이곳은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모두의 성지다. 이곳은 아담·이브, 아브라함·사라, 이삭·레베카, 야곱·레아의 매장지다. 군인이 기자 일행에게 손짓을 하며 사원 출입을 허락했다. 기자보다 먼저 도착한 한 무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한 명씩 신분증 확인을 하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사원 내부도 일부 막혀 있었다. 과거 기도 중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총기 난사 테러가 벌어져, 상당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이후 취해진 조치였다.


“저기 보이는 선물상점은 팔레스타인인이 운영하는 가게입니다. ‘나가라’는 요구를 받고 있지만 저항하기 위해 끝까지 터전에 머무는 것이죠.”


사원 앞의 자그마한 상점을 가리키며 셀림(사단법인 아디)이 설명했다. 이날 H2 지역에는 전 세계에서 온 유태인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전 세계 유태인 커뮤니티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무리지어 이곳을 방문한다. 그들 주위로 수십 명의 군인이 보였다. ‘보호’를 위해서다. 앞선 팔레스타인 전통시장을 방문할 때도 여행객보다 더 많은 군인이 이스라엘 그들은 호위한다. 흰 모자를 쓰고 “어메이징”을 연발하는 그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자니, 불어 억양이 섞인 한 남성이 다가와 위협적인 어조로 “NO”라고 말했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이곳에는 여전히 일부 팔레스타인 원 거주민이 산다. 앞선 기념품 상점 주인처럼 터전을 지키는 것은 이들에게 주거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의 의미다. 그날 거주민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도처에 널린 텅 빈 건물은 관리되지 않고 방치돼 있었다. 주인 잃은 집터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잡초 사이로 핀 들꽃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황량한 H2 지역을 관통해 철문을 나오자, 갑자기 사방에서 온갖 소음이 날아들었다. 각종 상점과 인파, 차량으로 가득한 팔레스타인 지역이었다. 몇 발자국 걷다 돌아보니 두터운 철문과 돌로 지어진 사격 초소가 위압적이었다. 그 너머는 이상하리만치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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