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의 세월, 목성균「누비처네」
글쓰기 방향 정체성 혼란이 찾아왔다.
그래서 초심을 돌아보기 위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전에 재정비를 하기 위하여.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꺼내본다.
누비처네 저자 목성균, 김종완(해설) 출판 연암서가 발매 2014.02.10.
내 마음에 북두칠성 같은 수필이기에.
이 책에는 내가 추구하는 수필에 방향을 알려주는 좋은 글들이 많이 실려있다. 그중에 오늘 딱 나에게 지팡이 같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신기하다.
쓰고 싶은 글에 대한 방향 재정비
원만한 가정에서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본인이 경험한 이야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수필인데 어떤 방향을 가지고 글을 적을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상처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데 과연 이것을 어떻게 글로 풀어낼 것인가 여기에 여러 가지 갈래가 나뉘겠지만 지금 나를 돌아보니 하소연식 비난적인 글쓰기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래서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독자에게는 피로감만 줄 뿐이다.
그렇다면 수필 쓰기 선생이 반드시 필요한데 예전에 내가 읽고 감동받았던 책에서 다시 그분을 만났다. 분명히 이 책을 읽었지만 아직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고 글쓰기 방향을 다잡으려고 한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도셨다. 그 원인이 나변(那邊)에 있다느니 하며 자식이 분석을 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이따금 아버지가 귀가를 하시면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란을 일으키셨다. 나는 철이 빤한 시절 전운(戰雲)이 감도는 가정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았다. 수시로 밥상이 어머니 치마폭으로 날아왔다. 그 한판 접전은 어머니의 선공으로 시작되어 아버지의 막강한 전세(戰勢)에 짓밟히고 말았다. 일방적으로 당하신 어머니는 한나절쯤 낭자한 곡성으로 지내신 연후, 이제 속이 좀 트인다며 다음 공격 채비를 하시듯 털고 일어나셨다. 싸움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읍내로 나가시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읍내서 또 무슨 행실을 하나 싶어 미움을 키우셨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부부 싸움이 촉발되고, 악순환의 세월이었다. 그만치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악성종양처럼 자랐다. 어머니의 미움은 비단 아버지뿐 아니라 모든 남자에게 적용되었다. 어머니는 구십객이신 지금도 아파트 단지 여자 경로당에 나가셨다가 남자 노인네들이 기웃거리면 사내들 꼴 보기 싫다며 집으로 돌아오신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 여자의 감수성을 성실한 세월의 덧없음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목성균, 「누비처네」, 연암서가, 2014년, 316 페이지
어느 집 부부 싸움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것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에는 그들을 원망하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상황을 약간 해학적으로 이끌어냈다. 마치 링 위에 격투기 두 선수가 주먹과 발차기를 서로 주고받는 듯한 느낌으로. 이런 시선은 작가는 어린 시절 상처가 더 이상 그를 힘들게 하지 않으며 그것을 오히려 글쓰기로 승화시켰다. 이 지점이 내가 본받고 싶은 모습이다.
달 밝은 툇마루에서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그랬듯이 나는 달 밝은 베란다에서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어머니 입에 넣어 드렸다. 돌이킬 수 없이 사그라진 잿불 같은 여자의 세월을 만들어준 남편의 자식 된 도리를 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그러나 어머니는 별 맛 없다고 하셨다. 그 말이 허무하고 슬프게 들렸다.
목성균, 「누비처네」, 연암서가, 2014년, 319 페이지
작가는 어머니가 모성애가 남달랐던 이유를 퇴화된 부부애에 대한 손실보상이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모성애 가득했던 어머니에게 자식 된 도리로 삼겹살 상추를 싸서 정중하게 드렸는데 맛없다고 하니 허무하고 슬프다는 표현이 정말 뭉클하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존경은 한다. (중략) 자식이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아버지도 자식의 존경을 받으면 되었지 간지럽게 사랑까지 바라지는 않으실 것이다.
목성균, 「누비처네」, 연암서가, 2014년, 319 페이지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지만 존경한다. 이런 유머와 여유로움이 묻어있는 글이 정말 멋스럽다.
아버지 시신을 염습할 때, 염습사가 맏상제인 내게 아버지 머리맡에 와서 시신이 움직이지 않게 얼굴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으라고 해서 그리했다. 두 손으로 싸잡은 차가운 두 볼의 피부가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평소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머니께 불같이 화를 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무서워서 운, 유년의 기억 때문이다.
목성균, 「누비처네」, 연암서가, 2014년, 319 페이지
돌아가신 아버지 시신을 염습하면서 작가는 깨달음 하나를 얻는다.
그런데 그때 지척에서 자세히 내려다본
아버지 얼굴은 한없이 평안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살아서 무섭던 얼굴이
죽어서 이렇게 평안하다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목성균, 「누비처네」, 연암서가, 2014년, 319 페이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본질적인 질문이 그에게 던져졌다.
삶이란 업보를 치른 것인가.
연민의 눈물이
차가운 아버지의 미간에 떨어졌다.
목성균, 「누비처네」, 연암서가, 2014년, 319 페이지
그 순간 작가는 눈물이 떨어졌다.
이 글을 읽는 나도 눈물이 떨어진다.
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조만간 어머니도 돌아가실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의 얼굴도
미움을 다 지우고
아버지처럼 평안하실까.
아버지와 어머니 한평생
도대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목성균, 「누비처네」, 연암서가, 2014년, 319 페이지
한평생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나 역시 부모님 가정불화로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부모님에게 가해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흐르는 내 눈물로 대답해 줄 뿐이다.
수필 한편 읽었는데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마음에 정화가 일어난다.
새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분명 우리 집과 다르지 않은 가정불화 속에서 살아온 작가인데 내가 가진 원망과 미움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글에서 인간미 그리고 애틋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심지어 심오한 인생철학까지.
이런 글은 단순히 필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글쓴이 마음이 보이는 수필은 작가 스스로가 성숙하지 않고서는 이런 글이 나오지 않는다. 향기가 묻어나는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쓰기 훈련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을 갈고닦아서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글에서 인간미가 묻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없이 단순히 글쓰기만 한다면 그것은 독자들에게 외면받기 쉽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된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 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피천득 수필 중에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