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니 Jun 28. 2024

주유소에서 총을 난사하는 남자

사주에 정재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면 생기는 일 1

숨통이 터진다.

그가 주유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터진다.

터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숨을 '흠' 들이마시고 '후' 내신다.

하나 둘, 하나 둘, 숫자를 세면서.

이쯤 하면 끝났겠지 고개를 살며시 돌려, 그의 옆모습을 슬며시 보니 음, 아직도 멀었다.

더 답답하다.

호흡 조절로도 그의 느림을 따라갈 수 없으니 최후의 수단을 써야지. 

그래 피신이다.

주유소에 달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내 눈앞에 남편이 사라진다.

이제 숨이 자연스럽게 쉬어진다.




호주에서 주유할 때마다 기름 한 톨도 아끼는 남자, 여기에 그만의 알뜰 주유 비법을 최초 공개하겠다.




자동차에 기름을 채울 때 조금이라도 싸게 넣고 싶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주유 앱을 사용한다. 

이 앱은 저렴한 휘발유 시세를 1주일간 락을 걸 수 있다. 

현재 기름값보다 이미 락을 건 가격이 더 싸면 이득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최고로 18불까지 아껴봤다. 

주유시 평균 5~10불 정도 절약되어 애용하고 있다.

그는 귀신같이 기름값이 올라가는 눈치를 채고 좋은 가격에 락을 건다.

조금이라도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려고 일일이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이 맘에 든다.

나 역시 기름을 싸게 넣고 싶지 비싸게 넣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가 매번 시세보다 낮은 가격을 찾아 애쓰는 모습은 참으로 든든하다.

그를 향한 애정지수가 올라간다.

하지만 막상 주유소에 도착해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 높았던 애정지수는 순식간에 바닥을 때린다.

그만의 특이한 주유 의례를 지켜보자니 전생에 좁쌀영감은 아니었나 싶다.




주유소에 도착해서 차를 세운다.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와 연료 주입구를 연다. 

참고로 호주는 셀프 주유를 한다. 

주유기에 비치된 노란색 e10, 파란색 무연(unleaded), 빨간색 고급(supreme) 세 개의 주유총이 선택을 기다린다. 

파란색 무연 주유총을 간택하여 오른손으로 잡아당겨온다.

그리고 총을 주유구에 집어넣고 손잡이를 힘주어 잡아서 누른다.

그러면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휘발유가 기름통에 콸콸 쏟아진다. 

배고팠던 자동차는 꿀꺽꿀꺽 맛있게 먹고 있다. 

기름 반찬으로 배에 기름칠을 한다.

4분이 지나면 배부르다고 갑자기 둔탁한 '틱' 소리를 내뱉는다.

그러면 눌렀던 손잡이가 강제로 풀린다.

기름이 만땅이라는 사인이다.

이제는 주유총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기름값을 카드로 계산하러 편의점 계산대로 가면 된다. 

보통 현지인들은 이렇게 셀프 주유를 끝낸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허나 남편은 이제부터가 주유 시작이다.

끝났는데 끝나지 않았다.

나의 염장이 뒤집어지는 타임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다시 풀어진 주유총 손잡이를 꽉 누른다.

그러면 희한하게 기름이 다시 나와서 주유구로 들어간다.

저렴한 가격에 주유할 찬스, 락을 걸었으니 최대한 많은 기름을 채우려는 그의 집념이다.

싼 기름을 더 채운다는 기쁨도 잠시, 10초가 지나면 기계음이 '틱' 하며 주유가 또 멈춘다.

이젠 진짜 다 찼다.

이제는 총을 반납하겠지 싶은데 그사이 또 총을 당긴다.

"그만해, 다 찼잖아."

"아냐, 아직 공간이 많이 남았어." 

당긴 총으로 기름은 신기하게도 또 흘러나온다.

그리고 다시 8초가 지나자 어김없이 총은 멈추고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또 총을 당긴다.

주유총에 센서가 있어서 그런가 금방 기름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총을 또 당긴다.

영 안 나올 거 같은 기름이 남편 바람대로 또 조금씩 빠져나온다.

"이제 다 된거지? 그만 계산하자."

"아냐 아직 위에 공간이 더 남았어. 좀만 기다려."

그리고 또 총을 당긴다.

기름이 조금 나오다가도 여지없이 5초 후에 총은 멈춘다.

'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저 미친 짓을 할 것인가?'

그렇게 이 짓을 다섯 번을 더 반복한다.

그의 행동을 다 묘사했다가는 읽는 사람도 나처럼 숨이 막힐 것이다.

이쯤에서 끊어주자.




그가 진짜 주유를 멈추는 시점은 주유구에 투명하고 노오란 기름이 약간 찰랑찰랑 넘쳐나는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주유총 끝에 묻어있는 몇 방울의 기름도 탈탈탈 털어서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 조심조심 기름통에 모아 담는다.

근데 귀신같이 한 번도 주유구에 기름이 흘러넘친 적은 없다.

참 정확한 사람이다.

예전에 식품회사 실험실에 근무할 때 0.05g까지 손으로 정확하게 무게를 맞추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그는 정확을 넘어서 너무 꼼꼼한 것이다.

그는 뭔가 뿌듯한 일을 했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이제 가서 계산하고 와."

같은 시간에 주유하러 들어온 옆 차는 이미 온데간데없고 다른 차가 서있다.

'으이구, 저 화상'

자동으로 주유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초장기에는 그의 주유 습관이 너무 이해가 안 돼서 잔소리를 해댔다.

너무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주유 시간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

너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다.

어차피 다음에 기름을 또 싸게 넣을 텐데 왜 매번 저렇게 억지로 기름을 꾹꾹 채우는지 황당하다.

문제 있는 그의 주유 습관을 교정을 해보려고 소리를 쳐봤지만 말싸움만 늘어갔다.

"그냥 자동으로 멈추면 제발 그만해."

하지만 나의 잔소리를 뚫고 그는 묵묵히 할 일을 했다.

나중에 그는 나에게 주유시 잔소리 금지 엄명이 떨어졌다.

자기 차에 자기 맘대로 기름을 넣을 것이니 주유의 자유를 보장해달라 주유 독립선언을 외쳤다.

맨날 싸워도 효과가 없으니 오히려 휴전을 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주유시 아내가 묵언수행을 하니 그는 편하게 하고픈 대로 기름을 그득그득 꾹꾹 양껏 눌러 담는다.

그런데 그것을 잔소리 없이 지켜보자니 내 속에서 열불이 난다.




그의 사주에는 정재가 있고 내 사주에는 편재가 있다.

편재는 가성비, 효율성을 따진다.

정재는 돈 그 자체를 아끼는 사람이다.

편재는 시간 대비, 노력 대비, 비용 대비 맛이 좋거나, 기능이 좋거나, 실속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재는 아무리 노력이 들어가고, 아무리 시간이 소비된다 하더라도, 최대한 싸게 저렴하게 돈을 아끼면 된다.

서로 경제관념이 너무 다른 것이다.

편재인 나는 외식을 한다면 가격 대비 양과 맛이 좋은 곳을 찾는 편이다. 

예를 들어 20불짜리 음식이지만 25불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을 선호한다. 

하지만 정재인 남편은 그냥 제일 저렴한 음식을 찾는다.

양과 맛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같은 양평 해장국을 먹으려고 할 때에도 실속을 중시하는 나는 따끈따근하게 금방 뚝배기에 끓여 나와서 '후~' 불어서 먹는 외식을 선호한다. 

외식을 하면 맛난 깍두기와 김치 그리고 청양고추도 나온다. 

게다가 설거지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편하고 좋다.

하지만 남편은 해장국 한 개를 포장해와서 집에서 그것에 물을 좀 더 넣어서 팔팔 끓여서 둘이서 반반 나눠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한 끼로 두 명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나 맛보다 돈을 아끼는 게 더 중요하다.

정재가 있는 사람은 꼼꼼하게 따지고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하는 성향이 있다.

예측 가능한 테두리에서 움직이기에 안정감은 있지만 답답하다.




주유소 묵언수행을 위해 호흡을 조절해 보지만 나의 얼굴은 이미 붉으락 거리고 있다.

참고 더 지켜보다간 내가 위험하다.

마지막 방법으로 편의점 안으로 도망간다.

살 물건이 전혀 없는 아이쇼핑을 한다.

진열대 물건을 어슬렁거리며 한참을 구경하고 있으면 그가 해맑은 미소로 걸어온다.

"이제 계산해."

"응 알았어."

카드를 꺼낸 후 주유 값을 계산하고 드디어 주유소를 나선다.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그는 애틋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제 주유소 묵언수행도 봉인 해제되었으니 그의 안팎이 다름을 폭로하겠다.

침대에서나 자기 총을 여기처럼 자주 쏘지, 피- 자기는 한 번만 쏘고 픽- 쓰러지면서.

아참 또 기름 한 방울은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면서 집안 변기 주변에는 왜 그렇게나 누런 얼룩들이 많이 피어있는 건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사실은 영어 울렁증 남편 덕에 호주로 온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