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니, 신촌?
신촌에서 대학을 다녔다. 97년엔 당산철교가 공사 중이라 가까운 신도림 역을 두고 시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거기서 네 정거장, 충정로, 아현, 이대를 지나 신촌에서 내릴 때마다 설렜다. 삶은 한창 각박했지만 매일 현실에 발을 담그고 가제트 형사처럼 팔을 쭉 뻗어 신촌에 있는 꽃과 꿀에 취해 있다가 돌아왔다.
신입생이 되고 맞은 첫 봄, 정신없는 3,4월을 보내고 5월이 되자 백양로가 온통 연둣빛이 되었다. 공강 시간에 처음으로 혼자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맨 끝으로 올라가니 작은 숲이 나왔다. 벤치 여기저기에 앉아 사람들이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빈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조용히 앉아 나도 함께 숲으로 스며들었다. 숲 바닥에 나뭇잎 그림자들이 물결처럼 출렁이고 때로 비누방울처럼 부풀었다 터졌다.
하나둘 사람들이 돌아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혼자 남아 남은 수업을 모두 째버리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냅다 벤치에 누워버렸다. 키가 큰 나무들이 하늘을 부채처럼 가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가지를 흔들면 잠깐씩 비치는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예뻤다. 눈을 감아도 방금 본 하늘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였다.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오는 장면이다.
백양로를 내려오는 길, 언제나 눈앞의 하늘엔 신촌의 저녁 2부의 막을 올리듯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졌다. 아는 선후배와 친구들을 만나 인사를 하는 반가운 목소리들과 누군가의 농담에 다 같이 시원하게 웃는 웃음소리들이 신촌 골목 사이사이 술집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나도 과외가 없는 날이면 늘 아는 사람들이 모여있을 단골술집으로 향했다.
오늘 오랜만에 신촌에 간다. 언제 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으니 가본 지 십 년도 더 된듯하다. 저녁 약속이지만 일찍 가서 학교와 신촌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올 예정이다. 학교에 들어가 나를 위로해 주던 숲에게 인사하고, 노을이 질 무렵 백양로의 완만한 경사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고 싶다. 그리고 거리로 나와 추억의 장소들을 하나씩 돌아봐야지. 그리운 '친(한) 친(구들) 사장님, 푸짐했던 '크레파스‘의 마른안주, 소개팅을 하고 마셨던 '매화주막'의 폭탄주, '횡단보도'의 테킬라, '와이당구장'의 짜장면.
벌써 27년 전의 일인데, 그러보보니 그리운 곳이 숲 말고는 죄다 술집이다. 20대의 나를 키우고 버티게 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숲과 술이구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왠지 20년 후에 지금을 그리워하며 글을 쓸 그 순간에도 나는 숲과 술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서.
작품 <희구 2> 백두리
큐레이션 @gonggan.goyoo #공간고유
<고유한 순간들-그림을 보고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