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엄마의 말을 복기한들
투석을 마치고 나오는 엄마가 갑자기 발을 절뚝인다. 아예 발을 디디지 못할 정도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서둘러 정형외과에 가니 역시나 발등뼈에 금이 갔단다. 건강한 청년을 기준으로 8주, 엄마 발등에 가로로 난 3센티미터 금이 다시 붙으려면 수개월이 걸린다는 설명을 듣고, 엄마 걱정보다 엄마를 모시고 정형외과까지 다닐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내서 차로 모시고 다니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의사 선생님 앞에서 보호자로 둘의 대화를 듣는 일이 고역이었다.
어디서 다쳤냐는 질문에 여지없이 엄마의 서사가 시작된다.
투석 끝나고 나오는 길에 보니까 처음 보는 트럭이 있더라고요. 어? 뭘 파나? 하고 이렇게 보니까 체리를 파는 거예요. 우리 애들이 다른 과일은 그렇게 안 먹는데 체리를 좋아하거든요. 그게 생각나서 그거 한 상자 사려고 그 트럭만 보고 가다가 그냥 살짝 삐끗했는데 걸으려니까 너무 아픈 거예요. 얘가 찜질도 해주고 그랬는데 통증이 더 심해져서 왔어요. 우리 딸이 출근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네요. 얘가 고생이지 뭐. 제가 투석을 해서 매일 아침에 그 병원 데려다주는 것도 힘든데. 마침 집에 예전에 사둔 목발이 있어서 그거 하고 오긴 했는데 제가 또 유방암 수술을 해서 오른쪽 팔에 너무 힘주면 안 되가지고...
엄마, 잠깐만. 선생님, 엄마는 그래서 통깁스를 하셔야 할까요?
대학병원의 짧은 진료시간, 의사들은 대부분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우스만 클릭했다. 의사를 향해 엄마는 지난 인생 스토리를 다 꺼내지만 대부분 의사에게 미세한 호응도 전혀 얻지 못한 채 다음 예약 스케줄 대화에 덮여버렸다. 무시당한 기분을 느낀 엄마의 표정을 보기 싫어서 매번 내가 먼저 말을 자르거나 의사의 대답에 먼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매번 무시를 당했다고 느끼면서, 그래서 속상해하면서, 의사가 환자 말을 듣지도 않고 아주 싹수가 없다고 욕을 하면서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래 아프니까 서럽기도 하겠지, 대부분 엄마 편을 들어주었지만 어떤 날은 내가 봐도 과해 의사도 바쁘고 힘든데 얼른 본론만 말해주는 게 낫지 않나며 의사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내게 도대체 누구 편이냐며 다 필요한 정보를 말하는 건데 그걸 왜 중간에서 말도 못 하게 하느냐고 분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엄마는 자기가 의사에게 그 정도도 얘기도 못하냐고 그 비싼 진료비를 받으면서 환자 말을 그 정도도 못 들어주냐고 눈을 부릅 떴다.
체리트럭이 지나간다. 그 날들 나는 어떤 딸이어야 했을까. 정형외과에 갈 때마다, 신장투석실에 갈 때마다 체리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매번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듣고 같이 웃어주며 '정말 비싼 체리를 먹은 셈이죠'라고 농담을 해야 했을까. 의사가 엄마말을 자르면 돌아오는 길에 엄마보다 화를 내며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말자고 소리를 질러야 했을까.
돌아보면 ’왜 말도 못 하게 하느냐’ 그게 엄마의 분노의 핵심이었다. 엄마는 말과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누구든 붙잡고 아픈 사정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다. 친정식구도 남편도 없이, 그나마 대화가 통했던 둘째 딸 마저 떠나보내고 뚝뚝한 큰 딸보다 조금 더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 스무 살부터 매일 엄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모셔오고 응급실에서 옆자리를 지키고 병원비를 결제하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감기약을 일부러 세게 지어달라고 해서 약으로 버티며 지냈지만 단 한 가지 엄마의 투정을 따뜻하게 들어주지 못한 시간만 자꾸 사무친다. 그때 알아듣지 못했던 엄마의 언어, 들으려 하지 않았던 엄마의 언어를 이제 와서 복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