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

불안하게 하지 않을게

by 실버라이닝

내가 전화를 꺼버린 순간 집을 나서서 두 시간 넘게 이태원 술집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걱정이 극에 달했을 때, 테이블 위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으니. 태평하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불안은 분노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말없이 나를 끌어내렸다. 분노와 안도가 뒤엉켜 끈적이는 손으로 내 손목을 감싸 쥔 채. 그리고 그의 속내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을 빠르게 걷기만, 그저 걷기만 했다. 그의 걸음에 맞추느라 숨이 조금 가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의 속도를 따라가는 건 끌려가서가 아니라, 놓치고 싶지 않아서라는 걸.


지친 흔적이 묻은 얼굴, 두려움이 가득 고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상반된 감정들 속에서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통제에 등을 돌리다가도 끝까지 쫓아오는 모습에 다시 마음을 내어주는 모순된 잡기 놀이. 나를 잡아줄 거지? 이율배반적인 내 사랑의 복잡한 결을 받아들이게 되니 이제 그의 마음이 문제인데, 그는 더 이상 술래를 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뾰족하게 세운 얼음송곳 같다가 금세 녹아버린 내 마음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싫은데, 헤어지는 건. 그걸 어디 뒀더라? 몇 시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처박아둔 사랑을 꺼냈다. 아직 살아있다.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냥 전화를 받을걸. 그의 집 앞에 가서 술에 취하지 않은 얼굴을 보여주고 안심시켜 줄걸.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 줄걸. 사과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의 불안을 알면서도 사랑을 믿고 자만한 오기를 후회한다고 알려야 했다. 핸드폰을 꺼버렸던 손으로 그의 손끝을 다시 꼭 잡을 때, 그가 나를 안았다.


언젠가 내가 말한 적 있지. 내 불안은 어렸을 때 생긴 거라 통제가 잘 안돼. 그냥 언제라도 내가 널 찾을 때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얼굴을 보여주고 숨소리를 들려주면 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니?


손가락을 잘라도 통증이 느껴진다 했다. 아무리 아픈 기억을 지워도 몸이 고통을 기억한다고. 체액에 남아 온몸을 돌고 있는 불안이 어느새 무조건 반사가 되어 자기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그러니 제발 곁에 있어만 달라고. 화를 누르고 말을 고르다 포기했을 때에서야 떠밀려 온 이야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더 이상 내 앞에서 단단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상처 입은 몸으로 나를 붙잡았다. 놓는 게 더 쉬웠을 텐데. 떨리는 손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아니라 그를 위해서라고 말하며. 다행이었다. 아직 내가 그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서.


긴 포옹. 내 어깨에 닿은 그의 숨이 조금씩 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나에게서는 단 알코올 냄새가, 그에게서는 쓴 땀 냄새가 났다. 싸움의 끝,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냄새가 섞이고 사랑의 잔향이 골목에 퍼졌다. 그곳에 사랑의 정의를 하나 추가한다. 사랑이란 이해받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서로의 냄새를 안은 채 떠나지 않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