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좋은 걸
미세한 얼음 결정들이 발갛게 뺨을 어루만지는 겨울, 저녁 어스름에 비꽃이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모두 사랑인 날들. 그는 알까.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어서라는 걸, 되찾은 그를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라는 걸.
신호 대기에 걸린 버스 뒷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지만 짐을 든 아주머니 한 분만 내린다. 좋아, 앞으로 오는 버스 세 대 안에 무조건 그가 있을 거야. 혼자 내기를 걸고 기도하지만 세 번째 버스는 배기통에서 시커먼 먼지만 내뿜는다. 슬슬 춥고 발이 시린데.
언제 왔어. 손이 꽁꽁 얼었네.
어느 새벽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달려 나가 마주 잡았던 손이 체온을 주고받으며 다시 환하게 웃는다. 몇 해 전이었던가. 한 겨울,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가운데 얼음이 동그랗게 녹은 자리에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나 나를 놀라게 했던 작은 봄이 지금 내 손에 있다.
그런데 정지된 시간 틈으로, 문득 잊고 있던 고통이 스며든다. 맞다, 키가 큰 그와 어울리고 싶어 하이힐을 신었는데. 굽이 내 야망에 비해 너무 높았구나. 사랑은 발가락 통증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고 오직 구두를 벗어던지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하다. 얼른 아무 데나 들어가자고 조르는데 그가 눈치 없이 나를 놀린다.
넌 고통에 너무 취약해. 일제강점기 때 태어났으면 최고의 앞잡이가 되었을 거야. 고문 시작도 전에 일가친척 다 팔아먹었을걸.
브레이크가 고장 난 농담에 섬뜩한 눈으로 대답하자 정신이 들었는지 서둘러 단골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선다. 자리에 앉자마자 구두부터 벗기 바쁜 내 곁에 그의 손이 먼저 와있다. 스타킹 감촉 위로 닿는 부드러운 손바닥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쩌다 네가 내 연인이 되었을까. 그의 머리칼 끝에 포슬포슬한 눈방울 하나 반짝, 대신 대답한다.
꼬치구이 집 낮은 천장 아래 노란 전등의 온기 때문인지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황도 유리그릇에 남은 얼음을 괜히 달그락거리다가 한 잔, 모둠 꼬치를 한 입 넣고 또 한 잔. 겹겹이 쌓인 빈 꼬치와 볼링핀처럼 줄을 세운 소주병들 사이로 그가 보였다. 솔직해진 목소리, 내 얼굴을 훑어 내려가는 시선. 깜빡. 기억의 조명이 꺼졌다 켜지고 또 깜빡. 마주 앉아 있던 그가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 있다가, 키스를 하다가, 다시 이야기를 건넸다. 갈색 스웨터가 잘 어울린다는 말끝에 나는 어떤 색이 어울리냐고 묻자 그가 웃었다.
살색. 아무것도 안 입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