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차 안에서

by 실버라이닝

가게 문이 닫히는 시간, 사장님의 눈총에 일단 밖으로 나오니 발목만큼 눈이 쌓여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왜 그리 천근만근 무거운 건지. 누가 내 발목에 타이어를 달았거나 아니면 그새 지구 중력이 열 배는 세진 게 분명했다. 눈길을 핑계로 더 천천히 걸으며 빙 돌아가는 걸음. 느리게 더 느리게. 그때 그가 아파트 구석에 세워둔 차 앞에서 멈춰 섰다.


포근한 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재즈가 스피커의 미세한 잡음을 타고 낮게 깔렸다. 베이스가 울릴 때마다 차 어딘가가 작게 떨리고, 히터 바람이 간헐적으로 숨을 고르듯 불었다 멎었다. 코트에 밴 겨울의 습기, 하루를 통과한 그의 땀 냄새가 차 안의 공기를 채웠다.


눈발이 소리 없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차가 서서히 눈 아래로 잠수하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면 사람들의 발소리마저 차츰 귀에서 밀려나고 대신 재즈와 우리의 숨소리만 남은 작은 차 안, 세상과 분리된 작은 피난처가 완성됐다.


유리창 안쪽으로 서서히 김이 차오르며 흐릿한 차단막이 쳐질 때,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짧게 새어 나오는 그의 숨소리가 귀 가까이에서 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손끝이 스치자 차 안은 한지처럼 하나의 색이 번진다. 그때 내 머리칼을 넘겼던 건 나였던가 아니면 그였나. 그가 내 몸을 천천히 끌어갔을 때 재즈의 한 음이 유난히 길게 늘어졌던 것 외에는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기억. 따뜻하고 습한 꿈. 한 가지는 확실하다. 검은 밤에 덧칠해진 하얀 배경 위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서로의 체온으로 달궈진 살구빛이었다는 것.


겨울의 작은 차 안, 우리의 숨결이 보온병 속 수프처럼 따끈하게 살아있었다. 뭉근해지다가 한 번씩 보글보글 작은 거품 같은 웃음이 터지면 김 서린 창문에 물방울 한 줄기가 또르르 줄을 긋고. 그가 나를 안고 긴 숨을 내쉬자 멈춘 줄 알았던 재즈음악이 다시 들렸다. 사랑은 선택적 감각기능을 가졌는지, 멀리 깜빡이던 신호등 불빛과 나뭇가지에서 한 번씩 눈덩이가 툭 떨어지는 풍경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차 안을 채우는 달큼한 땀 냄새. 세상과 단절되어 만든 시간. 그 밤을 하나의 계절로 떼어 놓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겨울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