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 해
깨어보니 방 안에는 낮과 저녁의 경계가 흐릿하게 섞여 있다. 몸이 가벼웠다. 낮잠이 아니라 마치 긴 세월을 통째로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동해 바다의 늦은 오후는 고요했고 테이블 위엔 우리가 먹다 만 캔맥주와 과자 부스러기가 어질러져 있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드라이브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오고, 하얀 커튼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리고, 모르는 아이가 재잘거리고. 숙취가 가득한 내 몸을 그가 흔들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식당에 가서 웨이팅 번호를 받아왔다는 말에 눈을 비비며 마주한 그의 표정이, 낯익다.
순간 지난 기억이 블랙박스 영상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화면의 사각지대에 내내 그가 보인다. 아픈 발가락을 만지면 며칠 후 신발장에 놓여 있던 새 운동화. 냉장고에 사과가 두 개 남으면 어김없이 다음 날 사과로 꽉 채워져 있던 채소 칸. 술집에서 마지막 잔을 마시고 일어나면 언제나 그가 미리 부른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침대 곁에 선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펼쳐지는 파노라마. 참 부지런히도 움직여 나를 돌보아 온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그것이 그의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나의 어제와 오늘, 아직 오지 않은 시간까지도 먼저 다녀간 사람. 사랑은 죽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기 어려운 방식으로 조용히 계속되고 있었음을. 나만 억울하다고 불평하던 시간 그는 말없이 더 많은 것을 준비하고 채비해 왔음을. 거창한 사랑고백이나 눈물을 쏙 빼는 이벤트보다 내 곁을 지켜온 흔적으로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한 번도 변한 적 없었던 사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의 언어가 이제야 번역 가능해졌나 보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려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어디 가, 나랑 파도 소리 들으며 한잔해야지.
사랑에 모래주머니가 채워져 힘겹게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게가 온몸을 끌어내려 숨이 차올라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몰랐을까. 한 사람을 이끄는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는 걸. 사랑은 묵묵히 모래밭 일상을 함께 걸어왔다는 걸. 주머니 무게를 버티며, 다리를 절며, 기어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가슴을 문지르니 그제야 만져지는 혈관들에서 맥박이 뛴다.
한잔해.
번역기를 돌리면 사랑해,라고 번역될 말.
투명한 소주잔에 찰랑이는, 그 겨울 내린 눈의 결정들. 사랑이 속삭인다. 고통을 마비시키려 애썼던 시간, 즐거움을 찾아 헤맸던 내 곁에 사랑은 언제나 있었다고.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온통 사랑이었노라고.
에필로그
그에 대해 글을 쓰던 어느 새벽. 내가 온몸에 타투와 피어싱을 하고 나타나 자기를 떠날 거라고 말하는 꿈을 꿨다며 일어난 남편. 그가 입을 삐죽 내밀고 나에게 묻는다.
나 좋아? 나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는 나에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다고.
모래주머니를 떼어낸 무게만큼 키스는 가볍고 두 개의 동그란 입술은 사과처럼 빨갛고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