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의 나를 떠나보내기
영어유치원에 강사로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교수부장이 되었다. 한국인 이중언어 강사 20명에 원어민 20명, 학습관리 선생님 5명까지 약 45명이 되는 강사진을 이끌 교수부장 자리였다. 처음엔 영어유치원 경력이 적어 부담스러운 마음에 거절했지만 솔직히 놓치기 아까운 기회이기도 했다. 덥석. 일단 해보겠다고 했다. 해외연수를 가보거나 유학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모든 업무를 영어로 진행하는 것 자체가 미션이었다. 하지만 새로 온 원어민 강사를 교육하고 전체 회의를 영어로 주관하는 일은 힘든 만큼 도전적이고 성취감이 컸다. 약간 부족한 영어실력은 말에 진심을 담는 것으로 극복했다. 처음엔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원어민들과 한국인 선생님들 모두 조금씩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교수부장으로 교육과 관리, 운영에 대해 배우는 시간들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덜컥 임신을 했다.
남자친구와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속도가 조금 빨랐지만 그렇게 1년 안에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대학을 막 졸업해 대기업에 취직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출발이었지만 결혼생활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내 마음이 자꾸 우울해진다는 게 걱정이었다. 일상의 변화가 거의 없는 남편에 비해 나의 삶은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음대로 일할 자유를 빼앗겼고 내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현실에 자꾸만 화가 났다. 출산하고 육아를 하는 내내 내 억울함과 분노의 대상은 남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승진을 하고 와도 별로 축하해주지 않았다.
자기가 애를 낳고 육아를 하고 있어도 그 승진이 가능했을 것 같아?
술 한잔하고 취해 가만히 있던 남편에게 비아냥거렸다. 그는 그저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착하고 성실한 남편이었는데 나는 그가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 나도 계속 일하고 싶었다. 사람들과 만나서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들 일단 아이부터 키우고 하라고 했고 그 말에 나도 동의했다. 아이를 낳았으니 잘 키우는 게 우선인 게 분명 맞는 말인데 뭔가 자꾸 억울했다.
원래는 1년 정도 일을 쉴 계획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영어를 잊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어떻게 갖게 된 회화실력인데! 3년 동안 영어유치원에서 원어민 선생님들과 매일 고군분투하며 얻어낸 결과였다. 출산하고 딱 한 달 만에 집 근처 학원가에 파트타임 영어강사일을 구했다. 당시엔 한참 분유보다 모유가 좋다는 말이 많아서 모유를 먹였는데 수유 시간 사이사이에 가서 수업을 하고 돌아왔다. 그 두세 시간이 나에겐 숨통이었다. 일을 다시 하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은 살렸지만 육체는 시들어갔다. 아이는 커갔고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입이 짧은 아이는 조금만 먹고 조금만 자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갔다. 1년 넘게 4시간 이상 통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반면 남편은 회식을 하고 돌아와 코를 골며 자는 날이 많았다. 아니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해도 나에게는 열 배로 많은 날들처럼 느껴졌다. 새벽에 아이아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어재껴도 눈을 뜨지 않는 남편을 그래도 이해하려 노력했다. 잘 자고 아침에 잘 출근하라고 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아이들 달래며 재웠다. 그런 나의 밤들을 남편이 알아주겠거니 했다. 하지만 결혼 16년 차인 최근에야 남편은 나의 그런 날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최근 내가 부부 사이에 대해 가장 많이 확신하는 말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풀타임 이중언어 강사일을 구했다. 원하던 직장이었다. 결혼 전에 일했던 곳과 비슷한 근무환경에 대우는 더 좋았다. 어떻게든 꼭 그 일을 하고 싶었다. 신장투석을 하시는 친정엄마가 병원에서 돌아와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하원시키고 저녁 8시까지 돌봐주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면 늘 부리나케 달려가 엄마를 집으로 보내드리고 아이를 챙겼다. 가끔 야근이 있는 날 퇴근이 늦으면 아이가 먼저 잤으면 좋으련만 아이는 단 한 번도 엄마가 오기 전에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몸이 아픈 친정엄마는 고집불통 4살 손녀를 업고 아파트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는 날이 많아졌다.
그날도 성적표를 처리하는 날이라 퇴근이 많이 늦어졌다.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내 일을 다른 선생님께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내 업무의 질을 떨어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집 근처에 다 와가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친정엄마 등에 업혀 있는 딸은 나를 보자마자 약 3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울면서 달려왔다. 할머니가 그렇게 잘해주고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엄마를 애타게 찾는 딸을 보며 나는 다음 날 내내 퇴사를 고민했다.
엄마란 뭘까?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과 상담전화를 하는데 딸 아이아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이들에게 올해 가장 행복했던 날을 말하라고 했더니 다들 여행 갔던 것과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것, 장난감을 산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중 우리 딸은 저녁에 엄마가 일찍 와서 엄마랑 산책한 날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다음 날 직장에 가서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일찍 퇴근하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와 딸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자 나만의 자기 계발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아이가 하원하는 시간에 내가 퇴근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딱히 맘에 드는 곳이 많지 않았다. 교수부장 제의는 계속 들어오는데 업무시간이 걸려 갈 수가 없었다. 원하는 조건의 일자리를 구해서 다니다가도 곧 그만두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근무 시간과 조건만 보고 갔다가 업무내용과 분위기에 실망하고 나 자신의 처지를 자꾸 비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발전적이고 일을 배울 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었다.
내가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사이 남편은 직장생활에서 차곡차곡 실력을 쌓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승진을 하고 일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남편뒤에서 나는 옆으로 옆으로 기어가는 꽃게 같았다. 앞으로 간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서면 그 자리, 그저 옆으로 한 발짝 옮겼을 뿐이었다. 앞으로 내딛으려 해도 옆으로 가는 궤도. 그땐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가는 꿈도 많이 꿨다. 돈을 많이 못 벌어서가 아니었다. 잘하든 못하든 일을 하고 보상받고 성취감을 얻고 싶었다.
상대적 박탈감은 나를 더욱 괴롭혔다. 남편의 삶, 남자들의 삶에 비해 자꾸 포기와 타협과 양보를 강요받는 상황이 싫었다. 남편과 내가 딱 반반씩 일하고 반반씩 아이를 양육했더라면 그 모든 우울함과 억울함이 없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요구를 하지 못했고 남편 역시 그런 도전을 무릅쓸 용기가 없었다. 무기력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계속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던 중,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때 운좋게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영어 선생님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아이와 함께 등원하고 하원했다. 아이는 수업 시간 외에도 쉬는 시간에 교무실이나 화장실에서 엄마를 볼 수 있는 것에 무척 행복해했다. 보수는 적었지만 저녁에 엄마를 일찍 보내드리고 아이와 산책하고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니 삶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결혼과 출산과 육아로 정신없이 4년이 지나고 나는 처음으로 엄마이자 나 자신으로 만족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 4년간의 꽃게걸음으로 드디어 작은 바위에 올라간 기분이었다. 지난 꽃게 발자국을 돌아보니 열심히도 돌아다녔고 참 많이 애썼던 나 자신이 보였다. '더 높이 더 멀리 전진하지 못했으면 어떤가'하고 생각했다.
'결혼 전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 사이의 시차를 이제야 겨우 극복하기 시작했다. 4년만에 나는 불면의 늪과 상대적 박탈감, 허무함과 무기력함이라는 갑옷을 탈피하고 한층 자라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결혼전의 내모습'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니 '후' 하고 한숨이 쉬어지는 듯 했다. 이제 다시 내 몸에 어울리는 껍데기를 만들어나갈 시간이다.
임신 소식 직후부터 5년 만에야 결혼 전의 내 모습을 붙잡고 버티던 나는 그렇게 그때의 나를 보내주었다. 나의 현실을 인정하고 욕심을 내려놓았다. 진정한 워킹맘으로 나를 다시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를 ‘엄마’로 인정하고 리셋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금씩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남편에게 화가 덜났다. 지금의 그 상황을 균형있게 유지하며 내 삶을 잘 가꾸겠다고 다짐했다. 남편은 남편의 삶, 나는 나의 삶을 꾸려나갈 뿐이고 그렇게 각자 홀로 설 때 젓가락처럼 우리는 같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희망을 품었다. 앞으로 가지 못하는 신세한탄을 그만하고 작아진 갑옷을 탈피하며 더 멋진 꽃게가 되어 여기저기를 누비며 다니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