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라 출 땐 전화하지 마

나를 살린 이기주의

by 실버라이닝

2012년 7월. 여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야속하게도 제부와 어린 두 조카까지 한꺼번에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같은 아파트 앞 동에 살던 동생의 집은 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거실이 보이는 곳이었다. 불 꺼진 동생집을 보는 게 힘들어 현관문을 열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그 집을 정리하고 하루빨리 살던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었다. 사돈댁과 상의해 최대한 빨리 동생 아파트를 정리했고 우리도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할 때 가장 고민했던 건 엄마와의 동거 여부였다. 엄마는 무뚝뚝한 나보다는 살가운 동생과 잘 맞았다. 뭐든지 혼자 하는 걸 좋아하고 공부나 일을 하는 데 주로 시간을 보낸 나에 비해 동생은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고 살림도 잘했다. 꼼꼼해서 주변을 잘 챙겼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엄마에게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주곤 했다. 나보다 네 살이나 어렸지만 언니 같은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없어졌으니 엄마와 나는 처음엔 서먹하기까지 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고민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엄마와 함께 살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해 주었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남편도 걱정이 되었다. 나와는 누구보다 잘 맞는 남자이지만 장모님과 함께 사는 일은 또 다른 문제일 텐데. 하지만 당시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엄마를 챙겨줄 사람은 나뿐이었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사는 게 유일한 답이긴 했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남편은 엄마 편하라고 오히려 더 자유롭게 행동했다.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졸리면 소파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모습이 불편했던 듯했다. 거실에 두고 싶은 가구도 다르고 물건들의 배치며 냉장고 정리까지 서로 의견이 다른 어른 셋이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가 사위에게 서운한 일을, 남편은 장모님에게 서운한 일을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서로에게 전하는 방법을 몰랐다. 아니 전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오해만 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저 상대방의 입장을 설명하고 당사자의 마음을 내가 풀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중재자로의 역할을 잘 해내지 못했다. 현명한 중재자라면 당사자 둘이 서로 대화하고 해결하도록 도왔어야 했는데 혼자 그 모든 걸 내 안에 담으려니 마음에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주먹으로 아무리 때려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10분 정도 쥐가 나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다시 두 집으로 나눠 살자고 할까 고민만 하다가 심장을 부여잡고 몇 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터졌다. 안 그래도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간절했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처참히 모든 시간과 공간을 몰수당했다. 가족들이 하루 종일 집에 있었고 예민했다. 남편은 사춘기 딸과 자주 부딪혔고 심한 말도 오갔다. 엄마 역시 예민하긴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생활반경에 너무 가까이 들어와 있었다. 한 집에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딸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참던 화가 터져버렸다.


“그만 좀 해! 내가 보기엔 잘하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문제야?”


엄마와 함께 살면서 남편과 크게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엄마 앞에서 부부싸움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화가 나도 일단 참았다. 그리고 혼자 상황을 여러 번 되짚어 본 후 정말 말해야 할 것이 있으면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술 한 잔 하며 넌지시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 날 만큼은 미룰 수 없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내가 분노조절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설거지를 하는 손이 덜덜 떨려서 남편에게 잠깐 나가자고 했다.


순댓국집에 가서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와 남편 사이를 중재하느라 눈치를 보고 피곤했던 것, 아이들의 훈육 방식에 있어서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을 토로했다. 남편은 화를 내기도 하고 수긍할 부분은 수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화 도중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내가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좀 지친 것도 있는 것 같아. 자기도 알겠지만 식구들이 다 집에 있으니까 중재하면서 사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 자기도 힘들지 않았어?”


“나? 나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집에서 일해서 좋았는데. 너 힘들었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미치도록 화가 났다. 지난 시간, 육아에 엄마에 중학생딸과 남편 사이를 중재하는 일에 나는 죽을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고 힘들었는데 남편은 내가 힘든 줄 전혀 몰랐단다. 결국 중재하려고 애쓴 ‘나’만 이렇게 힘들고 ‘그들’은 힘들지 않았으며 내가 병들어 가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내 안에서 분노가 들끓는 것도 모르고 남편이 말했다.


“야, 그만 일어나자. 너 취했어.”


남편은 할 말도 다 했겠다 대화가 귀찮아졌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순댓국집에 있는 손님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앉아! 내 얘기 안 끝났어! 내가 힘든 걸 몰랐다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는 분노했다. 남편보다 내가 아이를 더 잘 돌보니까, 엄마는 아프니까. 애가 열이 조금만 나도 중요한 약속이어도 다 취소해야 했던 시간들. 가족들이 상처받을 까봐 그들 사이의 문제가 커지기 전에 중재하려 노력했던 나의 수많은 노력들. 오후에 약속이라도 생기면 오전 내내 아이들과 엄마를 챙기고 나서야 잠깐 다녀온다고 말이라도 꺼낼 수 있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뭐야. 나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는데? 이런 등신.'


감사를 바라고 공로를 치하해 주길 원했던 건 아니지만 한없이 허탈했다. 순간 내가 없어도 우리 식구들은 잘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까지 가 닿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라진 나의 형체를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 소주잔을 비우며 나는 알을 깨고 나왔다. 불현듯 나는 남편에게 선언했다.


“너는 너 나는 나. 같이 살지만 각자 살자. 아이들도 같이 키우지만 각자 키우는 마음으로 키우자. 엄마는 엄마 나는 나. 각자 챙길 건 챙기지만 할 건 하고 살아야겠다.”


이기적이 되어야 내가 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순댓국집은 이제부터 내 고향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오직 나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가족이 아닌 ‘내’가 잘 살려면 무엇이 중요할까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 건강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동안 미뤘던 나의 건강에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기로 했다. 근육량이 너무 적어 허리 통증도 심하고 코로나 이후 살도 많이 찐 상태였다. 돈이 아까워서 하지 못했던 PT를 시작했다. 오직 나를 위해 시간과 돈을 썼고 그 결과도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몸이 변하기 시작했고 자존감이 올라갔다.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몇 달 후 엄마의 암발병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누가 뒤에서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행복하려고, 감히?”


나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외침이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엄마의 암진단 이후 한동안 PT 수업을 가지 못했다. 다시 심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여기까지 인가 보다. 젠장.”


엄마를 돌보는 것과 별개로 나를 돌보아야 했지만 그럴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저 우울한 심리상태로 마음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 기분의 파동이 전혀 없었다. 하루종일 무감각한태로 시간만 흘려보냈다. 한동안 엄마를 돌보는 존재로 나는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다행히 엄마의 항암이 순조롭게 진행될 무렵,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 다시 운동하러 가. 여기 항암 환자들 보니까 젊어서 운동 열심히 한 사람들은 항암도 잘 이겨내더라.”


순간 심연의 밑바닥에서 눈을 번쩍 뜨고 일자로 솟구쳐 오르는 내가 느껴졌다. 다시 희망을 가져도 될까? 다시 행복해져도 될까? 그동안 감정의 기복도 없이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서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소리쳤다. 나 다시 행복해질래. 머리채를 잘라내 버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볼래.


몇 달 후 엄마의 항암이 끝나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다. PT를 다시 시작했고 훌라를 만났다. 엄마의 간병도 틈틈이 챙겼다. 피곤하고 때로 지치기도 했지만 그 사이 나는 많이 바뀌어있었다. 순댓국집에서 한번, 엄마의 병동에서 한번 두 번이나 다시 태어난 나는 나를 위한 이기주의로 무장한 채로 삶을 마주하고 있었다.


매주 일요일 오후, 아픈 엄마와 핸드폰 게임을 하는 아들을 집에 두고 나오지만 전면 거울 속의 내가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살린 이기주의. 덕분에 오늘도 가족들에게 당당히 말하고 행복을 쟁취하러 나간다.


“엄마, 미안해. 나 오늘 훌라 클럽에서 공연을 맡아서 가야 돼. 대신 끝나고 회식은 안 가고 공연만 하고 얼른 올게. 아들, 엄마가 아까 하라고 한 거 다 해 놓고 책 보고 있어. 그리고 알지? 급한 일 아니면 엄마 훌라 출 땐 전화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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