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메리아 세 송이
알고리즘.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이라는 소셜네트워크는 사용자가 검색한 단어를 기억했다가 비슷한 콘텐츠를 추천해 준다. 그중 인스타그램은 화면에 보이는 돋보기 모양을 클릭하면 최근 내가 검색했거나 잠시 머문 콘텐츠를 보여준다. 바로 내가 선택해서 돋보기를 들고 들여다본 세상이다. 조용히 혼자 있을 때나 특히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주로 보는 것들인 만큼 가장 나다운 모습이 들어있다. 돋보기 안의 사진과 영상은 결국 나의 욕구이자 이상, 무의식을 보여주는 볼록렌즈인 셈이다. 한동안 나의 돋보기는 온통 영어그림책으로 가득 찼다. 혹은 여행지. 혹은 다이어트 식단. 그러던 어느 날 돋보기가 타투(문신) 사진을 잔뜩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나를 꾸미고 치장하는 일보다 책을 사거나 여행을 가는데 돈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건 나의 타고난 성향일 수도 있지만 중학교 때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탓이기도 했다. 아빠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실직을 하고 알코올 중독 증세로 오랫동안 집에서 술을 드시다가 내가 대학교 3학년이던 해에 간경화와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다음 해 엄마는 만성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3번씩 해야 하는 신장투석을 시작하셨다.
당시엔 대학생에게도 신용카드를 만들어주던 시기라 나는 여러 장의 카드를 발급받아 병원비를 겨우겨우 해결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 병원비까지 충당하던 나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의 늪에 빠졌다. 그리고 곧 모든 카드사용이 막혀 카드 빚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 5년이 지나서야 모든 빚을 갚았고 첫 아이를 낳을 때쯤 대학교 학자금 대출을 모두 갚았다. 그런 상황에서 네일아트를 한다거나 호캉스를 간다는 건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 관심 없는 척했지만 가장 부러운 게 하나 있었다. 치아교정이었다. 오른쪽 위 덧니가 심했던 나는 얼굴의 상하, 좌우비대칭이 점점 커졌지만 비용이 감당이 안되어 교정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 온통 교정을 시작하거나 끝내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에게 왜 이렇게 좋은 교정을 안 하는지 자주 물었다.
“귀엽잖아.”
하지만 사실 덧니는 나의 최대 외모 콤플렉스였다. 중학교 때부터 거울을 볼 때마다 덧니 때문에 비뚤어져 보이는 얼굴이 싫어 화가 났다. 웃을 때마다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오해를 받는 것도 불편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개성’을 강조하며 타인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외모에 대한 관심의 문을 스스로 닫는 것으로 마음을 숨겼다. 옷이나 신발을 살 때에도 그저 여름엔 시원한 옷, 겨울엔 따뜻한 옷이 우선이었다. 색깔도 무채색이나 파스텔톤이면 되었다. 어느 옷과도 어울리는 게 중요했다. 튀지 않아야 다른 사람의 관심을 덜 받을 테니까. 괜히 튀는 옷을 입었다가 혹시라도 옷이나 쇼핑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나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누구보다 화려하고 튀는 옷을 입고 싶었다. 당시에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나의 돋보기는 온통 섹시하고 화려한 옷 게시물로 도배가 되었을 것이다.
일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경제적으로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아이 육아에 관심을 가지면서 발도르프 교수법을 접하게 되었다.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며 받아들였는데 그중 특히 사람이 발달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지나가면 커서라도 그 과정을 겪어야 안정적인 정서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를 향했다. 해소하지 못한 나의 욕구가 떠올랐다. 10대와 20대에 나를 아끼고 꾸며주지 못했던 시간. 지금이라도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가장 먼저 해본 것은 네일아트였다. 그때는 여름이었는데 찐한 청록색과 밝은 주황색을 퐁당퐁당 칠하는 네일을 선택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할래요. 튀게.”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그때부터 내가 하는 일들은 늦은 만큼 ‘제대로’ 해야 하는 일들이 되었다. 네일 아트를 한 것을 잊어버리고 커피를 마시다가 내 손톱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 곧 화려한 색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이후 계절마다 한 번씩 꼭 네일아트를 하러 간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날엔 핑크나 아이보리로, 여름휴가를 가기 전엔 화려한 파랑이나 실버로, 가을엔 와인색이나 그레이도 좋고 겨울엔 크리스마스 느낌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한다. 그러면 그 계절 내내 행복하다. 손톱에 색을 칠하는 일 하나로 한 계절이 행복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이 참 어려웠구나. 나는 젊은 시절의 나를 안아주고 하나의 발달단계를 성공적으로 거쳤다.
그리고 가장 큰 발달과업인 교정을 했다. 교정은 친정엄마가 비용을 내주었다. 사실 그 돈은 동생의 교통사고 사망사고 보상금으로 엄마가 가지고 있던 비상금이었다. 동생이 죽어서 받은 돈이라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 쳐다보지도 못했던 돈을 엄마도 나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10년 정도 지나니 이제 조금 동생의 죽음을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둘째 딸이 죽어서 받은 돈으로 첫째 딸의 치아교정을 해주는 엄마의 운명이 참 기구하고 가슴 아프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 시기를 지났다. 동생은 죽었다. 우리는 살고 있다. 돈은 돈이다. 욕구는 욕구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씩 받아들이며 남은 생을 채워가고 있다.
나를 꾸미는 즐거움과 행복을 알기 시작하고 나는 적극적으로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훌라 수업에서 새로운 욕구를 만났다. 수업에 참여한 20대 아가씨가 하와이에 갔을 때 훌라에 반해서 그 자리에서 받은 타투를 보여주었다. 훌라를 추는 아가씨가 화려한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용기에 반했고 20대의 충동이 사랑스러웠다. 예전 같으면 그런 그녀의 젊음이 부럽기만 했을 텐데 이젠 아니었다. 나도 타투를 하면 되니까!
‘타투’
모아나가 파도를 넘어 더 큰 바다로 향할 때 나는 타투를 떠올렸다.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아나에게 엄마아빠가 있었듯 나에게도 주변의 시선과 보수적인 남편이 있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타투를 가져도 될까 하는 나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고 남편이 질색을 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나와 동갑인데 훨씬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연애 시절 홍대 클럽이나 이태원 바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어디서 마약이라도 하게 할까 봐 밤새 잠을 못 자며 결국 온 술집을 뒤져 나를 찾으러 오던 남자였다. 그런 남편에게 타투하는 와이프는 어떤 이미지일까 궁금해서 내가 타투를 하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뭐? 타투? 어디에 하게? 내 이름 이니셜에 러브 포에버 쓸 거면 하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오히려 남편은 내 마음에 공감하고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이번 생에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라며 응원의 메시지까지 덧붙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편견이었는지 모른다. 남편은 보수적이라기보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컸을 뿐이었다. 팔목에 동서와 함께 레터링 타투를 새긴 시동생도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타투도 패션이라고. 얼마나 멋지냐고. 시동생과 동서의 응원까지 얻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들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확실히 결심이 선 나는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 인스타그램 돋보기가 온통 타투로 가득찼다.
하겠다고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타투한 사람들 천지였다. 인터넷 검색창에도 SNS 돋보기에도 ‘타투’만 검색하면 온통 타투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타투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5명 중 1명이 자신의 타투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민은 거기서부터였다. 타투의 위치와 이미지, 혹은 어떤 글귀를 써넣을지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고민은 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오직 나만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레터링(글자를 새기는 것)을 하려고 했다가 너무 추상적이기만 해서 그림으로 새기기로 하고 다양한 타투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반려동물을 새기기도 하고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파도 위의 서퍼를 그려 넣기도 했다.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나에게 계속 묻고 또 물었다. 남은 생애동안에도 흔들리지 않을 그 무엇.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그리고 내 마음이 대답했다.
‘나를 꽃으로 대하고 싶어. 그동안 너무 소나무처럼, 민들레처럼 살아온 것 같아. 하와이에 피어있는 하얀 플루메리아 꽃처럼.’
나를 꽃으로 대하기. 처음으로 받아쓰기 시험 100점을 맞은 아이처럼 흥분되었다. 내가 찾은 내 마음의 정답. 내가 나를 아는 일이 이렇게 기특할 줄이야. 나를 칭찬했다. 타투의 위치는 타투이스트 분과 함께 고민해서 결정하기로 했다. 후보는 쇄골, 팔목 아래, 어깨 뒤쪽 세 군데였다.
요즘 핫하다는 망원동 어느 지하 작업실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가니 현대미술관 전시장처럼 세련된 공간에 살가운 강아지와 도도한 고양이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힙한 타투이스트분이 인사를 건넸다.
“안젤라님이시죠? 인스타에서 봤어요. 운동하실 때랑 훌라 추실 때 어깨가 너무 예쁘시더라고요. 거기에 꽃 세 송이를 심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더 이상 위치를 고민할 것도 없이 어깨에 하기로 하고 양팔을 뻗어 자세를 잡았다. 왼쪽 어깨 울퉁불퉁 귀여운 알통에 하나씩 플루메리아를 심어주기로 했다. 서핑을 좋아하는 타투이스트 분이 하와이에 갔을 때 바닷물에 동동 떠 있던 플루메리아를 본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때를 생각하며 그려 넣어주는 내내 본인이 더 신나 하셨다. 그러더니 첫 타투 기념 선물로 미니 타투 하나를 그려주시겠단다. 나는 선뜻 오른쪽 발목을 내어드리며 작은 파도라인을 그려달라고 했다. 한 시간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 어느새 내 몸에 꽃이 피었다. 오른쪽 발목엔 파도가 친다. 이제 내 몸이 하와이가 되었다.
문을 나서자 스무 살이 되어 처음으로 귀를 뚫었던 날이 생각났다. 마치 어른이 되는 성인식을 한 기분이었던 그 때. 귀를 뚫는 일이 어른으로 성장한 ‘독립’의 메시지였다면 타투는 나에게 ‘자유’였다. 나는 나를 표현할 자유를 성취했고 오롯이 나를 위한 일을 해냈다. 미뤘던 가장 큰 발달단계를 지나 이제 드디어 어른으로 성장했다.
집에 와서 딸에게 방금 새긴 따끈따끈한 타투를 보여주었다. 미술 전공으로 곧 예고에 진학할 딸의 반응이 궁금했다. 딸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어떤 거 같아?”
“예뻐.”
“너도 하고 싶어?”
“응, 근데 나중에.”
내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대화였다. 딸도 자신을 사랑하고 아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타투든 다른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하고 실행했으면 좋겠다. 딸의 몸은 곧 딸의 ‘자유’이니까.
문득 다른 이들 마음속의 타투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남편이 타투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무엇일까? 내 아이들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