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im ERICAn [나는 _____이다] :: 글로벌 다문화
한 아이가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를 꼭 데려가고 싶었다.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 가정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벗어나 친구들과 새로운 경험을 하고 함께 자며 추억을 쌓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선생님은 아이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다음 날 선생님은 아이에게 수학여행을 다시 권해 보았다. 아이의 답은 ‘나는 수학이 제일 싫다. 그래서 ‘수학’여행도 싫다. 여행까지 가서 왜 수학 공부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고 ‘그런 여행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상은 어느 책에서 본 에피소드이다.
재미있다고 웃고 넘기기에는 아이의 고민이 안쓰럽다. 학교를 떠나 여행지에서도 싫어하는 과목을 공부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까. 다문화 가정 학생, 특히 한국어가 서툰 이주배경 학생들은 이런 언어, 문화적 차이 속에서 고민하고 어려워한다. 선생님에게 말했기 때문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았지만 짓궂은 악동들에게 꼬투리를 잡혔으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국경을 넘어오는, 모든 것이 생경한 이주민 가정을 이웃에 두고 있다. 우리 학교에도 다문화가정 자녀라고 불리는 한국인들, 세계시민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한국말이 서툴고 학습이 어려운 이주민 자녀들을 위해 찾아가는 한국어 교실, 학력 향상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모국어 유지를 돕기 위해 이중언어 말하기 대회에도 참여하도록 안내한다.
이주배경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교실은 현실판 ‘인간극장’이다. 한국어가 자연스러워지고 배움이 무르익어 가르친 것을 쭉 꿰어 이해가 깊어질 때까지 선생님들은 애가 탄다. 어떻게 하면 교사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까. 소극적인 다문화 가정 부모님들은 어떻게 교육 활동으로 초대해야 할까. 생활 한국어는 잘 하지만 학습 한국어가 부족한 아이들은 어떻게 도와야 할까.
사극 한 장면을 떠올리고 싶다. 초로의 의원(醫員)이 단정하게 문밖에 앉아있다. 작은 상자를 열고 명주실을 꺼내 한쪽 끝을 궁녀에게 건넨다. 궁녀는 지체 높은 여인의 팔목에 명주실을 묶고 의원은 반대편 끝을 잡고 맥을 살핀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문화적 환경에서 의원은 예의를 지키면서도 진찰이라는 본연의 의무에 정성을 다한다.
여기서 나는, 상대방의 감정과 문화를 존중하여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진맥하는, ‘거리를 두는 예의’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한국이라는 곳을 국경 밖에서 관찰하던 아이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설다. 학교의 구성원이 되도록 교사가 아이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즉각적인 자세가 좋을 수도 있겠다. 학부모님을 학교에 적극적으로 초대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전에 이주배경 학생과 그 가정의 문화와 차이를 존중하며 ‘거리를 두는 예의’부터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손목에 미소, 관심, 존중이라는 무명실을 묶어두는 게 우선일 게다. 그 무명실 끝을 잡고 서로를 연결하며 주의 깊게 기다리고 있으면 그들이 먼저 ‘거리를 두는 예의’를 깨고 다가오지 않을까.
바쁜 아침 출근길, ‘오늘도 거리낌 없이 아이들에게 다가가야지’하는 의욕에 잠깐 제동을 걸어본다. 마음은 로켓처럼 날아가되 아이들의 문화와 감정을 존중하며 ‘거리를 두는 예의’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어떤 존중과 관심의 무명실이 필요할까 고민하며 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