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kshky/22172
며칠 전 고1인 아들이 말했다.
“엄마, 선생님 집은 다 지저분한가 봐.”
무슨 말인가 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이 모두 초등학교 선생님이신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집이 지저분하다고 했다. 우리 집도 늘 지저분하고…. 그러니 선생님들 집은 다 지저분한가 보다고 했다. 모처럼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황당한 편견이라니. 편견은 참 엉뚱하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었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 그건 선생님 집이라서가 아니라, 맞벌이하는 집이라서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일터에서 돌아왔을 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피로감과 그래도 아이들 밥을 챙기고 과제와 준비물을 챙기는 부모의 책임감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다 보면 뒷전으로 밀리는 집안일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아이가 가질 뻔했던 편견은 대화로 손쉽게 깨어졌다.
켜켜이 쌓여있는 편견을 이렇듯 대화로 깨어보자는 움직임이 있다. 책 대신 사람을 빌려주는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 행사가 그것이다. 독자들은 책(사람) 목록을 훑어보고 읽고 싶은 책(사람)을 대출한다. 그리고 그 책(사람)과 30분간 마주 앉아 자유롭게 대화하며 인생을 읽는 것이다.
십여 년 전 한 덴마크 청년은 오해 때문에 소외가 생기고 소외를 방치하면 폭력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자는 뜻에서 제안한 것이 리빙 라이브러리의 ‘사람책’ 대출이다. 사람책으로 초빙되는 사람들은 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다. 영국에서 열린 한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에는 미혼모, 80세에 독립한 할머니, 트랜스젠더 아저씨, 매춘 노동자 등이 사람책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좀 알아주면 안 되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답답함과 서운함을 느낄 때 더욱 그러하다. ‘사람책’이라는 말이 참신하게 다가온다. 누군가가 나와 내 삶을 읽고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외모와 출신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온전히 나를 ‘나’로 읽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입견을 버리고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학교에도 편견과 선입견, 때로는 차별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있다. 다문화 가정 자녀, 특히 이주 배경 학생과 학부모, 탈북 가정, 난민 학생들이 대표적이다.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입견도 때로는 불편한데 이 아이들이 겪는 불편함은 어느 정도일까.
이들에 대한 보여주기식 시혜 정책은 역차별 논란을 일으키곤 한다. 혐오 표현은 배타적 태도를 강화하며 편파적인 보도는 근거 없는 공포를 일으킨다. 무차별적 차별이다.
다문화 사회가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 편견과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풍성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이주민과 선주민(先住民, 먼저 정착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주민의 반대 개념)이 만나는 ‘일상’을 리빙 라이브러리로 삼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들을 이주민 ‘집단’이 아니라 ‘개별’의 사람책으로 대하는 게 시작이다. 우리도 그들의 일상에 사람책이 되어주자.
책은 모두 제목이 다르고, 작가가 다르고, 같은 작가라도 의도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다. 저마다 역할이 있고 주제가 있다. 독자와 만났을 때 가치를 발휘한다.
사람책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 권 한 권 인생이 다르고 저마다 가치가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의 존재와 마음을 읽어줄 독자를 만났을 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할 것이다.
어느 책에서 위대한 독자의 조건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 조건을 사람책에 적용해 보면, 위대한 독자는 사람책을 천천히 읽고, 낯설게 읽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읽고, 두 번 이상 읽고, 이해하며 읽고, 읽지 않은 책인 것처럼 읽는 사람이다. ‘…읽고, …읽고’가 되풀이되는 만큼 사람책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다르게 듣고, 깊이 들어야 한다는 뜻인 듯싶다. 한국인이 되라고 강요(?)하기보다는 서로 많이 읽고 읽히면서 공감해야 한다는 의미일 터이다.
다문화 사회라는 일상에서 위대한 독자의 사람책 독서가 절실하다. 위대한 독자가 위대한 사람책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책은 위대한 독자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위대한 만남의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