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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엘라가 사라졌다고 했죠?”
페리 코모를 닮은 이발사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러게요. 머리 하실 때가 한참 지났는데 어떻게 하고 계시려나요.”
지은은 이 세계의 퀸 엘라에 대해 먼저 파악을 해 보기로 했다. 이 기묘한 세계를 즐기는 실마리도 빠져나가는 실마리도 엘라 피츠제럴드에게 있을 테니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서 사라진 건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윈터 원더랜드에는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아요.’라는 쪽지를 남기고 사라졌대요.”
“언제 사라졌나요?”
“글쎄요. 제가 숫자에 약해서 날짜는 기억은 못 하지만 꽤 한참 되었을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요?”
“그렇죠. 원래 누군가 사라질 때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나요?”
“무슨 사건이 있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전혀요. 아무 이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쪽지를 남겨놓고 사라졌으니까 섭섭한 거죠.”
“근데, 시장님이 사라진 건 섭섭한 것보다는 좀 더 큰 문제 아닌가요?”
“어쩌겠어요. 퀸 엘라가 사라지고 싶어서 사라진걸요. 우리는 퀸 엘라가 원하는 일은 뭐든 다 지지하니까요.”
“잠깐만요, 뭐든 다 지지한다고 사라지는 것까지 지지한단 말이에요?”
“그래야죠. 우리는 진심으로 퀸 엘라를 지지하니까요.”
“그럼 찾고 있지도 않은 거예요?”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동안은 누가 시장인데요?”
“시장은 오직 퀸 엘라뿐이에요.”
“그렇게 중요한 사람을 찾지도 않고, 시장 자리는 그냥 놔둔다고요?”
“윈터 원더랜드는 퀸 엘라가 사라지기 전에도, 사라진 후에도 변한 건 없어요. 말하자면 ‘비포 미싱 엘라’와 ‘애프터 미싱 엘라’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애초에 시장이라는 역할 자체가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그건 다른 문제죠. 시청이 있는데 시장이 없으면 되나요?”
“시장이 딱히 하는 일이 없다면서요.”
“그건 다른 문제라니까요.”
지은은 체셔 고양이와 대화를 하는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실을 겉도는 질문과 대답을 하는 중에 이발사가 미소만 남기고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해졌다. 지은은 질문을 바꾸어보기로 했다.
“퀸 엘라는 어떻게 시장이 된 거예요?”
“퀸 엘라는 윈터 원더랜드의 마스터빌더예요.”
“마스터빌더요?”
“그러니까, 윈터 원더랜드를 만든 사람이에요. 도시를 만드는 사람을 마스터빌더라고 해요.”
아, 그러니까 역할이 딱히 없는 시장이란 창립자 예우 같은 거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도시의 사람들이 창립자를 지지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쿨한걸. 사라졌는데 찾지도 않고 있단 말인가.
“오랫동안 사라졌다면 납치당한 걸 수도 있잖아요. 퀸 엘라가 남겼다는 쪽지는 범인이 남긴 것일 수도 있고요.”
“납치 같은 건 영화에나 나오는 거죠.”
“여기는 범죄가 없나요?”
“범죄가 없는 도시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왜 납치 가능성을 생각 못 해요?”
“그런 건 영화에나 나온다니까요.”
이런. 또다시 루프에 빠지기 전에 새로운 질문을 찾기로 했다. 페리 코모를 닮은 이발사와는 지은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흐름대로 질문을 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문득 질문의 전제를 바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졌다’는 말 때문에 ‘누구도 퀸 엘라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간주한 전제를 뒤집어 보는 거다. 퀸 엘라의 소재 파악을 위한 실마리를 찾으려는 대화에서 빠져나와서 최종적으로 알고 싶은 것, 즉, 퀸 엘라가 있는 곳을 바로 물어보는 거다. 답을 얻지 못한들 손해 보는 것은 없다. 단지 질문 하나일 뿐이니까.
“퀸 엘라는 지금 어디 있어요?”
“바넘앤베일리에서 칩거 중이래요.”
“바넘앤베일리요?”
“퀸 엘라의 별장 이름이에요.”
맙소사. 정말 그냥 바로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니. 게다가 하필이면 칩거하고 있는 별장의 이름이 바넘앤베일리라니. 바넘앤베일리는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이 만든 서커스단의 이름이다. 바넘은 ‘지상 최대의 쇼’를 만든 사람이라는 찬사와 사기꾼이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았는데,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는 한껏 미화되었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 <It‘s Only A Paper Moon>에서는 ‘바넘앤베일리 월드’가 ‘가짜 세상’이라는 뜻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노래와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는 기억은 엄마가 운영하던 카페 ‘페이퍼 문’이다. 지은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혜원 씨의 세상. 그러나 지은은 묘한 우연에 정신을 빼앗기기보다는 이 세계가 가짜이던 진짜이던 미션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해보면서 알게 되는 것도 있는 거잖아.’ 민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지은은 이 상황에서 민지가 했을 법한 질문을 떠올렸다.
“바넘앤베일리에는 어떻게 가면 돼요?”
“공원 서쪽 문으로 나가면 강이 보일 거요. 강을 따라서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곳까지 걸어가셔요. 바다가 나타나면 오른편 해안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분기점에서 66번 국도로 빠져야 숲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조심하세요. 도로 입구가 눈에 잘 안 띄거든요. 바다에 정신이 팔려 해안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놓치기 쉬워요.”
정말로 그냥 바로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66번 국도’라면 냇 킹 콜도 만날 수 있다는 건가?
“66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로 엘라의 별장이 보이나요?”
“국도를 따라 걷다가 숲으로 들어가셔요. 별장이 가까워지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놓칠 수가 없죠. 엘라가 지붕 위에 커다란 종이 달을 띄어 놓았거든요.”
지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머릿속 주크박스에서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It’s Only a Paper Moon>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퀸 엘라는 노래했다. ‘당신이 나를 믿기만 하면 진짜가 된다고(But it wouldn't be make-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종이 달이 그렇게 웃긴가요?”
“아, 아니요. 죄송해요. 칩거 중인 것치고는 상당히 눈에 띄게 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아무렴요. 퀸인데요.”
“감사합니다. 여기서 뭘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덕분에 갈 길을 찾았어요.”
“별말씀을요. 퀸 엘라를 만나고 싶은 분을 도울 수 있어서 제가 감사하죠. 사실 엘라가 쉬고 싶은 것 같아서 아무도 찾고 있지는 않지만, 엘라가 없으면 곤란하긴 해요.”
“왜요?”
“아까 제가 윈터 원더랜드는 엘라가 있어도 없어도 똑같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시장이 왜 필요하냐고 여쭤봤죠.”
“있던 것을 없애거나 없는 것을 만드는 건 마스터빌더만 할 수 있거든요. 처음 뵌 분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꿈이 있어요. 들어 봐 주시겠어요?”
“그럼요. 말씀해 주세요.”
“실은… 전 다른 사람들에게 마법과 같은 순간을 나누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발소 이름도 그래서 ‘비비디바비디부’라고 붙인 거예요. 이발소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어요. 아버지 때는 그냥 우리 성을 따서 ‘롬프 이발소’였거든요. 이발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해 왔던 일이라 제가 잘할 수 있겠다 싶어서 물려받았어요. 윈터 원더랜드에 제가 들어갈 수 있는 초콜릿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제 진짜 꿈은 쇼콜라티에랍니다. 초콜릿이야말로 진정한 마법이죠! 이발사도 보람 있지만, 늘 애니 같은 손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애니의 인생이 비비디바비디부에서 커트를 하고 바뀌었다고 늘 자랑을 하기는 하지만 애니의 인생이 단지 제 커트 때문에 바뀐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애니의 인생이 변하는 타이밍에 우연히 제가 애니의 머리를 자른 거겠죠. 그렇지만 초콜릿은 달라요. 정말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죠.”
“입에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가끔 집에서 초콜릿을 만들어 와서 이발소 손님들에게 드려요. 제 초콜릿을 맛본 손님들은 모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잊고 있었던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는 맛이라고요. 사실 전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퀸 엘라에게 초콜릿 공장을 만들어 달라고 계속 건의를 했었어요.”
“초콜릿 공장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윈터 원더랜드에는 초콜릿 공장이 없어요. 옆 도시에서 초콜릿을 들여오는데, 거기 초콜릿은 뭐랄까…… 너무 달고 화려해요. 거기 마스터빌더가 워낙 화려한 사람이라서요.”
“혹시 옆 도시 마스터빌더 이름이 윌리 웡카인가요?”
윌리 웡카는 로알드 달의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초콜릿 공장 사장이다.
“역시 아시는군요! 하긴 지독하게 유난스러운 사람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수도 있겠네요. 눈이 뒤집히게 특이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그 사람의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아요. 맛있기는 하지만 감각을 강요하는 맛이죠. 어때, 달콤하지, 끝내주지, 환상적이지, 못 견디게 맛있지 않니? 이걸 어떻게 참니! 어휴, 기가 쪽쪽 빨리는 느낌이랄까요. 윈터 원더랜드에는 원래 내 안에 있던 행복한 감정을 깨우는 깊고 은은한 맛이 어울리는 데 말이죠.
퀸 엘라가 공장을 만들면 제가 제일 먼저 지원할 거예요. 이발소를 닫아야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요. 둘 다 할 순 없잖아요. 퀸 엘라를 만나면 빨리 돌아와서 초콜릿 공장을 만들어달라고 해주세요. 시청이 필요 없으니까 공장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그럴게요. 그런데요… 음…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이미 집에서 초콜릿을 만들고 계시다면 이발소에서 파시면 어때요? 이발소 입구에 초콜릿 코너를 만드는 거예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행복한 추억을 담는 초콜릿은 공장에서 만들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왠지 작은 가게에서 쇼콜라티에가 하나하나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둘 다 하실 수 있잖아요. 초콜릿 만드는 이발사,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아서 더 멋질 것 같거든요.”
“초콜릿 만드는 이발사! 쏘 스위트!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그 순간 지은의 머릿속 주크박스에서 페리 코모의 <Magic Moments>가 흘러나왔다.
“저기… 이것도 그냥 드려보는 말씀이기는 한데요… 초콜릿 이름은 ‘매직 모멘트’가 어때요?”
“매직 모멘트?”
지은은 <Magic Moments>의 한 구절을 불렀다.
Magic moments, memories we’ve been sharing
마법의 순간들, 우리가 나눈 추억
“제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페리 코모라는 분이 불렀는데, 이 분도 분명히 이발사님의 초콜릿을 좋아할 거예요. 매직 모멘트를 하나씩 먹을 때마다 시간이 지우지 못하는 추억이 하나씩 생각나는 거예요. 전화기를 붙들고 몇 시간씩 통화하던 밤, 썰매를 타면서 서로 바짝 붙어 몸을 녹였던 겨울, 오락실에서 신나게 게임하고 받은 상품에 으쓱했던 기분, 우리 팀이 골을 넣을 때마다 함께 환호했던 때…. 아, 이건 제 추억이 아니고 <Magic Moments> 가사에 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초콜릿을 하나씩 먹을 때마다 이런 추억의 순간이 떠오르는 거죠!”
“오, 마이 갓, 미즈 비지터! 전 바로 지금 이 순간을 ‘Magic Moments’로 기억하게 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성함을 여쭤보지도 않았네요.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전 로이스 롬프(Royce Romp)에요. 로이스라고 부르시면 돼요.”
“전 이지은이에요. 지은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지은 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퀸 엘라를 만나고 오시면 꼭 비비디바비디부에 들리세요. 비비디바비디부의 첫 번째 ‘매직 모멘트’를 지은 님께 선물하고 싶어요.”
“다녀올게요. 로이스 님의 ‘매직 모멘트’ 기대할게요!”
지은은 길을 떠나며 머릿속 주크박스에서 페리 코모의 <Magic Moments>를 플레이했다.
Time can't erase the memory of
세월은 추억을 지울 수 없어
These magic moments filled with love
사랑으로 가득 찬 마법의 순간들
입안에 머금은 초콜릿처럼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달콤하게 퍼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지은은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