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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마자 지은의 눈앞에 사진 속에서 본 눈 내리는 혼스데일 파크가 펼쳐졌다! 지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열어젖혔던 문은 사라졌고, 문이 있었던 자리에는 거리가 생겨나 있었다. 뺨에 닿는 시원한 공기도,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눈도 느낄 수 있었다. 도저히 서울 시내의 방 탈출 카페일 수 없는 기술력이었다. 시각, 청각, 촉감, 움직임을 모두 이처럼 극도로 리얼하게 구현하는 가상공간은 스타 트랙에서도 24세기 중반에나 등장하지 않는가.
그러나 곧 지은은 이곳을 채우고 있는 극도의 리얼함이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는 진짜 공기와 눈보다 이상적인 공기와 눈이 존재했다. 공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포카리스웨트를 기체로 들이키는 것처럼 청량했다. 하늘빛도 광고에 나왔던 산토리니의 하늘빛 같았다. 현실이라면 이렇게 눈부신 파란 하늘에서 눈이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에선 결정체가 또렷하게 보이는 눈꽃이 파랗게 투명한 공기 속에서 반짝이면서 스노글로브 속 눈 알갱이처럼 천천히 날리고 있었다. 지은은 눈꽃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로 천천히 떨어진 눈꽃은 작은 보석처럼 반짝이다가 공기 속으로 스르륵 녹아들어 갔다.
거리의 모습도 찬찬히 살펴보니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웨스 앤더슨 영화 세트장 같았다. 작은 파스텔톤 집들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맨들스 케이크숍 핑크색 종이 상자 안에 오밀조밀 들어 있는 알록달록한 마카롱처럼 모여 있다. 시몬스 침대 광고처럼 묘하게 비현실적이면서도 편안하고 느긋했다.
지은 앞에는 민트색 벤치가 있었다. 손끝으로 벤치를 톡톡 건드려보았다. 혹시나 과자나 초콜릿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벤치는 치타의 송곳니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딱딱했다. 지은은 일단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은 확실하다. 스타 트랙의 홀로덱(holodeck, 승무원들의 여가 생활를 위한 가상 공간) 쪽은 아닌 것 같고,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나 도로시의 오즈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멀리서 빅밴드가 연주하는 <Winter Wonderland>가 들려왔다. 지은은 습관적으로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돌렸다.
‘1934년, 가이 롬바도와 로열 캐나디안즈 밴드.’
이 세계의 배경음악을 알아맞히고 나니 지은은 왠지 엘리스나 도로시보다는 덜 낯선 곳에 온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실례지만, 옆에 좀 앉아도 될까요?”
부드러운 중저음에 지은은 고개를 들었다.
“손주들을 보고 있는 중이라서요. 여기가 제일 잘 보이는 자리거든요.”
이 사람도 웨스트 마운틴 카페의 바리스타 겸 컨시어지처럼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네, 그럼요. 앉으세요.”
지은은 살짝 옆으로 비켜 앉았다.
“감사합니다. 저기 눈싸움하고 있는 초록색 코트를 입은 아이와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제 손주들이에요.”
주름 사이에 미소가 부드럽게 스며들어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노신사가 지은에게 물었다.
“윈터 원더랜드에 처음 오셨나 봐요?”
“네. 방금 왔어요.”
“참 아름다운 곳이죠?”
“네. 여기 분이세요?”
“윈터 원더랜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살았으니까 여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는 언제 만들어졌는데요?”
“34년이라 그랬나……”
“1934년이요?”
“제가 숫자에 약해서 연도는 잘 모르겠는데 올해 34주년 어쩌고 하는 플래카드가 시청 앞에 있더라고요. 죄송해요. 제가 숫자에는 정말 약해요. 처음 여기 왔을 때가…… 바로 우리 애들이 딱 저런 모습일 무렵이었어요. 제가 나이를 먹은 기억은 없는데, 그 애들은 언제 다 큰 걸까요? 해가 몇 번 떴다 졌을 뿐인데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이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네요.”
노신사의 넋두리에 지은은 이 사람의 얼굴을 본 곳이 떠올랐다.
‘맙소사. 이 얼굴, 《Perry Como : The Classic Christmas Album》 재킷에서 봤잖아. 설마 이 사람이 페리 코모라고?'
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와 함께 3대 크루너로 불리는 페리 코모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넋두리는 그의 대표곡 <Sun Rise, Sun Set>의 가사와 비슷하다.
Is this the little girl I carried?
이 소녀가 내가 안아 키운 아이인가?
Is this the little boy at play?
이 소년이 한창 놀던 그 애인가?
I don't remember growing older
난 나이를 먹은 기억이 없는데
When did they?
아이들은 언제 큰 거지?
그러고 보면 페리 코모도 <Winter Wonderland>를 커버했었지. 문제는 페리 코모가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거다. 그렇다면 페리 코모와 굉장히 닮은 사람일까? 하긴 지은은 페리 코모의 얼굴을 음반 재킷 사진을 통해서만 봤으니 닮았다고 확신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크루너들을 좋아하던 엄마 때문에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이마저도 한국어로 말하는 음성을 들으면서 확신하기는 어렵다. 이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저기……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하시는 지 여쭤봐도 될까요?”
지은은 혹시라도 대스타의 영혼에게 실례가 되는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윈터 원더랜드 최고의 이발사랍니다. 사실, 유일한 이발사이긴 합니다만, 감히 최고라고도 자부해요.”
페리 코모의 별명은 ‘노래하는 이발사’였다. 가수가 되기 전에 이발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리 코모와 닮은 이 사람은 직업이 이발사라니. 미묘한 설정이지만 일단 페리 코모 본인의 영혼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아니란 뜻이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은 혹시 페리 코모의 도플갱어인가? 진짜 페리 코모는 도플갱어를 목격했기 때문에 죽은 거고? 지은의 생각은 놀이공원에서 놓쳐버린 풍선처럼 현실감에서 떨어져 나와 부유하기 시작했다.
페리 코모를 닮은 이발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지은의 생각을 다시 집중시켰다.
“여기 며칠 머무르실 계획이면 저희 이발소에 한번 들리시면 어때요? 저 나무 뒤편에 간판 보이시죠? 비비디바비디부 이발소.”
지은은 입에서 ‘맙소사’가 튀어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Bibidi Bobbidi Boo>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에서 요정 대모가 신데렐라를 공주로 변신시키는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실은 페리 코모가 요정 대모보다 1년 먼저 불렀다. 지은은 자기도 모르게 주문을 읊조렸다.
“살라가둘라 메치카불라 비비디바비디부?”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반갑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커트를 하고 가면 인생이 마법처럼 바뀌길 바라면서 붙인 이름이에요.”
“멋진 이름이네요.”
“아무런 근거 없이 붙인 이름은 아니에요. 제가 머리를 잘라드리고 나서 인생이 완전히 마법처럼 바뀐 분이 계시거든요. 덕분에 이발소도 명소가 되었고요. 그 이후로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크든 작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아서 이름을 바꿨어요. 어때요, 미즈 비지터(Ms. Visitor), 혹시 인생에 마법이 필요하신가요?”
“저요? 여성 손님도 받으세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여성 손님이 더 많죠! 언제 적…… 아! 죄송해요. 여기 분이 아니시죠. 깜빡했습니다. 하긴 여기도 ‘애니 전’에는 이발소는 남자들이 오는 곳이었어요.”
“애니 전?”
“네. 우리 업계에서는 역사를 ‘애니 전’과 ‘애니 후’로 나눠요. ‘애니 전’에는 여성은 미용실, 남성은 이발소에 갔죠. ‘애니 후’에는 성별과 상관없이 커트는 이발소에서, 다른 스타일은 미용실에서 담당한답니다.”
“잠깐만요. 아까 ‘유일한 이발소’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죠.”
“미장원은 몇 군데나 있는데요?”
“미장원도 하나 있어요.”
“그럼, ‘업계’라 하신 게, 미장원, 이발소 합쳐서 두 군데를 말씀하신 거예요?”
“죄송해요. 제가 숫자에는 약해서요. 중요한 건 애니 레녹스는 우리 업계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변화시킨 사람이라는 거예요. 본인의 인생만 크게 변한 게 아니라요.”
“유리드믹스였던 애니 레녹스 말씀이세요?”
“역시 애니는 월드 스타로군요. 애니를 아시는 거죠? 그런데 유리드믹스가 뭐죠?”
유리드믹스가 뭐냐고 묻는 걸 보니 윈터 원더랜드의 애니 레녹스는 지은이 알고 있는 영국 신스팝 듀오 유리드믹스의 메인 보컬이었던 애니 레녹스는 아닌가보다. 그렇다면 여기엔 애니 레녹스의 도플갱어도 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유리드믹스도 <Winter Wonderland> 커버했었다. 지은은 어쩌면 여기는 <Winter Wonderland>를 커버했던 가수들이 모여 있는 세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긴 두 세기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가수들이 불렀으니 모이면 마을 하나쯤은 만들 수 있을 거다.
“얼마 전에 나온 애니 자서전은 읽으셨어요?” 페리 코모를 닮은 이발사는 지은이 자기 마을 출신 월드 스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저희 이발소 이야기가 나와요. 아무래도 애니의 인생은 ‘커트 전’과 ‘커트 후’로 나뉘니까요.”
지은은 어느 타이밍에 사실 이 세계의 애니 레녹스는 모른다는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애니 덕분에 쇼트커트를 원하는 여성 손님들이 저에게 물밀듯 찾아왔죠. 제가 퀸 엘라의 전속 이발사가 된 것도 다 애니 덕이에요.”
“퀸 엘라요?”
잊고 있던 미션이 떠올랐다.
“퀸 엘라가 사라졌다고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