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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출렁인 파도에 요트가 크게 흔들렸다. 의자가 휘청한 순간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가 사라졌다. 지은은 순식간에 레이디버드의 대필 작가에서 손님으로 돌아왔다. 레이디버그가 옆으로 넘어질 뻔한 지은을 잡았다.
“아이고, 미즈 이지, 괜찮으세요? 파도가 세졌나 보네요. 의자가 좀 부실해서 죄송하네요. 하여튼, 승무원들에게 소개받은 게스트하우스에 장기 투숙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아주 간단한 스페인어만 할 수 있는 외국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쓰는 일 밖에 없었어요. 매일 어딘가를 다쳐서 온몸이 반창고와 파스 투성이었죠. 프랑켄슈타인 같았어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무어경.”
“얼마든지요, 미즈 이지!”
“지금은 웃으며 말씀하시지만,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그럼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이런 말은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내가 딱 하고 싶은 만큼 할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에요.”
“후회 안 하셨어요? 이렇게 힘들 바에야 차라리 은행에 계속 있을 것 그랬다고…”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새어 나오는 것이거든요.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고기 핏물에서, 손님이 남긴 잔에 고여 있는 술에서, 찢어진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서 흘러나온 썩은 물에서,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욕을 하고 있는 건 확실한 매니저가 튀기는 침방울에서… 새어 나온 생각이 뇌에 스며들면 그 부분을 생선 내장처럼 도려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상상을 했어요. ‘이 생각은 나를 과거로 돌려보내려는 예전의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거야’라고 마음을 다잡았죠. 내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그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순식간에 나를 다시 장악해 버릴 것 같았어요.”
“'그 녀석이 맞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 아니, 안 새어 나왔어요?”
“왜 안 그랬겠어요. 그럴 때는 그 순간의 나에게 힘을 실어 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그 녀석이 튀어나와서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주제에 은행을 뛰쳐나오더니 주정뱅이들이 깨 놓은 술병이나 치우고 있구나’라고 빈정대면, ‘무엇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면 일단 그것만으로 충분해’라고 대꾸했죠. ‘그래서 도대체 무얼 찾았니?’라고 다시 시비를 걸면, ‘아직 찾고 있는 중이야. 그만두지 않았다면 여전히 찾는 걸 시작도 못하고 있었겠지.’라고 싸웠어요. 거의 매일 그 녀석과 말싸움을 하느라 몸만큼이나 머릿속도 피곤했죠. 가위도 자주 눌렸고요. 그 녀석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꿔가며 악몽 속으로 찾아오더라고요. 아버지의 모습일 때가 가장 많았지만요.”
“전…… ‘그 녀석’에게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무어경처럼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아요.”
“아니에요. 미즈 이지도 그 녀석과 이별할 결심을 한 다음이라면 똑같을 거예요. 은행을 그만두고 배표를 산 것은 순간적인 충동처럼 보였겠지만, 미즈 이지가 말한 것처럼 제 영혼이 시킨 일이잖아요. 그 녀석이 내 본질이 되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내 영혼이 내린 결단인 거죠. 그 녀석이 관자놀이까지 차올라왔지만 아직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내 영혼이 안간힘을 써서 판을 뒤집어 버린 거예요. 홈그라운드는 언제나 그 녀석에게 훨씬 유리하거든요. 모든 사람이 온갖 상식과 합리를 들이대며 내 걱정을 해준다면서 그 녀석 편을 들어요. 어쩔 수 없어요. 그 녀석이 나를 장악하도록 키운 것도, 그 녀석 편만 드는 사람들로 내 주변을 채워버린 것도 나니까. 내가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그 녀석과 싸우자는, 그 결의를 응원해 줄 사람을 그동안 단 한 명도 만들어 놓지 못한 것도 바로 나니까요. 그래서 나한테도 낯설지만, 그 녀석한테도 두려운 곳으로 가는 거예요. 습관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상식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곳으로, 보잘것없는 내 인생 덕분에 충고라는 걸 해 보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해요. 그러면 나도 그 녀석도 맨 몸으로 싸울 수 있게 되죠. 아무것도 못 찾을까 봐 두려워서 버려야 할 것을 쥐고 있으면 안 돼요.
물론 그 녀석이 이기면 떠나온 후에 보낸 모든 시간이 낭비가 되겠죠. 그래서 그 녀석이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내가 놓여 있는 순간이 품고 있는 다른 감각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어요. 술이 딱 한 모금 남은 술잔 바닥에 비친 조명이 아프리카 표범의 눈동자처럼 빛을 내는 순간, 방금 닦은 접시에 내려앉으려다 미끄러진 파리의 슬랩스틱 코미디, 불연(不燃)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여왕처럼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깊은 낮잠에 빠진 리트리버의 콧등을 등반하는 무당벌레, 파도 리듬에 맞추어 우아하게 움직이는 물개들의 벨리댄스…….
그러자 모든 순간이 시(詩)가 되었어요. 시인을 꿈꿨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때는 오히려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어요. 꿈을 섣불리 만들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그 녀석이 ‘그깟 것을 꿈이라고’ 비웃게 하거나, ‘그래서 이번 목표는 얼마나 이루고 있니’라고 조롱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요. 그냥 순간순간 내가 느끼는 감각에 집중했어요. 30년이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나 자신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연습이 필요했어요. 느껴야 할 것 같은 걸 느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은 걸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내가 느낀 감각이 모이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생각할 수 있게 될 것 같았거든요. 글은 순간순간 느끼는 감각에 더 잘 집중하기 위한 도구였어요.
감각을 단어로, 느낌을 문장으로 옮기면서 알게 되었어요. 꿈은 멀리 있는 신기루도 아니고, 이루어야 하는 목표와도 다른 것이었어요. 꿈은 모든 순간에 스며들어 있었어요.
우리는 익숙한 풍경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보지 않고, 너무 낯선 풍경은 생경한 느낌에 압도되어 제대로 보지 못해요. 꿈은 익숙한 풍경 속에도 낯선 풍경 속에도 숨어 있는데 말이에요. ‘나를 찾아봐, 내가 보이니, 나랑 같이 가, 내 손을 잡아 볼래?’ 곳곳에서 속삭이는 꿈 조각들을 모아서 단어로 만들고 문장으로 엮었더니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저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있더군요.”
딸깍. 지은의 머릿속에서 주크박스 버튼이 눌렸다.
“꿈이 걷는 걸 본 적 있나요?”
“네?”
“꿈이 말하는 걸 본 적 있나요? 난 봤죠.”
“오, 세상에…… 미즈 이지. 지금 저에게 즉흥시를 선물해 주는 건가요?”
“그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에요. 가이 롬바도라는 무어경을 아주 많이 닮은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예요.”
“미즈 이지가 좋아하는 노래인가요?”
“아니요. 좋은 줄 몰랐었어요. 애인을 꿈에 비유한 단순한 사랑 노래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무어경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옆에서 걷고, 나에게 말을 걸고, 내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신나게 춤추고 있는 꿈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느껴져요. 꿈이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덥석 잡을 수 있는 사람 말이에요. 무어경이 바로 그런 사람이고요.”
“불러 줄 수 있어요?”
“음. 가사를 다 외우지는 못하는데, 한번 불러볼게요.”
지은은 가이 롬바도의 <Did You Ever See a Dream Walking?>을 불렀다.
Did you ever see a dream walking?
꿈이 걸어 다니는 걸 본 적 있나요?
Well, I did
난 있답니다
Did you ever hear a dream talking?
꿈이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나요?
Well, I did
난 있답니다
Did you ever have a dream thrill you,
꿈이 당신을 막 설레게 한 적이 있나요?
With "Will you be mine?”
“나랑 함께 할래요?”라고 하면서요
Oh, it's so grand and it's too, too divine
정말 굉장하죠? 천국에서 온 것 같아요!
Did you ever see a dream dancing?
꿈이 춤추는 걸 본 적 있나요?
Well, I did
난 있답니다
Did a ever see a dream romancing?
꿈이 신나게 모험담을 늘어놓는 걸 본 적 있나요?
Well, I did!
난 있답니다!
Did you ever see heaven right in your arms,
당신 품에 안긴 천국을 본 적 있나요?
Saying, "I love you, I do!"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서요
Well, the dream that was walking,
걸어 다니는 꿈은 말이죠
And the dream that was talking,
조잘대는 꿈은 말이죠
The heaven in my arms was you.
내 품 속의 천국은 말이죠, 바로 당신이에요
“고마워요! 미즈 이지. 오, 세상에…… 미즈 이지 덕분에 시상이 떠올라요!”
“정말요?”
“실은… 올해는 유난히 시상이 안 떠올라서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늘 여기 도착할 때쯤이면 시를 완성했었는데, 올해는 바다를 건너면서 단 한 줄도 못썼어요. 새해 전야는 다가오는데 이를 어쩌나 싶었는데, 이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아니라 무어경의 도플갱어, 아니, 가이 롬바도의 노래 덕분이지만 계관시인님께 영감을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아니에요. 미즈 이지 덕분이에요. 노래도 물론 좋았지만요. 미즈 이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잊고 있던 감각들이 살아났어요. 내 안의 두려움과 싸웠던 나 자신, 세상을 보는 눈이 떠졌을 때 느꼈던 희열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 동안 제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가 늘 제가 예전에 썼던 시를 조금씩 변주하면서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괴로웠거든요. 미즈 이지, 정말 고마워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그런데 말이에요, 미즈 이지. 제 생각에 그 노래는 미즈 이지의 노래인 것 같아요.”
“글쎄요…… 전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아직’인지 ‘이미’인지는 미즈 이지가 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직’을 떠나보낼 시간이 필요하다면, 조금 더 여행을 해 봐도 좋고요. 저도 ‘아직’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데 열일곱 항구가 필요했으니까요.”
“음…… 어쩌면 지금 저도…… 여행을 하는 중인 것 같아요. 여기에 여행으로 오게 된 건 아니지만요. 퀸 엘라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여기저기를 보면서 좀 천천히 가도 되겠지요?”
“그럼요. 이왕 들어왔잖아요.”
“어딜 가 보면 좋을까요? 추천하는 곳이 있으셔요?”
“여행하는 마음이라면 어디라도 좋지 않을까요? 일단 66번 국도 입구로 데려다 드릴게요.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석양을 바라보면서 걷기 좋은 길이에요. 걷다 보면 가야 할 곳이 나오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처럼요.”
‘66번 국도’라는 말을 듣자 지은은 그제야 이발사 로이스가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만 걷다가 바다 반대 편 66번 국도로 들어가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레이디버그는 어느새 갑판으로 나가 방향키를 잡고 있었다. 지은도 갑판으로 올라갔다. 시원한 바람이 지은을 맞아 주었다. 돕미키호는 새하얀 모래가 빛나고 있는 백사장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자, 미즈 이지, 다 왔어요. 여기는 선착장이 아니라 뛰어내려야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모래가 폭신해서 기분이 좋을 거예요. 저 앞에 샛길 입구가 보이죠? 저기가 바로 66번 국도랍니다. 샛길에 국도라는 이름을 붙여 놓아서 사람들이 많이 헤매요. ‘이게 국도일 리가 없잖아!’라면서 자신 있게 지나쳐 버리죠. 하하하.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무어 경.”
“제가 감사하죠. 미즈 이지 덕분에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는데요. 참, 그리고 역시 전 무어 경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레이디버그라고 불리는 게 저답고 좋아요. 자, 미즈 이지. 점프할 준비되었나요?”
“네!”
지은은 돕미키호 갑판이 번지점프대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 가득 숨을 들이마시고 힘껏 뛰어내렸다. 모래는 슈거 파우더처럼 보드랍고 폭신했다.
“지금부터 마음껏 즐겨요, 미즈 이지!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 거예요!”
지은은 레이디버그에게 힘껏 손을 흔들었다. 멀어져 가는 레이디버그와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가이 롬바도의 <Enjoy Yourself – It’s Later Than You Think>가 흘러나왔다.
Enjoy yourself, it's later than you think
즐기라고, 네 생각보다 늦었어
Enjoy yourself, while you're still in the pink
즐기란 말이야, 네가 아직 한창일 때 말이야
The years go by, as quickly as a wink
세월은 눈 깜짝 할 사이에 흘러가버려
Enjoy yourself, enjoy yourself, it's later than you think
즐기라고, 즐겨, 네 생각보다 늦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