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 피아졸라의 <Milonga for Three>를 들으면서 읽으면 좋습니다.
마르텔플라타행 여객선의 출발 기적 소리가 울렸다. 레이디버그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 미쳤어, 미쳤어. 내 주제에 이런 짓을 하다니. 들어본 적도 없는 곳에 간다고? 여행이라고는 수학여행 밖에 가 본 적 없는 내가?’
레이디버그는 객실로 뛰어 들어갔다. 눈앞으로 펼쳐질 망망대해도, 등 뒤로 멀어져 갈 항구도 차마 볼 수 없었다. 객실은 2층 침대 두 개가 꽉 들어찬 좁은 4인실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인 침대로 파고들었다. 먼저 들어와 있던 세 사람이 인사를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객실 룸메이트들은 레이디버그의 태도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서로 눈치 보며 꺼리던 침대를 레이디버그가 차지해 버린 덕에 사이좋게 나머지 침대를 나누었다. 레이디버그는 눈을 뜨지 않으려 노력했고 곧 깊게 잠들었다.
“저기요.”
누군가가 레이디버그를 깨웠다.
“괜찮으신 건가요?”
눈을 뜨는 게 여전히 무서웠던 레이디버그는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식사라도 하시고 오세요. 조금 있으면 식당 문 닫는데요.”
다시 괜찮다고 하려는데 눈치 없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낫다.
“계속 누워서 식사도 안 하시고, 열은 없고. 죄송해요. 싫어하실 것 같았지만 이마를 한번 만져 보았어요.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승무원을 불러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 아프신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묻지 않을 테니 저녁은 드시고 오셔요. 다른 사람들은 카페에서 보드게임하고 있어요. 저는 이제 씻으러 갈 거고요.”
“아…… 네.”
“다른 사람이랑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는 거 알겠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나오셔도 된다고요. 저도 이제 나갑니다.”
“아, 네. 감사……”
레이디버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객실 동료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문을 열고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는 복도로 나왔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디버그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홀로 식사를 마치고 갑판으로 나왔다. 눈앞에서 검은 하늘에 덥힌 검은 바다가 꿈틀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가 하늘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알 수 없었다. 거대한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암흑의 뱃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딱 한 번 보았던 연극이 생각났다. 아니, 연극은 기억나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떠올린 것은 객석이 암전 되고 무대의 조명이 켜지기 전, 완전한 어둠과 고요함이 찾아왔던 순간이다. 누군가가 첫 장면을 맞이하기 직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게 되는 순간을 매직 타임이라 한다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레이디버그는 마치 그 때처럼 숨을 멈추고 있었다. 다시 천천히 숨을 들이쉬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막연하게나마 이 항해가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인생의 첫 장면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이디버그는 한동안 어둠이 완전히 바다를 덮으면 갑판으로 나와 암전 된 지구를 응시하다가, 수평선 너머로 희미한 빛의 기운이 느껴지면 선실로 들어와 종일 잠을 잤다. 그렇게 몇 군데 항구를 지났다. 레이디버그의 객실에는 떠나는 사람,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아있던 사람이 새로 온 사람에게 밤낮을 바꾸어 지내는 룸메이트에 대해 잘 설명을 해준 덕분인지 아무도 레이디버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어느 날 레이디버그가 여느 때처럼 밤새 갑판에 나와 있다가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뒤를 돌아보니 초로의 여성이 레이디버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머리칼을 올백으로 넘겨 단정하게 쪽을 지고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은 해돋이를 보고 들어가시면 어떨까요?”
“아…… 해돋이요?”
“오늘은 이 말씀을 드리려고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나왔습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해돋이를 보러 나왔다. 갑판으로 걸어 나올 때면 늘 객실로 들어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디버그가 승무원들 사이에서 ‘고독한 붕장어 군’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붕장어는 낮에는 바위틈이나 모래 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일 고독한 붕장어 군의 뒷모습을 보면서 점점 그에 대해 궁금해졌지만,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고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호기심을 눌렀다. ‘고독한 붕장어 군’이라는 별명을 만든 승무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밤바다를 떠돌고 있는 붕장어 군이 바다 어디선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붕장어 때를 만나기를. 그때가 오면 붕장어 떼 사이로 우아하고 민첩하게 헤엄치는 고독한 붕장어 군에게 손을 흔들며 행운을 빌어 주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레이디버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지 못한 배려를 받고 있었다는 데 놀랐다)
그러나 호기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섞인 감정으로 변했다. 그는 레이디버그의 행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날 도착하는 기항지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수평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오늘 도착할 항구에서 내리거든요. 이 배 위에서 보는 해돋이는 저로선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망망대해에서 해돋이를 보는 건 제 평생의 소원이었어요. 한 번만 보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는데, 열흘 내내 보았습니다. 매일매일 같고도 달랐어요. 빛이 점점 더 제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왔지요.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물론 제가 권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해돋이를 보시게 될 날이 있겠지요. 젊으시니까요. 앞으로 저보다 더 긴 여행을 하시겠지요. 오늘이 아니어도, 이 배가 아니어도 어디선가는 보게 되시겠지요. 그러니까…… 제가 아쉬워서 권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내가 그때 권하지 않아서 그 청년이 단 한 번도 일출을 보지 못하고 여행을 끝내면 어떡하나 하는 제 걱정입니다. 오지랖이라면 죄송합니다.”
레이디버그는 명치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이 꿈틀 하는 걸 느꼈다.
“밤바다도 비슷했어요.”
“밤바다요?”
“처음 밤바다를 본 순간, 세상과 제가 단둘이 있는 것 같았어요. 다른 존재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순수한 나 자신이 생겨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나라고 알고 있던 존재와는 다른 새로운 내가 생겨나는 느낌이요. 정확히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만, 저의 밤은 선생님의 해돋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요. 너무 많은 분들께 걱정을 끼쳐 드린 건 죄송하지만요.”
“다행입니다. 정말로 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봅니다.”
“아니요. 오히려 감사합니다. 어둠과 고독의 도움은 충분히 받은 것 같아요. 언제까지나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 남아 있는 여행이 길거든요.”
어둠 속이었지만 레이디버그는 여성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환해졌다고 느꼈다. 그는 천천히, 나직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 곧 해가 뜹니다.”
두 사람은 함께 해돋이를 보았다. 그는 레이디버그의 눈에서 태양빛이 섞인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날부터 레이디버그의 낮과 밤은 다시 바뀌었다. 레이디버그는 배 위와 기항지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낯선 언어가 떠다니는 공기를 호흡했다. 마주치는 모두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승무원이든 승객이든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먼저 나서서 도왔다. 마흔일곱 개의 언어로 ‘좋은 아침!’, ‘도와드릴까요?’, ‘잘 자요~’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델플라타에 가까워지자 거의 모든 승무원이 레이디버그의 새 출발을 응원하고 싶다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레이디버그는 스물다섯 개의 언어로 ‘행운을 빕니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승객 대부분은 전 기항지였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렸고, 마르델플라타에서 내리는 사람은 레이디버그뿐이었다. 부두에는 사람보다 물개가 더 많았다. 작별 인사를 하러 나온 승무원들은 ‘붕장어 군을 맞이하러 물개들이 나왔다’며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물개들 사이로 멀어지는 붕장어 군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레이디버그는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최대한 물개 무리와 잘 어울리는 붕장어처럼 걷고자 했지만, 실제로 비슷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붕장어는 걷지 않으니 말이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해맑은 웃음을 보내주는 물개들 사이에서 레이디버그는 인생의 항로가 완전히 바뀐 것을 느꼈다. 물론, 새로운 여정은 당장 그날 잘 곳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동안 아주 적은 수의 단어로 누구와도 말을 할 수 있게 된 레이디버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