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버그와 춤추는 꿈 (2)

by Angela 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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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찍었어요.”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미도리가 했던 말이다. 헬싱키의 서점에서 독수리 오 형제 주제가 때문에 합석을 하게 된 사치에가 미도리에게 어떻게 핀란드에 오게 되었냐고 묻자, 미도리는 세계지도를 펼쳐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찍었다고 대답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핀란드이던 알래스카이던 타히티이던 미도리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지나왔다는 걸, 다음 장면에서 사치에가 지어준 밥을 한 술 뜨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사치에와 미도리가 핀란드로 오게 된 전사를 알고 싶다면 무레 요코의 동명 소설을 읽으면 된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먼저 작가에게 소설을 의뢰하였고,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소설에는 주인공들이 일본을 떠나게 된 이유가 자세히 나오지만 영화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들이 헬싱키에서 만들어나갈 새로운 일상을 잠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지은은 갑자기 레이디버그라는 사람이 거대한 빙산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봉우리 아래에 가늠하기 어려운 과거가 심해까지 뻗어 있는 걸까.


“어디로든 떠나야 했어요.”


레이디버그는 바로 좀 전까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차분해져 있었다. 지은은 울음이 터진 미도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휴지를 건넨 사치에처럼 레이디버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말없이 레이디버그와 눈을 맞추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은행에 들어갔어요. 그게 아버지의 꿈이었거든요. 아버지는 대출 심사에서 떨어질 때마다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 저에게 빨리 커서 은행에 들어가라고 했었어요. 저도 딱히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어요. 술 취한 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잠들지 않아도 되는 집에서 사는 게 제 유일한 꿈이었거든요. 은행은 두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한 유일한 선택 같았죠.


어찌어찌 입사는 했는데... 제가 손이 엄청 느린 사람이더라고요. 동기들이 점점 매끄럽게 해내는 일들을 전 늘 서툴게 겨우겨우 해냈죠. 사람마다 맞는 일, 맞지 않는 일이라는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어요. 그래도 그냥 버텼어요. 다른 일을 찾아도 똑같이 서툴 것 같았거든요.


두려웠어요. 나라는 사람은 은행 일만 맞지 않는 게 아니라 어떤 일에도 재능이 없는 사람일까 봐요. 뭘 해도 잘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아마 미즈이지 같은 요즘 분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죠.”


“아니요. 이해해요. 너무나요.”


'전 채용 정보 사이트에 주기적으로 들어가지만 정작 끌리는 채용 공고에서는 붙을 가능성보다 떨어질 가능성을 먼저 확인하고 직장 리뷰 게시판에서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 욕이나 꼼꼼히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곤 하는걸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라는 마음속 목소리를 지은은 꿀꺽 삼켰다.


“요즘 분들 말로 번 아웃이 심각했지만, 원래 그런 거려니 했어요. 아버지가 늘 그랬거든요. ‘사는 건 원래 엿 같은 거란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그 말을 반복했어요. 드디어 방을 따로 쓸 수 있는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도 아버지는 다른 말을 할 줄 모르더라고요. 저는 매일 같은 말만 하는 아버지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언제부터인가 그 한 문장 밖에 말할 줄 모르게 되어 버린 것도 몰랐어요. 머릿속에서 그 문장만 남기고 모든 걸 지워버린 아버지는 어느 날 밤에 집으로 오는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뺑소니를 당해 돌아가셨어요.”


지은은 자신이 사치에처럼 자연스럽게 위로할 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레이디버그가 자연스럽게 지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눈짓을 보냈다.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 후에 출근을 했어요. 여객선 터미널 안에 있는 출장소에서 근무할 때였죠. 창구에 앉자마자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제 모습을 보고 놀란 동료들이 말을 걸었지만, 거대한 벌집 안에 있는 것처럼 웅웅웅 소리만 들렸어요. 자리를 박차고 창구 밖으로 나가니까 그제야 숨이 터졌어요. 마침 환전을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저를 따라 나오려던 동료들은 창구로 돌아가야 했고, 저는 그곳을 벗어나서 뛰었죠.


저도 모르게 도착한 곳은 매표소 앞이었어요. 거대한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어요. 창구로 다가가서 가장 멀리 떨어져 보이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로 갈 거라고 가장 빨리 출발하는 배표를 달라고 했어요.”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마르델플라타였군요.”


“맞아요. 매표 담당자가 놀라서 묻더군요. 거기는 마르델플라타라고. 지구 반대편이라고. 저기까지 가는 배는 있지만 항구가 열린 이래로 한 번도 거기까지 가는 표를 팔아 본 적이 없데요. 마. 르. 델. 플. 라. 타.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왠지 도시 이름이던 나라 이름이던 섬 이름이던 처음 들어보는 곳이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만일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알래스카나 타히티였다면 좀 실망하셨을까요?”


지은은 사치에와 미도리의 대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글쎄요. 알래스카나 타히티라면… 실망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또다시 두려워하는 버릇이 치고 나왔을 거예요. 어설프게 알고 있는 정보가 묵직하게 저를 압도했겠죠. 저는 그런 습성이 있었거든요.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저를 깎아내리는 데 써버리고는 했어요. 알래스카는 1년에 65일은 해가 전혀 뜨지 않는 극야(極夜)라던데, 그런 기나긴 어두움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타히티의 주요 산업은 관광과 농업이라던데, 농업은 해 본 적도 없고 관광 분야에서 나 같은 성격으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그냥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게 되죠.”


“맞아요. 미즈이지. 결국 가위눌릴 때처럼 꼼짝할 수 없어져요. 그리고 결국 그 시간을 떠나보내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후회하죠.”


“잊을만하면 주기적으로, 마치 내 모든 실패가 알래스카나 타히티에 가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요.”


“맞아요. 미즈이지. 그런 면에서 저는 운이 좋았던 거예요. 마르델플라타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가 없으니까 걱정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거죠. 제가 그 항구에서 마르델플라타로 가는 최초의 사람이 되는 것도 흥분되었어요. 최초, 유일… 그런 건 제 인생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까요.


마르델플라타행 여객선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했어요. 열일곱 항구를 들려 도착하는 긴 여행이니 단단히 준비하고 오라고 하더군요. 바로 출장소로 돌아가서 ‘저 지금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죠. 숨도 못 쉬고 퍼런 얼굴로 뛰쳐나간 직원이 돌아와서 그만두겠다고 하니 다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어요. 차장은 일단 병가를 내고 쉬다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했죠. ‘아니요. 지금 그만두겠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마르델플라타로 떠납니다.’ 그러자 부장이 사자후를 토하더군요. 거대한 고릴라가 울부짖는 것 같아서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들었지만 아마 욕이었겠죠. 출장소가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차장은 50센티 쇠자를 휘두르며 저에게 돌진하는 부장을 막아서고 주임은 내 앞으로 뛰어오고, 대리는 빨리 환전해 달라고 창구 유리벽을 두드리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난리였죠. 그런데 신기한 건 그 모든 게 저와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어요. 분명히 제가 그 장소에 있는데, 저를 뺀 모든 공간이 마치 희끄무레한 브라운관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죠. 아, 미즈이지는 브라운관이 뭔지 모르죠?”


“아니요. 알아요. 어렸을 때 엄마 가게에 있었어요.”


오래된 팝송만큼 오래된 물건을 좋아했던 혜원 씨는 어디선가 구해 온 브라운관 TV를 페이퍼 문에 가져다 놓고 종종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에서 음악이 나오는 장면을 녹화한 VHS 테이프를 돌렸다.


“오, 그래요? 어쨌거나 차장이 저와 지점장 사이를 몇 번 오고 가더니 퇴사 처리를 끝냈어요.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은 자기 소관 직원을 빨리 내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귀찮아질 것 같은 건 빠르게 치워버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상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를 위해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만들어 내죠. 그러나 사실 차장 자신을 빼고는 누구한테도 좋아지는 건 없죠. 왜 웃어요, 미즈이지?”


“저희 팀장이랑 똑같아서요.”


“거의 30년도 넘은 일인데 여전히 직장이라는 곳에는 그런 사람은 있군요.”


“아마 어떤 평행 우주로 이동하던 그런 사람은 반드시 나타날걸요.”


“맞아요. 어쨌거나 그 사람 덕분에 바로 퇴사를 할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이 재빠르게 찾아낸 무슨 규정 때문에 퇴직금은 한 푼도 못 받았지만요. 제가 뭘 위반해서 큰일이 난 건데 무사히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라고 하더라고요. 고맙다고 했어요. 진심이었어요.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까요. 출발 전까지 그동안의 생활을 다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거든요. 막상 집에 와보니 정리할 것도 별로 없었지만요. 정리하는 시간보다 여권을 찾는 시간이 더 걸렸죠. 한 번도 쓸 일이 없어서 어디다 두었는지 도대체 모르겠더라고요.”


“인생 첫 여행으로 인생을 바꾸신 거네요.”


“글쎄요. ‘여행’이라기보다는 ‘도망’이었어요. 인생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요. 단지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된 거죠. 뭘 찾아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뭘 버려야 할지는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머리보다 마음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것이고요.”


“영혼이 속삭인 게 아닐까요? 일단 거기서 나오라고요.”


“오, 미즈이지! 영혼의 속삭임! 그렇지 않아도 자서전을 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꼭 인용할게요. 아, 물론, 미즈이지가 괜찮다면요.”


“물론이죠!”


지은, 아니, 미즈이지는 어느새 레이디버그 시인의 자서전 대필 작가가 되어 있었다. 턴테이블 위에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Rough Dancer and the Cyclical Night》 음반이 돌아가고 있다. 책상에는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가 놓여 있다. 지은은 <해피투게더>에 삽입되었던 <Milonga for Three>의 첫 음에 맞추어 반도네온 건반을 누르듯 동그란 자판을 깊고 길게 눌렀다.


Winter Wonderland _smithcorona.jpg Chat GPT가 그려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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