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버그와 춤추는 꿈 (1)

by Angela 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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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강 하구에 다다른 듯했다. 이발사 로이스가 말했던 대로 해안 도로가 나왔다. 해안 도로 아래쪽 요트 선착장이 지은의 눈을 끌었다. 새하얀 나무 데크가 새파란 물결 위에서 수평선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가늘고 길게 뻗어 있었다. 지은은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발자국이 찍히면 안 될 것 같은 하얀색에 압도되어 구두를 벗었다. 보송보송한 데크를 밟고 올라서는데 요트 한 척이 보였다.


날카롭고 새빨간 삼각돛을 단 요트는 새파란 배경을 가르며 선착장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 해 질 녘은 아니지만 지은의 머릿속에서는 <Red Sails in the Sun Set>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걸 누가 불렀었지? 플래터스! 그런데 머릿속 음악은 플래터스의 <Only You>가 재생되면서 다섯 멤버가 뱃전에서 지은을 향해 손을 내미는 영상이 제멋대로 떠올랐다. ‘잠깐잠깐, 집중, 집중! <Red Sails in the Sun Set>은 루이 암스트롱이랑 냇 킹 콜도 불렀잖아.’ 지은이 노래를 부른 사람들을 더 떠올려 보려고 하는 사이 요트가 선착장에 닿았다.


요트에서 내린 노신사는 루이 암스트롱도 냇 킹 콜도 플래터스 멤버 중 한 명도 아니었다.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도대체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광대가 잔뜩 올라간 미소를 머금고 지은 쪽으로 오고 있었다. 문득 윈터 원더랜드에 처음 들어왔을 때 들려왔던 음악이 생각났다. 가이 롬바도와 로열 캐나디안스 밴드! 지은은 음반 재킷에서 보았던 가이 롬바도의 사진과 눈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서 매칭해 보았다. 동일 인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오 세상에, 저를 마중 나왔나요?”


요트에서 내린 가이 롬바도는 광대를 한껏 부풀리며 지으며 지은을 반겼다.


“아, 아니, 저, 음…… 안녕하세요?”


지은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며 인사를 했다.


“오! 마중 나오신 분은 아닌 것 같군요. 하긴 도착하는 날짜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마중을 나와 있는 것도 이상하죠. 그래도 어쨌든 반갑습니다. 미즈……?”


“이지은이요.”


“미즈 이~~~지은. 반가워요.”


가이 롬바도를 닮은 사람은 지은의 이름에 이탈리아어를 닮은 억양과 찐한 Z발음을 섞어 ‘i:zion’처럼 발음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윈터 원더랜드 밖에서 오시는 건가요?”


지은은 웨스트마운틴 카페 말고도 윈터 원더랜드를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 사람은 수평선 너머에서 왔으니 어쩌면 바닷길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답 대신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오 세상에! 저를 모르는 분이군요! 반가워요! 윈터 원더랜드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아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걸 보니 생전의 가이 롬바도만큼이나 유명 인사인가보다. 지은은 가이 롬바도를 알고는 있지만, 자기를 몰라보는 사람을 이렇게 반가워하니 어쩐지 아는 척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지은이 알고 있는 가이 롬바도는 1977년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 이 사람은 지은이 모르는 사람이 맞다.


“유명 인사가 되면 좋은 점도 많지만요. 무엇보다도 이렇게 요트도 살 수 있으니까요. 돛 색깔이 강렬하죠? 제가 직접 염색했어요.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저는 시인이면서 셀럽이기도 해서요. 시간이 항상 모자라죠. 문제는 시 쓸 시간도 모자라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일부러 저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사는 거예요. 시를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요트 몸통 페인트칠도 직접 할 수 있고요! 원래는 노란색이었는데요, 새빨간 돛을 강조하려면 몸통이 새하얘야 할 것 같아서 칠해버렸죠. 멋지죠? 배 이름은 돕 미키(Dob Micky)라고 붙였어요. 어떻게 만든 이름인지 알겠어요? 모비 딕(Moby Dick)의 애너그램이에요! 굉장하죠?


아,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죠? 아! 시인의 고독! 저는 고독한 시인이 되기 위해 계속 이사를 다니죠. 그래도 금방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요. 이럴 바에야 이사를 다니는 대신 좀 더 큰 배를 마련해서 바다 위를 돌아다니며 살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저는 장편소설은 쓰지 않으니까 책상이 계속 흔들리는 것쯤은 괜찮거든요. 파도 리듬에 맞춰서 구상을 하다가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가죠. 아, 펜으로 쓰는 게 아니라 타자를 치니까 일타휘지(一打揮之)라고 해야 정확하려나요? 하하하!”


시인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중후한 외모와는 달리 핀볼 머신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구르는 쇠구슬처럼 산만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셀럽인 게 싫다는 건 아니에요. 정말 싫으면 시를 발표하지 않으면 되거든요. 사람들에게 잊히는 건 쉬운 일이에요. 정말 잊히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말이죠. 아주 잠깐만 활동을 중단하면 돼요. 그런데 저는 꼬박꼬박 시를 발표하고, 심지어 꽤 다작이랍니다. 시만 발표하나요, 에세이도 쓰고, 유튜브랑 팟캐스트도 하거든요! 어쨌든 유명세 덕분에 이렇게 전용 선착장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를 모르시면서 여기에는 어쩐 일로 미즈……?”


“이지은이요.”


“미즈 이~~~~지은. 반갑습니다! 저는 레이디버그 무어라고 합니다. 필명 같지만 실명이에요. ‘실명이 필명 같은 작가’ 1위로 뽑힌 적도 있어요. 2위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였는데, 제가 근소하다고는 보기는 어려울 수 있는 차이로 제쳤죠. 실명이 필명 같다는 건 단순히 이름이 특이하고 발음하기 어렵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니까요. 굳이 정확히 설명하자면 깊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오, 세상에. 윈터 원더랜드에서 자기소개를 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감격스럽네요.”


“전 여기가 처음이라서요. 유명하신 시인을 몰라 뵈어서 죄송해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중요한 건 아니지만 확실히 하는 편이 좋기 때문에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냥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 계관시인이랍니다. 계관시인. 오, 세상에, 제 입으로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다른 사람 앞에서 발음해 볼 수 있다니! 거울 앞에서는 만 번도 넘게 해 봤지만 사람 앞에서는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계관시인은 남들이 저를 부를 때 쓰는 경칭이니까 제가 직접 발음해 볼 기회가 없는 거죠. 중요한 건 기품이니까요.”


지은은 윈터 원더랜드 시민들이 기품보다는 가벼움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 사람이 계관시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계관시인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무어 경.”


“세상에, ‘경’이라뇨. 그냥 레이디버그라고 불러 주세요.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전 그냥 계관시인이 아니라 윈터 원더랜드 역사상 최초의 계관시인이자 유일한 계관시인이라는 거예요.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겠지만 정보는 정확해야 하니까요. 시인은 사실이라는 모호한 바위에서 진실을 조각해 내는 직업이거든요. 시를 쓰시나요, 미즈 이지?”


지은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정보는 정확해야 하니까 ‘내 이름은 이지은’이라고 고쳐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지은’에서 ‘이지(easy)’를 끄집어낸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어릴 때 써 본 적은 있지만……”


“그렇다니까요. 어릴 때는 누구나 시인이에요. 도대체 모두들 태어날 땐 시인이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관두게 되는 걸까요. 그런데 말이죠.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저는 반대였어요. 서른네 살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시를 쓰지 않았어요. 그림일기에 시 비슷한 것조차 썼던 적이 없어요. 일기 숙제할 때 흔히 쓰는 전략이잖아요. 뭘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한 페이지는 채워야겠고, 산문으로 쓰면 너무 별거 아니어서 괜히 어미 좀 바꾸고 줄 바꿈을 계속해서 좀 있어 보이게 하는 거 있잖아요. 뭔지 아시죠? 저는 그런 것조차 한 번도 안 했다니까요.


그런 면에서 제가 모차르트보다 훨씬 더 스토리성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아, 오해하시면 안 돼요. 계관시인이라고 해서 제가 제 자신을 모차르트를 넘어선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죠. 나도 모차르트처럼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에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냐는 거죠. 그건 아무리 늦어도 다섯 살 정도면 판가름이 나는 문제잖아요? 베토벤 아버지 정도 되어야 내 아들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고요. 모차르트는 인생(人生)이 아니라 신생(神生)이라고 해야 맞는데, 사람들은 신화보다는 동화 쪽에 공감하기 쉽잖아요?


그렇다고 동화 같은 저의 스토리가 문학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었을 거라는 건 아니에요. 데뷔할 때는 물론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아주 조금은 생각해 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작품성보다 화제성으로 오래갈 수는 없는 거거든요. 저는 신인상도 받았지만 신인상만 받고 끝난 사람이 아니라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작품 활동으로 계관시인까지 된 거니까, 제 독특한 성공 스토리가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저를 그것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미즈 이지가 여기 분이 아니라서 잊으셨을까 봐,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정보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알려드리려고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는 윈터 원더랜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계관시인이랍니다.”


레이디버그는 글자 그대로 숨 쉴 틈 없이 말을 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도 의아했다. 세상 모든 곳에 자기를 알리기 위해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거나 레이디버그는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말이 떠오르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니, 그중 일부를 글로 쓰고, 그중에서 아주 일부만 다듬어 발표해도 다작 시인이 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지은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레이디버그는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유일한 계관시인이라는 걸 제가 자랑스러워한다고 많이들 오해하는데, 사실 그건 별로 자랑스럽진 않아요. 생각해 보면 슬픈 거예요. 동료가 없다는 거잖아요. 사람들은 계관시인을 존경하지만 직접 시를 쓰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게 현실이에요.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꾸준히 시를 쓰고 있는데 아무도 읽지 않는 걸까요?


오 세상에… 이게 훨씬 더 슬프네요.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어요. 계관 시인은 고독해야 하지만 불행하면 안 되거든요. 제 시를 읽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이 전염되면 큰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밝고 행복한 생각을 수시로 떠올려 줄 필요가 있어요. 사람들이 제 시를 읽으면서 밝고 행복한 느낌에 젖어들 수 있게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우리 도시 최초의 계관시인이 되었을 때 느꼈던 뿌듯하고 행복한 느낌을 계속 떠올리죠. 할 수만 있다면 알약으로 만들어서 보급하고 싶어요. 생각해 보세요, 미즈 이지. 사람들이 저와 같은 성취를 하지 않고도 저와 같은 높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인류에 그보다 더 큰 기여는 없을 거예요. 인간의 자존감 문제를 해결하면 범죄와 전쟁이 완전히 없어질 거라고요!


어쨌든 전 퀸 엘라에게 황금 월계관을 받은 날은 평생 잊을 수 없어요. 매일 밤 아주 또렷하게 그날의 꿈을 꿔요. 꿈을 꾸려고 월계관을 머리맡에 걸어 놨거든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시로써 긍정적인 기분을 퍼뜨려야 할 사람이니까, 일종의 소명 같은 거죠. 혼자 느끼기 아까운 감각들을 널리 나누는 거예요. 아, 황금 월계관 보고 싶지 않나요, 미즈 이지? 보여드리고 말고요! 요트에 같이 들어가시죠, 쉘 위?


“아, 네. 감사합니다. 레이디버그님.”


“오 세상에. 레이디버그 ‘님’이라뇨. 어색하기 짝이 없네요. 제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서, 초면에 죄송하지만, 언어가 어색한 건 참을 수 없어요. 자, 그렇다면 어떻게 바꾸면 어색하지 않을까요? 여기선 모두 저를 그냥 레이디버그라고 불러요. 이름이 귀엽고 애칭 같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사랑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저도 모든 포스팅에 해시태그를 ‘#ladybug’로만 하거든요. 계관시인이 되었다고 ‘#계관시인’, ‘#sir_moor’ 이러면 너무 좀 그렇잖아요? 뭔지 아시죠?


그래도 미즈 이지는 아무래도 여기 분이 아니셔서 레이디버그라고만 부르기가 어색하신 게 당연해요. 평생 만나볼까 말까 한 계관시인인데, 어떻게 이름만 불러. 뭔가 되게 아닌 것 같고, 큰 결례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너무 당연해요. 미즈 이지를 생각해서, 저는 호칭에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고, 무어 경 이런 거 너무 ‘올드’하다고 생각하는데, 미즈 이지가 굳이 저 때문에 어색함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요! 그냥 무어 경이라고 부르세요. 저는 괜찮아요. 감수해야죠. 계관시인의 무게라는 게 이런 거죠. 미즈 이지를 위해서 제가 적응할게요. 자, 편하게 불러보세요 미즈 이지.”


“네. 무어 경.”


이미 미소로 잔뜩 부풀어 있던 레이디버그의 광대가 더 부풀었다. 지은은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자기애를 뿜어대는 레이디버그가 귀여웠다. 레이디버그의 시를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머리 위로 유쾌한 시를 담은 말풍선이 퐁퐁퐁퐁퐁퐁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은은 레이디버그와 함께 돕미키호에 올랐다. 파도의 리듬에 맞추어 움직이는 느낌이 경쾌했다.


“선실로 들어갈까요?”


지은은 레이디버그의 뒤를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선실은 아주 작았지만 누군가의 집에서 기능적인 부분들을 뽑아서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로 빼곡히 차 있어서 충분히 바다 위를 떠돌며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부엌 앞에는 소파와 테이블이 있고, 소파 뒤 벽에는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서른 장이 넘는 사진들이 전부 같은 구도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 뒤에 “Happy New Year!”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사진은 연도순으로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윗줄에 붙어 있는 사진 속 레이디버그는 청년이다. 사진들을 따라 레이디버그가 점점 나이를 먹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는 지은에게 레이디버그가 말했다.


“윈터 원더랜드 송구영신 이벤트예요. 열두 시 오십오 분에 제가 새로 지은 시를 낭송해요. 시 낭송은 정확히 열한 시 오십구 분 사십구 초에 끝나야 해요. 시간에 딱 맞춰 시를 써야 하죠. 보통 일이 아니에요. 작품성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죠. 고도의 스킬이 필요해요. 1초라도 길거나 짧으면 안 되죠. 그렇게 시간에 딱 맞춰서 시 낭송이 끝나자마자 바로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게 되어 있거든요. 10, 9, 8, 7, 6, 5, 4, 3, 2, 1…… 해피 뉴이어!”


<Auld Lang Syne>을 부르나요?” 지은은 가이 롬바도의 애칭이 ‘Mr. New Year’s Eve’라는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가이 롬바도와 그의 밴드는 1929년부터 거의 반세기 동안 매년 새해 전야 생방송에서 연주했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만 명이 그의 연주에 맞추어 <Auld Lang Syne>을 불렀다고 한다.


“아니오. 윈터 원더랜드 시가(市歌)를 불러요.”


“시가가 있어요? 혹시 <Winter Wonderland>인가요?”


“물론이죠! Sleigh bells ring. Are you listening?”


지은은 윈터 원더랜드의 새해 전야에 울려 퍼지는 <Winter Wonderland>는 누구 버전이 제일 잘 어울릴까 상상해 보았다. 한 사람을 꼽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결국 머릿속에서는 <We Are The World>처럼 수많은 뮤지션들이 모여서 <Winter Wonderland>를 부르는 장관이 펼쳐졌다.


1984년 대기근이 일어난 아프리카를 돕고자 영국과 아일랜드 뮤지션들이 한 데 뭉친 Band Aid Project에 영향을 받아 미국 뮤지션들이 USA for Africa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여 발표한 명곡이다. 퀸시 존스가 프로듀서,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 공동 작곡으로 다이애나 로스, 티나 터너, 신디 로퍼, 스티비 원더, 레이 찰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밥 딜런 등 당대 최고 뮤지션들이 모여 팝 역사의 기념비적인 장면을 만들었다. (밴드에이드를 기획한 밥 겔도프도 코러스로 참여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싱글로 꼽힌다. 로스앤젤레스 A&M 리코딩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Sleigh bells ring. Are you listening?

징글벨, 듣고 있나요?


눈 덮인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썰매 같은 음색으로 라이오넬 리치가 첫 소절을 시작한다. 산 중턱에 숨어 있는 통나무집에서 썰매를 타고 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통닭을 오븐에 넣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캐니 로저스가 다음 소절을 받는다. 썰매를 탄 아이들의 뺨에 닿는 겨울 공기 같은 청량한 다이애나 로스의 목소리가 귀에 와 찰랑 와닿는다.


캐니 할아버지네 통나무집 식탁에 앉아 있던 디온 워릭윌리 넬슨이 듀엣을 시작한다. 디온 워릭의 목소리가 깊고 짙은 쌉싸름한 다크초콜릿 풍미라면 윌리 넬슨의 음색은 텃밭에서 막 뽑은 유기농 야채를 직화로 구운 맛이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묘하게 어울린다.


모두 바쁘게 크리스마스 성찬을 준비하는 데 도울 생각은 조금도 없이 벽난로 앞에서 늘어져 있던 알 자로우가 갑자기 능글맞게 끼어든다. 목젖으로 멜로디를 핥으면서 노래를 불러나가는 바람에 ‘We'll have lots of fun With Mr. Snowman’이라는 가사가 ‘눈사람 아저씨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야’가 아니라 ‘미스터 스노우맨과 재미 좀 볼까’가 되어 버린다.


알 자로우가 장르를 바꾸자 나도 끼어볼 만하겠다는 듯 저니의 보컬 스티브 페리가 나와서 ‘크리스마스인데 사랑 좀 나눠볼까’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I wanna be with you, I wanna touch your face”라는 원곡과 어울리지 않는 끈적거리는 코러스까지 섞어 가면서 말이다.


아이들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 가는데 분위기가 야릇하게 흘러가자 보다 못한 밥 딜런 할아버지가 등판한다. ‘이봐 젊은이들, 눈이 오면 설레는 건 자네들뿐 이겠는가? 모두 함께 즐겨야 하니 어서 전체관람가로 돌려놓잔 말일세!’ 밥 딜런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가수들이 모두 코러스에 합류한다. 밥 딜런은 레이 찰스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끈다. 레이 찰스가 이끄는 합창이 아우트로(outro)를 장식한다.


“미즈 이지, 미즈 이지?”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 지은은 A&M 리코딩 스튜디오에서 돕미키호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안쪽으로 들어오셔요.”


레이디버그를 따라 들어간 안쪽 방은 침실 겸 서재였다. 침대의 반 정도를 접었다 펼 수 있는 책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 옆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책상에 비스듬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레이디버그가 자랑했던 황금 월계관이 걸려 있었다. 월계관 옆에는 퀸 엘라가 레이디버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첫 번째 감격스러운 순간은 언제였는데요?”


“리처드 스미스 신인문학상을 받았을 때예요. 제가 시인이 된 순간이죠.”


“리처드 스미스? 아! <Winter Wonderland> 작사가!”


“그렇죠. 우리 시가도 만드셨고, 윈터 원더랜드의 마스터빌더니까요.”


“어? 퀸 엘라가 마스터빌더라고 하던데요?”


“윈터 원더랜드가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쭉 퀸이 시장을 해서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실제 마스터빌더는 리처드 스미스예요. 만들어 놓고는 엘라에게 맡기고 사라졌죠.


“어디로요?”


“글쎄요.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는데 모르겠어요. 마스터빌더들은 자기가 만든 도시에 쭉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계속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없진 않아요. 리처드 스미스도 어디선가 다른 도시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퀸 엘라가 마스터빌더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문학상을 만들었는데 그걸 제가 받은 거예요.”


“그때 사진은 없나요?”


“그때는 아쉽게도 시상식에 참석을 못 했어요.”


“왜요?”


“지구 반대편에 있었거든요. 한창 식당에서 일하던 중이었는데, 전화가 온 거예요. 하숙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거기서 식당 번호를 알려준 거죠. 한참을 못 알아들었어요. 주방이 시끄럽기도 했지만…… 도저히 저한테 생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믿을 수가 없었죠. 전날 불에 데었던 손이 따끔거리지만 않았어도 그냥 기분 좋은 꿈이려니 했을 거예요.”


“아, 그럼 그때는 전업 시인이 아니셨던 거군요?”


“전업 시인은커녕 그냥 시인도 아니었어요.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살던 때니까요. 낮에는 식당 주방 일하고 밤에는 탱고 클럽에서 일할 때였어요.”


“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계셨어요?”


“오, 미즈 이지, 놀라운데요! 마르델플라타라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남쪽으로 4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에요. 미즈 이지, 설마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나요?”


“아, 아니요, 아니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주인공이 생각나서요.”


지은이 떠올린 사람은 <해피투게더>의 아휘였다. 양조위가 연기한 아휘와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은 홍콩에서 지구 반대편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휘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식당, 탱고 바, 정육 공장….


문득 지은은 마드델플라타에서는 레이디버그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지금은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전구처럼 유쾌하게 깜빡이고 있지만, 혹시 마르델플라타에서는 아휘처럼 슬픈 눈을 하고 있었을까? 지은은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해피투게더> OST 중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Tango Apasionado>를 배경음악으로 깔아 보았다. 음악이 흐르자 눈웃음에 파묻혀 있던 레이디버그의 짙은 눈이 보였다. 아휘의 눈만큼이나 가득 슬픔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깊은 눈이었다.


“한창 관광객들이 몰리는 철이었어요. 휴가를 낼 수가 없었죠.”


“아쉬우셨겠어요.”


“아니요. 전혀 실감이 안 났거든요. 무섭기도 했고요. 나한테 생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휴가를 낼 수 있었어도 못 갔을 거예요. 시상식장에 도착했더니 착오였다, 너 따위가 수상자일지 없지 않느냐며 쫓겨나는 악몽을 매일 밤 꿨거든요. 결국 트로피를 우편으로 받았는데, 오 세상에…… 트로피에 정말로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예요. 그날 밤부터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았죠.”


“마르델플라타에는 어떻게 가시게 된 거예요?”


“손가락으로 찍었어요.”


Winter Wonderland _red sails.jpg Chat GPT가 그려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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