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번 국도에서 석양을 보다 (1)

by Angela 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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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번 국도는 레이디버그가 말한 대로 산책로에 가까웠다. 폭이 좁은 것은 둘째치고 바닥에는 오렌지색 벽돌이 깔려 있었다. ‘이거 원, <Route 66> 가사처럼 “자동차로 서쪽으로 갈 계획이라면(If you ever plan to motor west)” 이 길로는 무리인걸.’


차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길이지만 명색이 66번 국도라서 픽사 애니메이션 <카>가 떠올랐다. <카>는 1등 만을 목표로 살던 레이싱 카 라이트닝 맥퀸의 이야기이다. 맥퀸은 레이스에 출전하려고 트레일러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사고에 휘말려 66번 국도변에 있는 쇠락한 마을 래디에이터 스프링스에서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 래디에이터 스프링스는 과거에는 번창한 마을이었지만 고속도로가 뚫리자 66번 국도를 지나는 차들이 없어지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하루빨리 마을을 벗어날 궁리만 하던 맥퀸은 주민들의 따뜻함과 고속도로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들면서 인생에는 우승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은은 우연히 들어선 샛길에서 인생이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바뀌는 되는 것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허구의 세계를 통해 반복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라고. 그런데 막상 홧김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려다 윈터 원더랜드에 들어오고 나니, 그 모든 허구가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여기서 맥퀸처럼 인생이 변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걸까?’


지은은 불안도 기대도 일단은 접어 두기로 했다. 레이디버그가 응원해 준 것처럼 ‘걷다 보면 가야 할 곳이 나오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될’ 여행이라면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일어난 꿈같은 것일지라도 끝까지 즐겨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은 <Route 66>을 개사하여 부르며 느긋하게 드라이브하는 맥퀸이 된 기분으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If you ever plan to stride to west
성큼성큼 걸어서 서쪽으로 갈 계획이라면

Travel my way, take the brick way that’s the best
내가 갔던 길로 가요, 제일 좋은 벽돌길로

Get your kicks on route 66
66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요


노래가 끝날 때쯤 하늘이 서서히 66번 국도와 같은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66번 국도에서 맞이하는 오렌지색 하늘이라니, 냇 킹 콜의 등장을 위한 완벽한 세팅이다!’ 지은은 머릿속에서 냇 킹 콜의 <Orange Colored Sky>를 플레이하고, 냇 킹 콜과는 이름과 직업은 다르겠지만 냇 킹 콜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날 준비를 했다.


I was walking along, minding my business

난 걷고 있었어, 골똘히 생각에 빠져서
When out of an orange colored sky

그때 갑자기 오렌지색 하늘에서
Flash! Bam! Alakazam!

번쩍! 쾅! 수리수리마수리!
Wonderful you came by

놀랍게도 네가 나타난 거야


글자 그대로 놀랍다고 해야 할까, 글자 그대로라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Alakazam!”에 맞추어 석양에 물든 지평선에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지은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Orange Colored Sky>의 리듬에 맞추어 반가운 걸음으로 실루엣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실루엣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라, 너무 작은 것 같은데?’


거리가 좁혀져도 실루엣은 좀처럼 성인 남성의 형태를 띠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가 되자 지은은 당황했다. 지은과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은 냇 킹 콜과 닮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구상의 어떤 뮤지션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은 앞에 멈춰 선 사람은 앳된 얼굴의 아이였다. 게다가 검은 모자 아래로 보이는 얼굴과 검은 망토 아래로 보이는 손의 피부색은 진홍색이었다. 햇빛에 익어서 붉어진 피부가 아니라 색상표에서 보았던 잘 익은 석류 껍질 같은 붉은색이었다.


Alakazam and Good Bye!

수리수리마수리, 안녕!


<Orange Colored Sky>가 끝났다. 지은과 아이는 66번 국도 한복판에서 어색하게 마주 서게 되었다. 아이는 뚫어지게 바라보는 지은의 시선에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가 불편한 것을 알아차린 지은은 허둥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나가실 건가요?”


아이답지 않게 정중한 말투였다.


“아, 죄송해요. 제가 길을 막았네요.”


“아니에요. 마침 여기서 쉬어 가려던 참이었어요.”


아이는 고개를 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석류알처럼 붉은 눈동자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해가 지는 걸 보고 가려고요. 저기 앉아서요.”


아이는 도로변 풀밭을 가리켰다.


“저…… 괜찮으시면 같이 봐도 될까요? 방해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실은 저도 여기서 석양을 보려던 참이었거든요.”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풀밭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고 싶은 것을 방해받은 듯한 표정이 스친 것도 같았지만, 지은은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곳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은 여행자의 권리를 누리고 싶었다.


‘말만 안 걸면 되겠지 뭐.’


지은은 아이를 따라서 풀밭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해가 지는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았다. 해질 무렵의 고요함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지은은 해질 무렵의 고요함을 제외하면 즐거운 일이 오랫동안 없었던 한 아이의 이야기,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실제로 어린 왕자가 소행성 B-612에서 살 때 해 질 녘 고요함을 제외하면 즐거운 일이 오랫동안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화자가 어린 왕자를 만난 지 넷째 날이 되었을 때 짐작한 것이다. 그날 어린 왕자는 “아주 슬퍼지면 석양이 보고 싶어.”라고 말한 다음, “언젠가는 석양을 마흔네 번이나 봤어.” 고 했다. 화자가 “석양을 마흔네 번이나 본 날, 너는 얼마나 슬펐던 거야?”라고 물었을 때,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으려던 결심은 떠오른 생각이 언어로 변하는 것을 막기엔 약했다.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석양을 무척 좋아해서, 언젠가는 해가 지는 것을 마흔네 번이나 보았데요.”


《어린 왕자》는 지은이 온 세상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윈터 원더랜드에서 만난 석류빛 피부의 아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떤 이야기’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주 작은 행성에 살았나 보군요. 몇 발자국만 옮기면 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나 봐요.”


아이는 《어린 왕자》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묘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철새의 이동 경로를 따라 지구로 왔데요. 여러 소행성을 떠돌다가요.”


“힘들었겠네요. 힘들었을 거예요. 떠도는 것은 힘든 일이거든요.”


아이는 같은 말을 반복한 후, 마침표처럼 한 마디를 더했다.


“석양이 보고 싶어질 만하죠.”


“혹시 지금 떠돌고 계신 중인가요?”


“네. 철새와 함께 움직이고 있지는 않아요. 보시는 것처럼 혼자 떠돌고 있어요. 육지에서는 걷고, 바다에서는 배를 타요. 여러 소행성을 떠도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고단해요.”


“어디로 가고 계셔요?”


“그것도 모르겠어요.”


“아, 네. 음... 제가 조금 전에 만난 분은 떠날 때는 목적지가 꼭 없어도 된다고 했어요. 떠나야 할 때와 버려야 할 것을 아는 게 먼저일 수도 있는 거라고요.”


“음. 그렇지만 저는 언제, 어떻게, 어디서 떠났는지도 모르는걸요.”


연극적인 아이의 말에 지은의 머릿속 주크박스에서 냇 킹 콜의 <Quizás, Quizás, Quizás>가 흘러나왔다.


Siempre que te pregunto

난 늘 너에게 묻지

Que cuándo, cómo y dónde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냐고

Tú siempre me respondes

넌 늘 나에게 대답하지

Quizás, quizás, quizás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저는 기억을 잃었어요. 마법에 걸려서 떠돌게 되었다는 것 밖에는 기억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왜 마법에 걸렸는지는 기억하세요?”


“대마법사님께 잃어버린 것을 찾게 해달라고 했어요.”


“무엇을 잃어버렸는데요?”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참 우습지요…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을 찾겠다고 떠돌고 있는 것이니까요.”


“아니요. 그 대마법산가 뭔가가 나쁘네요. 보통 소원을 하나 들어주면서 저주의 마법을 걸지 않나요? 아, 제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건 아니고요. 어릴 때 읽었던 동화에서는 보통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지도 않고 마법만 걸어버리다니 너무한 것 같아요.”


“기억은 안 나지만 제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대마법사를 찾아갔어요. 마법사님은 마법의 주문을 찾으면 잃어버린 것이 저를 찾아올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주문을 찾을 때까지는 계속 떠돌아야 한다고 했어요. 육지와 바다를 떠돌면서 많은 왕들을 만났고, 바보 행세를 하는 현인들도 만났어요. 그들은 저에게 수많은 금언과 경구를 말해 주었지만, 그 어떤 것도 마법을 푸는 주문이 아니었어요. 때로는 마법사님을 찾아가 이제 그만 알려 달라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데 대한 형벌이라면 충분히 떠돌지 않았냐고. 도대체 언제, 어떻게, 어디서 찾을 수 있냐고 셀 수 없이 물었지만 마법사님은 늘 같은 대답뿐이었어요.”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지은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아시죠?”


아이만큼이나 놀란 지은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흥분하여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로군요! 바로 당신이에요! 마지막으로 마법사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말했거든요. 내가 너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마법을 푸는 주문을 알려줄 거라고요!”


지은은 당황했다. 어쩌면 냇 킹 콜의 수많은 노래 중에 답이 숨겨져 있을 것도 같지만 갑작스러운 전개에 머릿속 주크박스는 작동을 멈추어 버렸다.


Winter Wonderland _nature boy.jpg ChatGPT가 그려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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