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한국으로 해외 여행 간다, [해운대]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기

택시를 잡는다.

'어디로 모실까요?'

-해운대 바닷가요.

'바닷가요?‘

-네.


그렇다.

몇달간의 한국 체류중 내가 살게 된 곳은 부산 해운대 바닷가였다.

내가 해물, 말미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럴지도? 한국에 연고가 없는 반 이방인 상태의 영국 교포 아줌마를 스스럼 없이 받아 줄 곳은 부산에선 해운대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집을 계약하려 해도 최소한 2년에 가구 집기까지 혼수를 마련하는 수준으로 새로 장만해야 하니 영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이역만리에서 날아온 아이와 나는 결국 땅끝에 닿았다.

텅 빈 집에 도착한 첫 날, 우리는 바닷물이 개워 놓은 조개껍데기처럼 이를 달그락거리며 웃는다.

땅의 끝에 닿아야만 갈 수 있는 바다는 늘 놀랍다.

땅 끝의 자연 현상이라는 절대적 희소성 외에도 문명과 사람에 둘러 싸인 내륙에서는 크게 연연해야 할 일도 바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심리적 개방감 때문이다.

그리고 여름 바람처럼 불고 지나 갔을 인연도 마치 그 여름밤 만큼은 연인이 되어 버리는 마법 또한 바다의 특별함이다.




눈부신 유월의 햇살, 그 햇살을 반사시키는 하얀 모래알, 그리고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중간 어디쯤의 오묘한 바다 색깔, 새파란 바닷가를 등지고 선 젊음의 잘 그을린 몸을 바삭바삭하게 감싸는 새하얀 순면 셔츠, '북쪽'에서 막 도착 했는지 여행 가방을 덜덜 거리며 달려와 연신 질러대는 함성, 폭주하는 스피드 보트의 웅웅 거리는 소리, 초여름의 청포도가 알알이 터지는 듯한 파라다이스 호텔의 녹색 잔디.....….그리고 함께 바스라지는 햐얀 샴페인 거품, 바다 거품....자지러지는 웃음 그리고 여름.


내 머릿속의 바다는 '여름과 축제'라는 다소 진부하기도 한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바닷가에 살면서 발견한 더욱 특별하고 놀라운 점은 여름 바다라는 클리셰가 아니다.

바로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을 궂은 날씨에도, 내가 애써 찾아가지 않았을 그런 시간에도 바다는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말 그것은 특별한 발견이다.

날씨 좋은 주말에 마음먹고 먼길에 달려가면 기대한 대로 짠-하고 펼쳐 보이는 그런 바다가 아닌 사뭇 다른 얼굴이니까.



해운대 바닷가에서 사는 것의 가장 큰 묘미는 비가 오는 수요일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해운대 해변을 바라보며 혼자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여름에 사람들이 흘리고 간 수만가지 이야기와 추억이 무색하리만큼 해운대와 나, 오롯이 우리 둘만이 남겨진 시간.

그렇게 나와 바다는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


마치 모두의 환호를 받는 무대 위의 희극인이 홀로 분장실에 앉아 화장을 지우는 것처럼.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시간과 모습을 함께 하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약해지고 바닥을 드러낼 때, 모든 사람이 떠나고 난 자리를 지켜 주는 그 돈독함이랄까.




런던에서의 내 삶이 그러하듯 한국에서의 내 삶도 호기심 가득한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연장이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바닷가를 응시하고 있자니,  흥미로운 인간 군상이 눈에 들어온다.

늘 파도가 치는 해운대 바다처럼 비슷한 시간,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행위를 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인물의 발견 또한 바닷가에 사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이다.


늘 같은 자리에서- 땡볕에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이어폰을 꽂은 채 몇 시간 동안 춤추는 아저씨.

늘 같은 자리에서- 삼각 스피도를 입은 채 손을 흐느적 거리며 춤을 추다가, 내가 점심을 다 먹을 쯤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청년.

늘 같은 자리에서- '스타테라스'라고 적힌 파라솔에 삼삼 오오 모여 있는 중년의 남성들.


그 중 한명은 완벽한 태닝을 위해 '탈한국'적인 남성 티팬티 착용하는데, 그들에게 중년의 위기 따위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다.

그들의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하나같이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어떤 이야기와 말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익명의 이방인으로서 조용하게 와서 조용하게 가려고 했던 나는…

이미 바다와 엮여 버린 것 같다.


그것이 해운대 바닷가에 산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페즈, 모로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